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린 시절에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달콤한 칭찬에 이끌려가다보니 이제 아예 나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높아져버려서 오히려 야단맞을 일이 많아져버렸다. 또 자꾸만 잘해야 할 것들이 많아졌고, 그 모든 것을 잘해보려고 허우적대다가 실수를 하거나 지치기도 했다. 그때의 나에게 실패는 막연한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억울한 마음이 들어서 한동안은 일부러 부족하게 굴어보기로 했다. 딱히 크게 노력하지 않았으므로 얻은 결과에 크게 실망하지도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부족하게 군 것이 아니라 사실 부족한 것이었다. 세상천지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얼마든지 있었다. 비참하게도 나의 방황은 성적표로, 재수로, 학점으로 고스란히 남아서 흑역사가 되었다. 잠시 피했던 실망이 한꺼번에 몰려와 상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나는 마침내 최근 몇 년 사이에 운명론자가 되었다. 세상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다고 믿던 어린 날들에 마주친 크고 작은 실패들은 자꾸만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의 가장자리로 나를 밀어댔다. 위태로워 보이는 끝으로 밀려가면서 나는 내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존심을 잃지 않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상처가 되어 부러지고 터지면서 결국은 밀려갔다. 의도치 않게 조각보같은 삶의 귀퉁이로 밀려갈수록 실패하면 큰일이라도 나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이제는 낙오하리라고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았으나 신기하게도 그저 자리가 바뀌었을 뿐 낙오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새로운 삶의 중심이 마음에 들었다. 실패들은 그 나름의 교훈을 남기며 잔뜩 모나있었던 나를 동그랗게 깎아주고 모난 곳을 채워주었다. 그렇게 나는 조금은 강제로 변화하고 낮아지고 겸손해지며 어른이 되었다.
일부러 실패할 필요는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실패는 새로운 변수로 사람을 기른다. 나는 문이과 선택에 실패하고, 대입에도 실패했으며 임고에도 실패했다. 덕분에 수업시간마다 나의 실패담으로 아이들을 격려하거나 위로하기도 하고, ‘하면 된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선생이 되었다. 짧은 몇 년 동안에 여러 학교를 골라 다녀볼 수 있게 되었으며, 다양한 아이들을 만나볼 수 있게 되었다. 그간에도 숱하게 실패하며 짧은 생각을 조금씩 길게 할 수 있었다. 아직까지도 방황하는 청춘인 것은 조금 슬프지만 그러나 문이과 선택에, 대입에, 임고에 한 번에 성공했다면 나는 아마 지금보다 훨씬 건방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다. 실패했기에 실패가 두렵지 않게 되었고, 처음 생각했던 오만한 길을 벗어나 비로소 내 그릇에 맞는 자리에서 속을 채워가게 되었다. 감사하게도 아이들의 좌절에, 실패에, 고민에 조금 더 공감하는 선생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이것을 깨닫는 데에 삼십년이 걸렸다. 매일 만나는 열일곱 살 연약한 영혼들은 당연히 귀에 못이 박히게 말해주어도 무슨 말인지 모를 것이지만, 그래서 매시간 실패해도 괜찮다고 그러니까 포기하지는 말자고 말하고 또 말한다.
그 말이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 제자들이 실패를 잘 감당하고 담대하게 받아들이며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내 제자들의 실패를 비난하기보다 응원해주었으면 좋겠다. 또 내가 만나지 못한 아이들에게도, 또 아프고 힘든 어른들에게도 누군가가 말해주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