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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룬아 Oct 21. 2019

이기적인 딸내미

잔소리 더미에서 살아남는 법

이 글을 올리고 나면 천하의 이기적인 회피주의자라는 손가락질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는, 나와 비슷한 성격 탓에 비슷한 고민으로 끙끙 앓고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제발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어서이다. 그러니까 '우리' 같이 섬세하고 예민하고 여리고 자괴감과 자책감에 치여 사는 사람들은 조금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조금 회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서이다. 자기 합리화를 좀 거창하게 표현한 거 맞는데, 자기 합리화는 기나긴 인생에서 생존하는데 필수적인 능력이다. 그래서 더욱 이 속내를 퍼뜨려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 하고자 한다. 미리 말해두지만 여기에서 얘기할 '이기심'과 '회피'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러 공동체에서 종종 볼 수 있는 의심할 여지없는 이기주의자나 회피주의자와 동일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찌 됐건 나의 이기심과 회피가 자주 적용되는 대상은 가족이다. 가족은 나쁘게 말하면 만만하고, 좋게 말하면 가장 많은 허물을 벗을 수 있는 세계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가족만큼이나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노출시키는 대상도 없다. 고로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본성이 드러나버린다. 평소에 다스리던 감정도 가족 앞에서는 쉽게 터져버리고 만다. 쉽게 다투고, 쉽게 화해하고, 쉽게 울고, 쉽게 웃는다. 그중 가장 격렬하게 비비적대는 대상은 아마도 엄마와 아들일 거다.

일단 엄마 얘기부터 하자면, 울 엄마는 감정과 걱정과 관심과 간섭이 지나치다. 내 아들내미 옷 한 벌 사는데도 밤낮 가리지 않고 연락이 온다. 방금 헤어졌는데 할 말이 남아서 카톡이 오고 전화가 온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살고 있는 엄마는 그 짧은 거리만큼이나 구체적으로 당신의 딸과 손자가 궁금하다. 우리의 생활패턴을 속속들이 알게 된 엄마는 때에 맞춰서 잘 잤니, 밥 먹었니, 뭐 먹었니, 뭐 입었니, 쌌니, 어디니. 그야말로 CCTV만 안 달았을 뿐이다. 대중교통으로 2시간 걸리는 곳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로 이사 온 것은 육아에 도움을 받고자 함이었기에 그렇게 따지면 엄마가 이러쿵저러쿵 질문과 잔소리 공세를 하더라도 나는 할 말이 없어야 한다. 하지만 비루한 내 인내심은 곧잘 끈을 놓치고 만다. 신세 지고 있다는 걸 매 순간 느끼면서도 내 입에서 나오는 대답들은 영 자세하고 다정하지가 못하다. 아, 이렇게 말하면 너무 미화됐나? 제대로 말하면 좀 싸가지가 없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지만 쏟아지는 과함을 받아내기엔 내 그릇이 너무 작다. 물론 아예 안 받는 것은 아닌데, 그러면 이때다 싶어서 차고 넘치도록 붓고 나는 허우적댄다. 게다가 우리 엄마는 성격이 급하고 걱정도 많아서 카톡에 답장 안 하면 전화 와, 전화 안 받으면 찾아와, 뭐라도 빠뜨렸을까 봐 발 동동, 추울까 봐 더울까 봐 발 동동.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면 못마땅할 때가 많은데 이유는 내가 바로 엄마의 성격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내 자존심에 똑같다고 하지는 않겠다. 희석된 버전이지만 닮은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엄마가 발을 동동동동 동도로동동 구를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더 느긋해지고 담대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이 투머치 라이프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다.

엄마에게 퉁명스럽게 XX하고 나면 나는 쓰레기가 되고 후회가 밀려온다. 엄마는 종종 장도 봐주고, 밥도 해주고, 아이도 봐준다. 엄마 덕분에 이 글도 쓸 수 있다. 그런데 조금 귀찮게 한다는 이유로 따뜻한 선물이나 (아, 선물을 하면 왜 또 이런 걸 샀냐고~ 필요 없다고~ 반품하라고~ 한사코 사양하길래 도대체 재미가 없어서 다시는 선물을 하지 않게 되었다) 말 한마디 건네지는 못할망정 여전히 철없는 사춘기 딸내미 짓거리나 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자책감에 시달리기 시작하면 약도 없고 답도 없다.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도 발굴하기 힘들 이 관계의 깊은 뿌리 때문에 우리의 모습은 언제나 이런 모냥이다. 그러니까 내가 던진 한마디를 후회하고 엄마가 던진 한마디에 일일이 상처 받기 시작하면 그건 끝이 보이지 않는 블랙홀에 뛰어드는 것과 같다. 며칠에 한 번씩 부정적인 감정이 스쳐 지나가지만 그냥 그렇게 가게 놔둔다. 왜냐면 이건 엄마만의, 나만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온 우주가 우리를 이렇게 맺어놓았고 그 상태로 투덜투덜 굴러가게 두는 게 가장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이상적인 모녀지간이 되겠다고 서로 눈치 보느니 엄마는 마음껏 간섭하게 두고 나는 나름대로 짜증을 내면 된다. 그래서 종종 죄책감이 들면 나만 잘못한 거라고? 어떤 보살이 이걸 다 참아? 아무리 엄마가 육아를 도와준다고 해서 이렇게 숨통을 조여도 된다는 건 아니잖아,라고 생각해버리기를 택한다. 이게 바로 나의 이기적인 부분이다.

K-도터라는 말이 있더라. 불쌍한 울 엄마, 안쓰러운 울 엄마. 효녀라면 같이 해외여행도 한번 다녀와야 하고, 엄마와 쇼핑도 하고 데이트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자꾸만 눈에 밟히는 엄마. 나는 그런 딸이 되지 못할뿐더러 우리 엄마도 여행이나 데이트에 별로 관심이 없다. 이런 표면적인 게 아니고서라도 서로를 안쓰러워하는 마음은 독이 될 뿐이다. 여행을 가고 싶으면 가는 거고 외식을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안쓰러워서, 불쌍해서, 아이구, 아이구, 하는 식으로 시간을 보내면 그 사이가 얼마나 절절하고 안타까울꼬. 

그래서 나는 엄마를 향한 미안함과 안쓰러움으로 속 끓이지 않기로 했다. 엄마의 인생에 대해서, 나의 인생에 대해서 서로 해줄 수 있는 건 매우 소소한 것들 뿐이다. 엄마는 계속 날 귀찮게 할 거고(하고 있고) 나는 계속 엄마를 귀찮아하겠지만(하고 있지만) 더 돈독하지 못함에 애써 애태우지 않으려 한다. 이렇게 마음먹지 않으면 우리는 매일 밤 미어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눈물을 흘려야만 할 테니까. 짠내로 얼룩지기 싫어서 각자 필요한 만큼의 이기주의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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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편에서는 회피주의자 엄마(나새끼) 이야기를 해보려고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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