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의실 입구에 서서 민준은 마른침을 삼켰다. 육중한 마호가니 문 너머로 들려오는 공기는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한명그룹의 핵심 라인, 진현우 상무. 그는 부회장의 오른팔이자 ‘성과 지상주의’의 화신이었다. 그런 그가 주관하는 독일 ‘바이에른 테크’와의 합작 회의는 이번 하반기 마케팅팀의 사활이 걸린 중대사였다.
“김민준 인턴, 정신 안 차려?”
뒤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목소리. 마케팅 1팀의 선배 도윤이었다. 그는 민준의 손에 들린 자료 뭉치를 낚아채듯 가져가며 비아냥거렸다.
“아까 엑셀 좀 돌렸다고 어깨에 힘 들어간 모양인데, 여긴 실전이야. 까딱해서 수치 하나라도 틀리면 너만 잘리는 게 아니라 팀 전체가 박살 난다고. 알겠어?”
민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아까 습득한 **[자료 조사 스킬]**이 가동되어 바이에른 테크의 최근 5년간 재무제표와 한스 이사의 성향을 리포트처럼 띄워주고 있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안에는 금발의 푸른 눈을 가진 독일인 3명과 진 상무, 그리고 팀장급 간부들이 포진해 있었다. 진 상무는 초조한 듯 연신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있었다.
“통역사 아직이야? 사고가 났으면 대타를 빨리 구하라고 했잖아!”
비서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진땀을 뺐다. 고속도로 정체로 통역사가 도착하려면 최소 30분은 더 걸린다는 보고였다. 독일 측 대표인 한스 이사의 표정은 이미 썩은 사과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Das ist inakzeptabel. Wir sind nicht hierhergekommen, um unsere Zeit zu verschwenden. (이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시간 낭비하러 온 게 아니란 말입니다.)”
한스가 거칠게 서류 가방을 챙기며 일어서려 했다. 진 상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영어로 다급하게 “Wait, please! Just 10 minutes!”를 연발했지만, 자존심 강한 한스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민준의 시야에 반투명한 푸른색 알림창이 강렬하게 점멸했다.
[ 돌발 리스크 감지: 협상 결렬 위기 99% ]
[ 업무스킬 1 ‘스피치스킬’ 확장 루트 발견 ]
[ 튜터리얼 1-3 ‘외국어 말하기(독일어 비즈니스)’를 활성화하시겠습니까? ]
‘이거다.’
민준은 주저하지 않았다. ‘수락’을 누르는 순간, 뇌 중추 어딘가에서 강력한 전기 자극이 일어났다. 수만 권의 독일어 사전과 비즈니스 회화 예문, 심지어 독일 남부 지역의 미묘한 억양까지 데이터화되어 민준의 혀 끝에 내려앉았다.
민준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Bitte warten Sie einen Moment, Herr Hans.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한스 씨.)”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민준에게 꽂혔다. 진 상무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야, 너 뭐야? 지금 뭐 하는 거야!”
진 상무의 호통도 민준의 귓가에는 들리지 않았다. 민준은 한스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을 이어갔다.
“Ich verstehe Ihren Ärger. Zeit ist für Sie wertvoller als Gold. Aber wäre es nicht ein noch größerer Zeitverlust, dieses Projekt ohne eine letzte Prüfung unserer neuen Marktdaten abzubrechen? (당신의 화를 이해합니다. 시간은 금보다 귀하니까요. 하지만 우리의 새로운 시장 데이터를 마지막으로 확인하지도 않고 이 프로젝트를 중단하는 것이야말로 더 큰 시간 낭비가 아니겠습니까?)”
한스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는 놀란 표정으로 민준을 쳐다보았다. 단순히 언어를 구사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독일인들이 선호하는 직설적이면서도 논리적인 화법, 그리고 정중한 경어(Sie)의 완벽한 사용이었다.
“Sie sprechen Deutsch? Ein Praktikant? (독일어를 하나요? 인턴이?)”
“Ich habe mich intensiv auf dieses Treffen vorbereitet, weil ich an den Erfolg unserer Partnerschaft glaube. (우리 파트너십의 성공을 믿기 때문에 이 만남을 위해 집중적으로 준비했습니다.)”
민준은 여유롭게 미소 지으며 회의 탁자에 놓인 태블릿을 집어 들었다. 이전에 엑셀로 정리했던 그 화려한 지표들이 화면에 떴다.
“보십시오. 우리가 분석한 데이터에 따르면, 독일 시장에서의 초기 점유율 확보는….”
민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독일어는 마치 음악 같았다. 그는 진 상무가 준비한 허술한 기획안을 실시간으로 수정하며, 독일측이 가장 가려워하는 부분(비용 절감과 품질 유지의 균형)을 정확히 긁어주었다.
[ 스피치스킬 1-1 ‘논리적인 말하기’ 연계 가동 ]
[ 효과: 상대방의 심리적 저항선을 40% 감소시켰습니다. ]
진 상무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민준을 바라보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동기 주원은 거의 실신할 지경이었다.
“와… 미친 거 아냐? 김민준 전공 체육 아니었어? 독일어는 언제 배운 거야?”
주원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회의실 안은 어느새 민준의 독무대가 되었다. 한스는 처음의 고압적인 자세를 버리고 테이블 쪽으로 몸을 바짝 붙였다.
“Sehr beeindruckend. Besonders Ihre Analyse zum Logistikzentrum.
(매우 인상적이군요. 특히 물류 센터에 대한 당신의 분석 말입니다.)”
1시간 후. 지각했던 통역사가 땀을 뻘뻘 흘리며 회의실 문을 열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어 있었다. 한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민준의 손을 꽉 잡았다.
“Herr Kim, Sie sind der beste Botschafter, den dieses Unternehmen haben kann.
(김 군, 당신은 이 회사가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외교관이군요.)”
한스 일행이 떠나고 난 회의실. 정적이 찾아왔다.
진 상무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민준에게 다가왔다. 방금 전까지 무시하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너… 김민준이라고 했지? 독일어 어디서 배웠어? 유학 갔다 왔나?” “아닙니다. 그냥 독학으로 조금 했습니다.” “독학? 독학으로 바이에른 테크 임원을 설득해? 너, 오늘 점심부터 내 밑으로 와서 회의록 정리하고 보고서 보조해.”
칭찬인 듯했지만, 사실상 민준을 자신의 ‘전용 도구’로 쓰겠다는 선언이었다. 민준은 속으로 혀를 찼다.
‘독학 같은 소리 하네. 이 능력을 얻으려고 죽을 고비를 넘겼는데.’
회의실을 정리하고 나오자, 복도 끝 정수기 앞에서 누군가 민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홍보팀으로 위장 잠입한 박하영 기자였다. 그녀는 종이컵을 든 채 벽에 기대어 민준을 빤히 쳐다봤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낮게 읊조렸다.
“독일어라니. 민준 씨, 당신은 정말 볼 때 마다 다른 매력을 보여주네요.”
“글쎄요. 저도 제 한계가 궁금해지네요. 근데 기자님, 여기 보는 눈 많아요. 조심하시죠.”
하영이 다가와 민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상큼한 샴푸 향기와 달리 그녀의 목소리는 서늘했다.
“방금 진 상무가 당신 찜한 거 봤어요. 그 사람, 부회장의 ‘더러운 일’을 처리하는 사냥개예요. 너무 눈에 띄지 마요. 그러다 타 죽는 수가 있으니까.”
하영은 경고를 남기고 차갑게 돌아섰다. 민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타 죽는다라….’
그때, 민준의 시야에 새로운 팝업창이 떠올랐다. 이번에는 지금까지와는 격이 다른 황금빛 테두리였다.
[ 긴급 퀘스트 발생: ‘진 상무의 이중장부’ 탐색 ]
[ 보상: 업무스킬 2 ‘파워포인트’ 및 ‘워드’ 숙련도 대폭 상승 ]
[ 실패 시 리스크: 인턴 해고 및 실험 데이터 강제 회수 ]
민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타 죽긴 왜 타 죽어. 내가 그 불길을 타고 승천할 건데.”
흔하디흔한 이름 김민준. 하지만 이제 그 이름은 한명그룹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위험한 소문을 만들어낼 준비를 마쳤다.
판은 이미 깔렸다. 이제는 정말로, 압살할 시간이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