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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Nov 04. 2019

회피적인 애미

괜찮은 엄마이고 싶으니까

이 전 글에 이어서 읽으시면 당신의 킬링타임과 저의 일기쓰기에 사소한 보탬이 됩니다.



나 저번에 이기적인 딸이라고 했나. 어쩌지, 오늘도 여전히 진행 중인데. 엄마가 점심때 칼국수를 해다가 들고 오는 길에 내가 이미 밥 먹었다고 해서 그걸 들고 다시 돌아갔다. 아아. 하지만 난 진짜로 밥을 먹었고, 칼국수는 뒀다가 저녁에 먹을 수도 없고, 엄마는 좀 물어보고 출발하지 참. 하지만 난 이기적이니까 미안해하지 않기로 한다. 이렇게 또 애미 1호와 애미 2호의 하루가 간다. 

이기적인 거나 회피적인 거나 어떻게 보면 그게 그건데, 어떨 땐 또 확연히 다르다. 상황과 대상에 따라 다 해석하자면 논문 한편 나올 것 같아서 여기서 비교하진 않을란다. 개인적으로 대입해보자면 평생을 부벼온 60대 엄마에게는 이기적, 18개월을 키운 아들에게는 회피적이고 싶다. 회피적인 부모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냐만은, 막상 육아를 해보니 그렇지 않고서는 제정신에 견뎌낼 수가 없다. 육아는 롱롱롱런이고 이 레이스를 완주하려면 일단 나부터 괜찮아야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아름다운 상황보다는 거지 같은 상황이 더 많이 생긴다. 그리고 대부분은 바로 옆에서, 아주 잠깐 방심한 순간에,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일이 벌어지고 만다.


하루는 엄마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동네 카페에 앉아서 일을 하고 있었다. 한 시간 정도 됐나, 핸드폰이 부르르 떤다. 이상하다. 시도 때도 없이 볶는 엄마도 일할 때는 연락 안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엄마의 목소리가 저 멀리 높은 곳 어딘가에 깊이 잠겨서 가타부타 설명도 없이 빨리 집으로 오란다. 무슨 일이냐고 세 번 정도 묻고 나서야 아이가 알약을 한 알 삼켰다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초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이제 막 발동 걸리기 시작한 원고를 덮었다. 병원에 가야 하니 준비하라고 말하고 택시 어플을 켰다. 뭐 비가 그렇게 많이 오는 것도 아니고만 한 대도 안 잡힌다. 어쩔 수 없는 기분으로 119에 전화를 걸었다. 걸어가면서 통화하니 목소리가 헐떡거려서 엄청 다급한 상황처럼 들렸다. 아파트 입구에서 만난 엄마는 사색이 되어서 이미 한바탕 울고 난 뒤였고,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 모습에 놀란 아이 역시 눈물콧물 쏟은 상태였다. 눈이 퉁 부은 것 외에는 특별한 증상이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와 손자의 난리통 사이에서 나는 묘하게도 아무런 동요를 느끼지 못했다. 어차피 병원에 가봐야 알 일이고 지금은 이상하리만치 늦는 구급차를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임신 중 하혈로 처음 타본 구급차. 두 번째도 그 뱃속의 아이와 함께 했다. 다행히 워낙 소량인 데다가 영향이 없는 약이어서 금방 귀가조치받았고 아들보다 더 걱정되던 엄마를 무사히 돌려보냈다. 다음날, 말끔하게 청소된 엄마 집의 사진이 카톡으로 도착했다.

또 한 번은 설거지를 하고 있었는데, 아이가 바로 옆에 있는 식탁의자에 서서 놀다가 의자가 넘어가는 바람에 온몸으로 중력을 경험했다. 싱크대에 한번 쿵, 바닥과 가까운 어딘가에 한번 쿵. 왜 팔을 다 뻗기에도 좁은 거리에서 내 새끼를 받아내지 못하는지, 운동신경과 순발력도 출산과 함께 낳아버렸나 모르겄다. 그 외에도 벤치에 앉아있다가 앞으로 떨어져서 철제 테이블(바로 옆에 플라스틱 테이블도 있었는데 굳이)에 눈두덩이를 쓸고, 아보카도 한 알 들고 까불더라니 스텝이 꼬여서 각 잡힌 원목 식탁 다리에 이마를 정통으로 박는다. 나는 매번 고개를 돌리기도 민망할 만큼 가까이에 있었고, 그럼에도 그 찰나를 구해내지 못하고 한 박자 늦게 아이를 안아 드는 것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몸만 다치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아이 앞에서 부부싸움을 한 적도 있다. 세상에 그런 몰상식한 짓을 나는 안 할 줄 알았지. 하지만 뭉친 감정이 명치를 지나 목구멍을 뚫고 올라오는 순간에는 아이고 뭐고 뵈는 게 없다. 큰 소리 몇 번 오가고 나서야 어쩐지 눈치를 보는 것 같은 작은 뒤통수가 눈에 들어온다. 편식을 물려받은 아이와 식사시간마다 전쟁통을 치르는 바람에 밥 한술 갖고 소리를 지른 적도 있고, 분에 못 이겨서 엉덩이를 한대 빵, 때린 적도 있다. 모두 엉망진창인 장면들이고 아이를 직접 키우기 전에는 나와 상관없는, 자제력 부족하고 무지한 엄마들만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 되었고 하나하나 나와 아이의 관계 속에 파묻고 있다.


파묻고 있다. 아이의 아픔을 막지 못한 애미, 아이에게 직접 아픔을 제공한 애미는 이미 쏟아져버린 일에 대해 생각하는 게 괴롭다. 정말이지 너무나. 알약을 삼킨 모습을 직접 목격했더라면 그렇게 태연할 수 있었을까. 아이가 입과 눈, 이마와 뒤통수를 부딪히던 순간을 몇 번이고 머릿속으로 재생하고 고개를 흔들어 지워버린다. 아이가 엉덩이를 맞고 우는 얼굴은 스스로 다쳐서 우는 것과 어딘가 달라 보인다. 그 차이를 발견하고 싶지 않아서 재빨리 안아 달랜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고 이 어리디 어린 아이 앞에서 사사로운 감정 하나 참지 못하는 성인이라 미안하다. 내 육아는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인가. 하지만 하루가 멀다 하고 다치는 아이, 하루가 다르게 자아가 강해지는 아이, 하루하루 피로가 쌓이고 경력이 줄어들고 있는 나, 그 사이에서 계속 마음 아파할 수는 없다. 그러면 아이에게는 마음이 아픈 엄마만 있다. 속상하고 미안하고 안 괜찮은 엄마만 있다.


친구의 아이가 아주 어릴 때 아파서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기관지염인가 구내염인가 수족구인가 하여튼 흔한 병이었다. 아이가 아픈 걸 보는 건 힘든 일이지만, 조금 많이 힘들어하는 친구의 말에 브레이크를 걸었다. '나 따위가 엄마라니'라니. 엄마도 사람이다. 게다가 엄마는 처음이다. 첫째 엄마도 처음, 둘째 엄마도 처음. 그러니까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거지. 실수하고 잘못할 수도 있는 거지. 그래서 괜찮아, 괜찮아, 하고 회피하기를 택한다. 그러면 아이는 이마나 엉덩이는 아직 좀 아플지 몰라도 괜찮은가 보다, 하고 다시 놀이를 시작한다.

하늘이 뒤집혀도 내 잘못인 건 맞다. 아이를 식탁의자에 서서 놀게 두면 안 되고, 1분이라도 인스타그램에 눈을 돌리면 안 되고, 약이나 작은 장난감을 손에 닿게 두어도 안 된다. 하지만 실상이란 그렇게 철저할 수가 없다. 아무리 얘기해도 아이는 위험에 현혹되고, 육아 사이에 훔쳐보는 인스타그램은 너무 재미지다. 그러니까 왜 아이를 돌보지 못한 거야, 가 아니라 왜 하필 그때 거기에 식탁 다리가 있었던 거야,를 선택하자.


꼼꼼하고 미련 많은 엄마가 곱씹고 후회하는 모습을 종종 봐왔다. 엄마는 반품의 여왕이다. 반면 난 일단 샀으면 생각보다 별로여도 마음에 드는 구석을 꼭 찾아서 반품하는 번거로움을 피한다. 내 기준에서 엄마의 생활은 번복으로 가득 차 있다. 나에게는 플레이 버튼만 있는데 엄마는 리와인드와 플레이를 수없이 반복한다. 빈틈없지만 피로하다. 그 에너지를 거부하는 사이에 내 무의식은 도망자의 감각을 키웠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과거로 밀쳐놓고 그다음을 생각한다. 회피적이 진취적과 같은 말이던가?

물론 다음에는 조금, 아주 조금은 더 잘해야 한다. 부부싸움이나 체벌은 이후로 다시 하지 않았다. 아이는 두 사건 모두 잊어버렸을 수도 있지만 내 가슴에는 두 개의 멍이 남았다. 내가 안 괜찮아서 안 되겠다. 운동신경과 순발력은 배출해버렸기에 장비의 도움을 받고자 쿠션 헬멧을 메이드 인 이딸리아로 하나 주문했다. 빠방 타려면 헬멧 써야 한다고 했더니 자기가 찾아서 쓴다. 머리가 땀에 절긴 하지만 혹보다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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