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에 대하여

낡은이의 사랑에 대한 고찰

by 보드라운 고슴도치

10대의 사랑과 20대의 사랑과 30대의 사랑과 40대의 사랑은 무엇일까.

무엇인가 다르다고 하는데 무엇이 다를까. 요즘 내가 가장 어려워하는 문제다.


언젠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각 단계의 나이대에서 획득해야 하는 사랑의 과정은 있다는 생각은 한 적이 있다.

이를테면 10대에 대체로가 모태솔로인 게 별로 이상하지 않을 때는 처음 겪어보는 사랑의 열병을 크게 앓으면서 죽네사네 할 수 있겠지만, 그 과정을 겪지 못해 20대, 30대에 갑자기 그러면 상대가 많이 당황할 수는 있겠다고. 20대, 30대에는 대체로 그래도 10대 때보다는 상대가 모태솔로일 거라는 생각을 상대적으로 덜하게 된다거나, 이 정도의 경험은 대체로 겪었을 것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는 서로 상정하고 가는 부분이 있다거나. 그렇다고 그 과정을 겪지 않은 사람이 이상하냐면 또 딱히 그렇지는 않다. 약간 난이도가 올라갈 수는 있지만, 세상은 원래 과정을 충실하고 성실하게 겪는 만큼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원이라면 학위라도 주지. 이건 그것도 아니니까.


그런데 이런 것과 좀 다른 차원에서, 20대의 연애는, 30대의 연애는, 40대의 연애는 이래서는 안 된다.라는 글을 많이 본다. 일면 맞는 부분도 있다. 서로 닳고 낡고 지치고 입장이 달라진 바에야 아무것도 모를 때의 순수한 마음을 서로에게 당연하게 기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서로에게 배움과 깨달음이 있을 수 있는 부분, 그래서 어떤 방향으론가 성장했을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또 어느 정도 양해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런데 가끔은 '사랑'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로 그저 서로에게 전혀 일말의 의지와 기대도 없이 쿨하게 메말라야만 하는 것이 닳고 낡은 이들의 사랑법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기가 어렵다.


닳고 낡도록 다치고 깨지면서도 결국은 사랑하고 싶은 마음은 어느 정도는 서로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이 아닐까. 어쩌면 사람이라는 존재를 순수하게 믿기 어려워진 낡고 닳은 존재들이, 그러나 상대만은 오롯하게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남은 생을 기대어 갈 수 있다는 마음으로 화사하게 피었던 날들이 시들어가더라도 서로의 낡음을 감내할 수 있는, 어쩌면 화사함을 사랑하는 인간의 보편적인 마음을 뛰어넘을 수 있는, 낡았기 때문에 직면할 수 있는 사랑의 본질을 마주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사랑의 본질은 어느 정도는 상대를 견딜 이유를 찾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서로 다른 사람들이 만난다면, 오랜 기간을 보면서 좋은 모습뿐 아니라 낡아가는 모습까지를 함께하고 감내하게 된다면. 피는 모습을 보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시들고 지는 모습까지를 감내하고 쓰다듬을 수 있는 것. 이내 꽃이 지고 무성한 잎만 남아도, 그리고 그 잎이 다 지고 한 해의 계절이 사그라드는 때가 와도 묵묵히 당신의 옆을 지킬 것이라는, 그렇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견뎌낼 것이라는 마음과 그래야 할 정당성을 찾는 과정.


덜 살고 덜 상처받은 맑고 싱싱한 영혼일 때는 멋모르고 서로를 무리하게 감내하겠다는 뜨거운 열정이 있다.

그러나 더 긁히고 더 상처받아 너덜너덜해졌을 때, 그리고 그 상처가 굳은살이 되거나 철갑옷이 되어버렸을 때는 더러는 소라게처럼 껍데기 안에 숨어버리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사실 자신은 껍데기기가 아닌 무른 살이므로 그 살을 누군가와 맞대고 싶기도 하고 그런 양가감정에 휘말리는 것이다. 그래서 덜 상처받는 쪽으로, 덜 감내하는 쪽으로 자꾸만 손을 뻗었다가 숨어버리곤 한다.

그러나 더 낡고 상처받았을수록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런 낡고 상처받은 나에게 손을 내미는 마음은 더 눈물겹고 따뜻한 것이라는 것을. 그렇기 때문에 껍데기 속으로 숨을 준비를 하지 말고, 낡았다는 핑계를 대지 말고, 보드랍고 싱싱한 영혼이 아닌 상처받고 긁히고 치여서 만신창이인 내 손을 잡는 마음에 상처를 덧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그렇게 서로 함께 낡아가며 살을 맞댈 수 있는 마음으로 한 번도 상처받지 않았던 것처럼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어쩌면 단점뿐일 수 있는 낡음의 장점을 발견하는, 더 노련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방법이 아닐까.

달라야 한다면 줄이고 숨는 것이 아닌 무르익는 것, 화사했던 한 때에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불꽃같은 그것을 뛰어넘는 농익음과 깊이 있음이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숨어서 껍데기 안에서 누가 껍데기를 깨주기만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도망칠 준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어울리지 않는 화사함 주위를 맴돌며 화사한 것만을 탐내는 것이 아니라 무르익음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역시 무르익은 사람이 되어서. 낡음의 가치를 굳이 찾는다면 소극성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성과 개방성이 되어야 하는 게 아닐까.


얼마 전에 어른의 사랑은 어릴 때의 사랑과 달리 서로를 가장 내밀하게 생각하지만 서로에게 최소한의 노력만 해도 괜찮은 것인 것 같다는 글을 보고 조금 부러웠다. 사실 나는 그런 사람은 아직 못 되는 거 같아 여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것만 같은 느낌을 받음과 동시에 그렇다면 그들이 생각하는 내밀함은 무엇인지가 조금 궁금해지기도 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사랑이 끊겨나갔다는 후기도 보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발견하지 못했던 내밀함의 정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니 결국 그냥 그것은 글쓴이의 상대인 그 사람의 사랑의 모습이었을 뿐 어른의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온전하게 사랑할 줄 모르는, 무르익지 못한 미숙한 사랑이었고 더 냉정하게 말하면 그냥 덜 사랑했던 것이다. 어쩌면 사랑의 본모습은 오히려 낡지 않는다. 사람마다 그 모습이 다를 수는 있어도.


껍데기 속으로 도망치는 것과 성숙한 것을 혼돈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무르익되, 본질은 잃지 말아야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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