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담다.' 공간의 현상 : 제 1호. 저자 : 이민규
더담다의 첫 번째 '공간의 현상'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공간 분석가이자 사진작가인 우리는 건축물을 단순한 구조물로 해석하지 않는다. 우리는 건축물을 도시와 사람, 시간이 만나 빚어내는 하나의 '현상(Phenomenon)'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어떤 맥락이 만들어지는지, 어떤 감정이 생격나는지 기록한다.
우리는 머리와 가슴의 균형을 지키며 건축 공간이 가진 이야기를 찾아내고, 그 속에서 도시와 건축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들을 함께 탐구할 것이다.
그 첫 번째 대상으로 한남동에 위치한 FEZH를 선택했다. 한국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이자, 역사적으로도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한남동에 모로코의 고대 도시 FEZ를 닮은 건축물이 있다는 것 자체로도 매우 흥미로웠다.
FEZH는 서울에서도 특별한 곳에 위치해 있다. 한남동 일대는 여러 국가의 대사관과 미군 시설 등등으로 다양한 문화가 섞여있고, 지금은 부자들이 사는 곳으로 유명하다. 한남동 일대는 지리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서울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임은 분명하다. 뒤로는 남산, 앞으로는 한강의 배산임수의 지형과 강남과 강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 지리적 이점이 크다. 한국전쟁 이후, 용산 미군 기지의 영향으로 외교관과 외국계 기업, 대사관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한남동의 입지는 점점 탄탄해져갔다. 지금에 들어서는 고급 빌라들과 트렌디한 명품 상권이 들어오면서 단순한 부촌을 넘어 "가장 트렌디한 문화 소비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하였다. 이런 한남동 상권의 경쟁력은 코로나 시절, 압도적인 공실 방어 통계를 통해서도 확인 할 수 있다.
6호선 한강진역, 이태원 역에서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며, 버스정류장 등이 반경 500m 내에 위치해 있다. 하지만 건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다른 지역과는 다른 접근이 필요하다. 이 지역은 4차선의 이태원로가 메인 스트리트의 역할을 하지만, 다른 레이어처럼 구분되어 있는 '옆길, 이태원로 42길'로 이동하기 위해서는 급경사를 지나가야한다. 이태원로와 블럭 하나를 두고 평행하게 나 있는 이태원로 42길은 약 20m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도차이가 약 13m 가량 발생한다. 이 고저차는 여러 건물들의 엘리베이터를 이용함으로 극복된다. 이어서 FEZH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차량 1~2대가 겨우 통과하는 골목길들을 지나야 한다. 의도적으로 한남동의 중심과 격리된 듯한 느낌이 드는 위치이다.
한남동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급격한 경사지형이다. 그리고 페즈의 표고는 이태원로보다 약 23m 가량 낮다. 이태원로에서 페즈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좁은 골목길들을 지나서 한남동의 더욱 깊숙한 곳으로 계속 내려가야한다. FEZH는 이러한 급경사가 만들어내는 지형적 틈새에 영리하게 자리잡았다. 건물은 경사를 거스르지 않고 따라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다층적 진입 체계를 만들어 냈다. 진입로에서 1층으로의 접근과 지하로의 접근이 모두 가능한 것이 이런 지형적 조건 덕분이다.
설계사무소 : ITM건축사사무소, 대표 유이화
용도 : 복합문화시설
대지 면적 : 480㎡
건축 면적 : 287.89㎡
연면적 : 1,195.55㎡
용적률 산정 면적: 719.94㎡
건폐율 : 59.98%
용적률 : 149.99%
조경 면적 : 50.4㎡
층수 : 지하 3층, 지상 4층
구조 : 철골철근콘크리트, 일반철골구조
주차 : 7대 190.89㎡
페즈는 지하 1층부터 최상층까지 수직적으로 전개되는 복합 프로그램 을 담고있다.
내부 프로그램 : 지하 1층 에스프레소 바 '미나 앤 폴' , 1층 뮤직 바(bar) '블루캣', 전시공간 '보텍스 갤러리', 명상 / 차 리트릿 공간 '카사 델 아구아', 회의실
첫 만남 : 골목에서의 발견
한남동은 여러 명품스토어와 개인 편집샵, 카페, 맛집 등등으로 많은 사람들과 차량들로 항상 번화한 곳이다. 이런 한남동의 번화가에서 살짝 벗어나는 작은 골목길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페즈를 만날 수 있다. 페즈는 마치 숨바꼭질을 하듯 한남동의 구석에 숨어서 우리를 맞이했다. 주변의 다른 건축물들과는 확실히 다른 건축적 언어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페즈의 가장 인상적인 첫인상은 켄틸레버 구조로 돌출된 매스와 그 아래로 들어갈 수 있는 지하 광장이다. 켄틸레버 매스는 하단이 부드럽게 깎여 파도같은 형상을 하고있다. 매스의 전면부는 단단한 석재 루버가 촘촘히 세워져있어 첫눈에는 위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동시에 그 아래 숨겨져있는 지하 공간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만들어준다.
진입의 선택 : 두 개의 문
페즈의 정면에 서면 방문자들에게는 두가지의 선택이 주어진다. 모로코 페즈의 골목길의 미로가 입구에서부터 시작되는 듯 하다. 두 가지의 선택 중 첫 번째는 1층으로 직접 이어지는 복도이고 두 번째는 지하 광장으로 향하는 경사로와 계단이다. 우리는 두 가지 선택 중 지하로 향하는 호기심을 뒤로 한 채 건물 1층으로 직접 들어가는 길을 선택했다.
1층으로 직접 진입하는 길을 선택하면, 수평적 접근을 통해 건물의 심장부로 바로 진입할 수 있다. 좁고 어두운 복도를 지나면 건물의 코어를 바로 마주할 수 있어 건물의 구조를 이해하는 과정이 된다. 반면, 지하 광장으로의 진입을 선택한다면, 방문자는 점진적으로 도시의 레벨에서 벗어나 더 아래로, 더 깊숙히 들어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치 땅속 깊은 곳의 비밀스러운 공간으로 초대받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지하 광장에 도달하면 완전히 도시로부터 독립된 새로운 세계에 들어온 듯한 경험을 선사한다.
이 두 진입 방식은 각각 다른 공간적 서사를 만들어 낸다. 1층으로의 진입은 '탐험과 이해'의 서사를 제공하고, 지하로의 진입은 '발견과 놀라움'의 서사를 가진다. 방문자들에게 어떤 경험을 원하는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진입의 자유를 선사함과 동시에 주민들에게 개방된 공간이라는 용도적 정체성을 드러낸다. 그리고 단일한 정답이 없는 모로코 페즈의 미로같은 특성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것으로 보인다.
1층에서 2층으로 : 압축과 해방
1층 진입부로 들어가는 길은 어둡고 좁다. 어두운 복도를 조심스럽게 지나가고 나면 밝은 빛이 새어 들어오는 계단실을 마주한다. 계단실은 구멍이 뚫린 블록으로 구성되어 외부의 자연광이 자연스럽게 들어온다. 이곳은 팀원 중 한 명은 "실내도 외부도 아닌 오묘한 공간"이라고 평가했다. 창이나 벽으로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고, 블록의 구멍들을 통해서 외부의 빛과 바람이 스며든다.
1층 코어를 둘러보는 중, 지하 광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창이 크게 뚫려 있었다. 1층에서 계단을 통해 위로 올라가면서도, 지하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이 시각적 연결은 페즈라는 건축물의 공간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마치 건물이 하나의 입체적인 광장처럼 작동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페즈의 화장실은 '젠더 프리' 화장실이다. 이는 페즈가 추구하는 포용적 공간의 철학을 보여주는 일부라고 생각한다. 성별이나 신체의 조건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편안하게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한 이런 디테일에서, 페즈가 공간을 통해 사회에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하는지 간접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메인 전시공간 : 복층의 개방
계단실을 통해 한층 올라오면 페즈의 메인 전시 공간으로 들어간다. 이곳은 작고 어둡던 1층과 다르게 매우 넓고 밝은 개방적인 공간이다. 이 공간은 복층으로 천장 슬라브가 제거되어 더욱 개방감을 준다. 윗층으로 올라가는 전시공간을 통해 외부에서 봤던 켄틸레버의 내부를 엿볼 수 있다. 전방의 통유리와 루버 시스템으로 외부 시선을 적절히 차단하면서도 수직 루버 사이로 들어오는 자연광이 전시공간을 더욱 밝게 만들어준다. 캔틸레버 매스의 전면 루버시스템이 마치 모로코 전통 건축물의 마슈라비야를 닮았다.
이 공간에서부터 페즈의 동선의 다양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전시공간에서 바로 위층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올라간 이후에도 계단실을 이용하거나, 전시공간에서 한 번 더 올라갈 수도 있다. 심지어 테라스로 나갈 수 있는 출구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단일한 정답이 없는 탐험으로 페즈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어 준다. 팀원은 "보통의 건물이 아닌 도시의 골목길을 지나는 느낌"이라고 평했다. 이 공간은 고정된 동선이나 정해진 관람 순서가 없어서 각자의 리듬대로 공간을 탐험할 수 있다. 자유로움 그 자체를 담은 공간으로 구조체가 솔직하게 드러나고, 공간의 경계가 모호하며, 동선의 선택권이 방문자에게 온전히 열려있다. 이러한 것들이 페즈만의 공간적 정체성을 만들어 낸다.
최상층 : 명상과 조망
전시공간에서 자유로운 탐험을 거쳐 최상층에 도달하면, 페즈에서 가장 고요하고 차분한 공간으로 이어진다. 수정원 테라스와 그 안쪽에 위치한 명상실은 "호수 위의 정자" 같은 느낌을 만든다. 이 공간은 모로코의 이국적인 분위기와는 다르게 한국적 정취가 느껴지면서도 동양적 명상성을 자아낸다.
최상층에 오르면서 페즈가 추구하는 문화적 혼성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남동이라는 특색있고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사이트에 걸맞게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조화를 추구한다. 명상실은 웅장하지도, 비좁지도 않지만 타원형의 공간으로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준다.
빛과 재료의 대화
페즈는 채광에 유리한 조건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방문하기 전에는 자연광이 주는 인상적인 효과는 부족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직접 방문해보니 우리의 생각은 완전히 틀렸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페즈는 외부의 빛을 단순히 창으로 받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대부분 루버 혹은 벽돌블럭 사이로 빛이 새어 들어왔다.
루버를 통해 가지런히 들어온 빛들은 계단실을 채우고 벽돌에 반사되어 특이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은은한 간접등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공간을 따뜻하게 채워줬다.
지하 광장 : 도시 속 은밀한 거실
건물의 상층부를 모두 탐험하고 나서 다시 지하로 내려왔다. 이 지하 공간은 페즈에서 가장 독특한 공간이다. 지상의 소음과 시선에서는 벗어나 있지만 폐쇄적이지는 않다. 그리고 한남동의 주민들을 끌어 모으는 한남동의 거실같은 느낌이다. 벽으로 구분되지 않은 외부 공간임에도 실내에 들어온 듯한 열린 공간은 기존의 공간들과는 다른 카테고리에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사람들의 이야기
페즈는 다양한 프로그램들을 포함하고 있어 다양한 목적의 사람들이 방문하고 있다. 누군가는 명상을 위해, 누군가는 바를 위해, 누군가는 재즈 공연을 관람하기 위해 방문한다. 각기 다른 목적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 느긋함과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한남동의 긴장감이나 경쟁적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사람들의 기운이 이 공간의 마지막 특징이다. 페즈의 복잡한 동산과 다양한 공간이 방문자들의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둘러보게 만든다. 페즈는 단순히 아름다운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넘어, 도시의 생활 리듬을 조율한다. 소비의 중심지인 한남동에서 소비 하지 않고 경험하는 공간으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더 오래 머물고, 더 천천히 움직이며, 더 깊이 사색하게 되는 이 변화야말로, 건축이 가진 가장 강력한 힘 중 하나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