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오른팔에 블랙 앤 그레이 패럿 튤립 한송이를 심었다. 시작은 호기로웠는데 막상 해놓고 보니 조금 과한가 싶어서 집에 도착하자마자 남편에게 보여주며 '좀 크지?'라고 물었더니 '그 정도 하려던 거 아니야?'라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십 년째 타투를 받아오고 있다. 크고 작은 그림들이 은근하고 확실하게 피부를 덮는다. 진짜 타투냐고 묻는 사람, 왜 타투를 하냐고 묻는 사람, 힐끔 쳐다보는 사람, 예쁘다고 칭찬하는 사람 등 반응은 제각각이고 다양하다. 그중 남편의 반응은 무반응에 가깝다.
처음 타투를 한다고 했을 때도 기억에 남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대답을 했다. 차츰 타투를 받는 텀이 짧아지고 개수가 많아지니 그만 하면 안 되냐는 말을 넌지시 하기도 했었다. 어느 날에는 갑자기 자기 팔이 영 썰렁하다며 그림을 네 개나 연달아 새겼다. 그리고 이제는 타투를 하겠다, 여기는 어떤 것 같냐, 이 도안은 어때, 하고 물으면 이렇다 저렇다 할 것 없이 '어차피 너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잖아.'라는, 세월이 진득이 묻어나는 대답을 한다. '응, 어떻게 알았어?'
비단 타투만의 얘기가 아니다. 한창 연애하던 13, 아니 14년인가? 암튼 오래전에도 도통 내 이모저모에 큰 관심이 없었다. 이모저모라 하면 데이트하던 날 고심해서 입은 옷, 오랜만에 자른 머리, 어젯밤 귀가시간, 얼마 전에 만난 남사친 같은 것들이다. 나의, 또는 여성으로서의 권리에 대한 개념이 미숙할 당시 남편의 무관심이 서운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나 오늘 뭐 달라진 거 없어? 넌 어제 내가 집에 잘 들어갔는지 궁금하지도 않냐 등의 질척거림으로 종종 말다툼에 시동을 걸기도 했다.
남편이 취향이 없던 것은 아니다. 2000년대 후반에 스모키 화장과 가죽재킷을 좋아했던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딱히 그걸 요구한 적은 없었다. 아무리 짧은 치마를 입어도, 깊게 파인 셔츠나 아슬아슬한 나시티를 입어도 이러쿵저러쿵 토다는 일이 없었다. 그러니까 타투도 마찬가지다.
30대 중후반이 되고 많은 개인들이 자신의 영역에 대해 확실하게 인지하게 된 요즘, 남편의 무관심은 사실 고마워해야 할 것이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내 몸에 뭘 그리든 말든, 어떤 옷을 입든 벗든, 어딜 가서 누굴 만나든, 남편은 나를 있는 그대로 두는 걸 택했다. 택했다기보다는 그게 남편이다. 복잡한 사고를 가졌거나 사회 이슈에 통달했다거나 체면을 차려서가 아니라 그냥 개인적 영역에 대한 존중이 확실한 사람이다. 부모님의 투머치 관심 하에서 살아온 내가 동물적 본능으로 고른 가족인지도 모른다. 선견지명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덕분에 내 권리는 남편에 의해 침범당했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백지 같은 남편. 나는 오늘도 마음껏 나를 새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