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그룹 본사의 공기는 차가웠다. 1층 로비의 높은 층고 만큼이나 사람들의 콧대도 높았다. 민준은 가슴에 달린 ‘인턴 김민준’이라는 사원증을 꽉 쥐었다.
“자, 다들 주목.”
마케팅 1팀의 실세, 이 팀장이 박수를 치며 인턴들을 불러 모았다. 그의 뒤에는 수백 장은 되어 보이는 서류 뭉치와 외장 하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번 한명바이오 신제품 런칭 앞두고 타사 제품 데이터 비교 분석 들어간다. 여기 있는 파일, 최근 5년간 국내외 모든 경쟁사 매출 지표랑 광고 집행비, 그리고 고객 피드백 키워드 로우 데이터(Raw Data)야.”
인턴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로우 데이터라는 말은 곧 ‘정리 안 된 쓰레기 더미’라는 뜻과 일맥상통했다.
“이거 오늘 퇴근 전까지 계열사별, 분기별로 분류해서 효율성 지표 뽑아와. 엑셀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시각화까지 마친 사람부터 퇴근한다. 못 하면? 뭐, 내일 아침 보고는 내 담당이니까 밤새면 되겠지.”
이 팀장이 자리를 뜨자마자 동기들의 한숨이 터져 나왔다. 특히 해외파 출신이자 잘생긴 외모로 벌써부터 주목받던 ‘주원’이 민준의 책상을 툭 치며 지나갔다.
“야, 민준아. 너 엑셀은 할 줄 아냐? 이거 함수 좀 쓸 줄 알아야 할 텐데. 모르면 형한테 물어봐. 아, 근데 나도 내 거 하느라 바빠서 알려줄 시간은 없겠네? 크크.”
주원의 비아냥에 민준은 대꾸 대신 모니터를 켰다. 파일을 열자마자 비명이 나올 뻔했다. 시트만 100개가 넘고, 행(Row)은 수십만 개에 달했다. 데이터는 중구난방이었고, 숫자와 텍스트가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야. 인턴 길들이기인가?’
그때였다. 민준의 망막 위에 익숙한 푸른색 팝업창이 떠올랐다.
[ 업무스킬 2 ‘문서 작업 스킬’ 추천 ]
[ 튜터리얼 2-1 ‘엑셀’을 로딩하시겠습니까? ]
‘기다리고 있었다고!’
민준이 속으로 외치는 순간, 머릿속이 차갑게 식으며 수만 개의 데이터가 격자무늬를 그리며 재배치되기 시작했다. 복잡한 수식들이 마치 구구단처럼 당연하게 느껴졌다.
[ 엑셀 스킬 활성화: 대량 데이터를 즉시 구조화합니다. ]
민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Alt + A + C, Ctrl + Shift + L, Alt + N + V… 마우스는 거들 뿐, 오직 단축키만으로 이루어지는 화려한 퍼포먼스였다. 옆자리에서 낑낑대며 VLOOKUP 수식을 입력하던 주원이 타자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야, 너 뭐 하냐? 타자 연습해?”
민준은 대답할 틈도 없었다. 뇌가 시키는 대로 손가락이 반응했다. 엉망진창이던 데이터에서 불필요한 공백이 사라지고, 깨진 텍스트가 정렬됐다. 복잡한 다중 조건 함수가 0.1초 만에 완성되어 결과값을 뱉어냈다.
‘자, 여기서 피벗 테이블 돌리고, 슬라이서 삽입해서 보고서 형태로 만들면….’
불과 30분 만의 일이었다. 남들이 데이터 필터링도 채 끝내지 못했을 시간에, 민준의 화면에는 화려한 대시보드와 깔끔한 그래프가 완성되어 있었다.
[ 추가 효과 발동: ‘시각화 최적화’ - 보고 받는 이의 망막에 꽂히는 그래프 생성 ]
민준은 유유히 자리에서 일어나 이 팀장의 자리로 향했다.
“팀장님, 다 됐습니다.”
사무실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이 팀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려다 멈칫했다.
“뭐? 벌써? 야, 김민준 인턴. 내가 대충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한번 확인해 주십시오.”
이 팀장이 반신반의하며 민준이 보낸 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그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 이게 뭐야? 필터 하나로 전 계열사 매출 추이가 실시간으로 변하네? 아니, 이 함수는 또 뭐야? 엑셀에 이런 기능이 있었나?”
이 팀장의 목소리가 커지자 다른 팀원들도 민준의 모니터 주위로 몰려들었다.
“와, 대박. 이거 인턴이 만든 거 맞아요? 거의 외주 업체에 맡긴 수준인데?” “함수 짠 거 봐. 예술이다, 진짜.”
찬사가 쏟아졌다. 주원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채 자신의 모니터만 노려보았다. 민준은 그런 주원을 향해 살짝 미소 지으며 속삭였다.
“주원 씨, 아까 형한테 물어보라고 했죠? 잘 몰라서 저한테 물어보겠다는 얘기였던 거죠? 엑셀 하다가 막히는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세요.”
사이다 원샷을 한 듯한 청량감이 민준의 온몸을 감쌌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팀원들의 소란을 뚫고, 홍보팀 문이 열리며 한 여성이 걸어 들어왔다.
민준의 시야가 딱 멈췄다. 익숙한 눈매, 차분한 걸음걸이.
‘……설마.’
심장이 한 박자 늦게 뛰기 시작했다.
“오늘부터 홍보팀에서 근무하게 된 경력사원 박하영입니다.”
화재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주고, 이 거대한 음모의 실마리를 쥐고 있는 여기자, 박하영이었다. 그녀가 왜 여기에?
민준과 하영의 시선이 공중에서 마주쳤다. 하영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 To be continu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