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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드라운 고슴도치 May 30. 2022

착한 호구들의 세상을 꿈꾸며

2016 고대신문 졸업동인 칼럼


“나쁜 놈이 갑이 되는 걸까? 아니면 갑이 되면 나쁜 놈이 되는 걸까?”



남을 돕고 배려하며 착하게 살라고 배웠으니까 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진다고 융통성 없는 나는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살아야 하는 줄 알았다. 그렇게 살면 되는 줄 알았다. 그리고 종종 허탈한 마음으로 친구들과, 동료들과 밥을 먹으며 저런 의문을 나누게 되었다. 사회에서 만난 많은 착한 갑들을 내가 기억 못하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정말 신기하게도 절대 다수의 갑은 ‘착함’이라는 기준에는 많이 못 미치거나, 아예 그 기준이 상식과 많이 달랐다. 학생 때 학생 운동을 하였다고 깨어있는 사람인 양 말하던 사람은 여자 부서원에게 커피나 타라고 하는 꼰대가 되었고, 이기적인 사람들 때문에 젊은 계약직 선생들의 시간표가 엉망이라며 깨어있는 척하던 정규직 모 선생은 심지어 완전한 갑이 아니면서도 갑인 척 거들먹거리면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선생들에게 자기의 개인적인이나 성과를 내야 하는 일까지 떠넘기곤 했다. 진심으로 열심히 살면 이용하기 좋은 호구가 되기가 쉬웠다.  



‘착하다(善)’라는 말이 정말로 애매한 말이기는 하다. ‘착하다’를 국어사전에서 찾으면 ‘형용사/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 라고 나온다. 이 기준은 사람마다 정말 많이 다르다. 나는 분명 고등학교에서 ‘착한’ 아이들을 가르치지만, 가끔 ‘착한’ 아이들에게 상처받는다. 오늘은 무기력하게 수업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을 갈구거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등의 방법을 사용해서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끌고 가려는 나의 선의가 수업시간에는 따박따박 수업 내용만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깨우거나 어르고 달랠 필요가 없는 착한 아이의 성실함과 부딪쳐 서로 상처를 받았다. 누가 착하고 누가 나빠서가 아니다. 그저 기준이 다른 것이다.



이렇다 보니 아이들을 가르치는 입장에서 ‘착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가르치는 것이 의미가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아이들은 대부분 갑을 꿈꾼다. 그런데 착하게 살면 갑보다는 호구가 되기 쉽다. 게다가 지향점이라도 분명해야 할 ‘착함’의 기준이 애매하다. ‘착한’아이들은 융통성이 없어서 선생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 데에 익숙하다보니 뺀질대는 아이들에 비해서 손해를 보는 일이 자주 있다. 같은 잘못을 해도 ‘착한’ 아이들은 원칙만큼 손해를 보고 혼나는데, 뺀질거리는 아이들은 뒤에서 나쁜 짓을 해도 뻔뻔하게 자기 챙길 것을 다 챙기고, 더러는 착한 아이들을 딛고 더 좋은 위치에 서기도 한다. 그럴 때도 선생님이나 다른 아이들이 피해보지 않도록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고 타인을 위로하는 착한 아이들이 고맙기도 하지만 종종 안타깝고 답답하기도 하다.



착한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손해를 본다. 최근에 모 쇼핑몰에서 옷을 샀는데 한 달간 배송조차 뜨지 않기에 고객 센터에 전화를 해서 매번 이런 식이냐고 물었더니 배송 지연에 대한 보상 대책은 없고, 이렇게 항의 전화를 하시는 고객님께만 적립금을 넣어드리며 달래는 방식으로 쇼핑몰을 운영해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조용히, 무슨 사정이 있겠으려니 하며 마음으로 그 쇼핑몰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사람들은 그냥 호구가 되었다는 뜻이다. 상황이 이러한데 나보다 남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하라고 가르쳐야 할까?



그렇게 ‘착한 호구’로 자란 아이들이 2년 전 세월호에서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잘듣고 죽었고 문제를 키운 나쁜 사람들은 살아 나오는 동안에 따뜻한 마음으로 타인을 생각하고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하려던 사람들이 많이 죽어버렸으며, 며칠 전에는 성실하고 착하게 윗사람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하라는 말을 듣던 착한 청년이 비명횡사하였다. 이렇게 허무한 일들이 자꾸 일어나다보니, ‘왜 나쁜 사람들은 잘 먹고 잘 사는데 착한 사람들만 죽어나가는가.’ 하는 의문이 들면서 문득 ‘신께서 착한 사람을 먼저 데려간다.’는 말이 왠지 야속해진다. 진정한 불로장생의 길은 오로지 자신만 바라보는 인성 쓰레기로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가끔 한다. 싸이코패스가 사실은 진화한 인간형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나는 아이들에게 착하게 살라고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그런데 뜻밖에, 아침 출근길에 뉴스기사를 보면서 의외로 답은 간단한 곳에 있는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물론 완벽한 답은 아닐지라도, 그 답이 언제 바뀔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구의역 사고를 추모하는 기사의 사진에는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내서 착하고 성실하게 살다가 죽어간 이름모를 청년의 죽음을 함께 애도하고 삶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따뜻함에는 사람들의 ‘착한 마음’이 담겨있었다. 개개인의 호구로운 착함은 가끔 비극적일지라도, 착한 마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은 따뜻하다. 착한 사람들을 향한 착한 사람들의 위로가 있기에 착실했던 청년의 삶은 그저 꺼진 것이 아니라 착한 사람들의 마음에 불씨를 지피는 힘을 갖게 되었다. 남을 딛고 성공한 갑들이 세상을 팍팍하게 만들고 있을 때에, 자신의 시간과 마음을 희생하는 착한 호구들의 불씨는 더 넓고 크게 번져서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내 나름의 ‘착함’의 기준을 ‘따뜻함’으로 정하기로 했다. 혼자 사는 삶이 아니라 함께 사는, 타인의 삶을 굽어볼 수 있는, 때로는 부족하거나 힘들어하는 타인을 위해 내 마음의 한켠을 내줄 수 있는 따뜻함. 조금 호구처럼 살더라도 그런 따뜻함을 나누는 삶이 이기적인 마음으로 모두의 세상을 팍팍하게 만드는 갑이 되는 것보다 훨씬 행복한 것일 수도 있다고. 성공은 때로 한 방향이 아니라고. 따뜻한 호구들이 모여서 세상을 품을 수 있는 훨씬 크고 넓은 마음을 펼칠 수가 있다고. 이해와 공감, 진심과 사랑의 따뜻한 힘을 나는 믿는다고. 물론 지금의 기준에서는 완전히 틀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렇게 믿고, 그렇게 가르쳐야겠다. 예전에 상상도 못했던 세상이 지금 온 것처럼, 지금 유토피아라고 믿는 착한 호구들의 마을이 당연해지기를 바라며.  <德善>





원문 링크 : http://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23004


출처 : 고대신문(http://www.kunew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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