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화: 워드의 신, 행간의 진실을 낚다

제12화: 워드의 신, 행간의 진실을 낚다


진 상무가 주관한 전략회의가 끝나고 난 뒤, 마케팅 1팀의 공기는 흡사 폭풍 전야 같았다.

표면적으로는 ‘인턴의 화려한 PPT 덕분에 바이에른 테크와의 협상이 탄력을 받았다’는 평이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는 눈치 빠른 이들은 알고 있었다. 진 상무의 안색이 썩은 동태 눈깔보다 더 탁해져 있었다는 것을.

“야, 김민준.”

자리에 앉자마자 도윤이 다가와 책상을 툭 쳤다. 평소보다 더 날이 선 목소리였다.

“너 아까 그 애니메이션 말이야. 그거 일부러 그랬지? 상무님 표정 못 봤어? 너 아주 제대로 찍힌 것 같다?”

민준은 모니터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일부러라니요. 저는 그저 상무님이 강조하신 ‘데이터의 투명성’을 시각적으로 구현했을 뿐입니다. 칭찬해 주실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요?”

“이게 진짜…… 정신 못 차리네. 야, 상무님이 너 지금 당장 집무실로 오란다. 유언이라도 남겨둘 거 있으면 지금 해.”

도윤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주위 인턴들의 시선에도 동정과 호기심이 섞였다. 하지만 민준은 태연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원증 주머니에 손을 넣자, 시스템의 기계음이 귓가를 스쳤다.


[ 돌발 리스크 감지: ‘진 상무의 분노’ 레벨 4 ]

[ 추천 행동: ‘증거 위주의 정면 돌파’ ]

[ 보상으로 획득한 ‘워드 마스터’ 스킬이 활성 대기 중입니다. ]


‘흥, 화내면 어쩔 거야. 지가 꿀리는 게 있는데.’


상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묵직한 가죽 냄새와 함께 진 상무의 살기가 훅 끼쳐왔다. 진 상무는 창밖을 보고 서 있다가 민준이 들어오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의 손에는 민준이 만든 PPT 출력물이 쥐여 있었다.

“김민준.”

“네, 상무님.”

“너, 내가 만만해 보이지? 인턴 나부랭이가 독일어 좀 하고 엑셀 좀 돌린다고 하니까 세상이 다 네 발 밑에 있는 것 같아?”

진 상무가 서류 뭉치를 책상 위로 내던졌다.

“아까 그 그래프. 300% 급증한 마케팅 비용 부분을 왜 그렇게 강조했지? 내가 지시한 내용에는 분명 ‘전반적인 성장세’를 보여달라고 했을 텐데?”

민준은 뻔뻔할 정도로 침착하게 대답했다.

“상무님, 데이터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이 가장 눈에 띄는 성과—혹은 이상 징후—였기에 전략적으로 배치한 것입니다. 만약 그 수치에 문제가 있다면 제가 수정하겠습니다만, 제가 정리한 원본 데이터와 상무님이 주신 로우 데이터는 완벽히 일치했습니다.”

진 상무의 눈밑이 파르르 떨렸다. ‘로우 데이터와 일치한다’는 말은 곧 ‘네가 저지른 비리를 내가 다 보고 있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으니까.


“좋아. 그럼 네 그 뛰어난 능력을 다시 한번 증명해 봐.”

진 상무가 책상 밑에서 낡은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이번에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는 ‘한명 미래 비전 선포식’용 공식 그룹50년사(史) 초안이다. 홍보팀이랑 기획팀에서 만든 건데, 영 마음에 안 들어. 네가 이걸 워드로 다시 정리해 봐. 단순한 오타 수정이 아냐. 문장의 논리 구조를 완벽하게 맞추고, 행간의 의미까지 살려내란 말이야. 내일 아침까지.”

민준은 서류철을 받아들었다. 두께가 족히 백 페이지는 넘어 보였다.

“못 해내면, 아까 회의실에서의 무례함은 ‘고의적 도발’로 간주하고 인사팀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하겠다. 알겠나?”


상무실을 나온 민준은 복도 끝 정수기에서 박하영 기자와 마주쳤다. 그녀는 주위를 살피더니 낮게 속삭였다.

“진 상무가 독이 바짝 올랐던데, 뭘 준 거예요?”

“그룹50년사(史) 정리요. 아마 밤새워도 못 끝낼 양을 주면서 꼬투리 잡으려는 모양입니다.”

하영의 미간이 좁아졌다.

“그거 조심해요. 그 사사 안에는 한명그룹 초기 자금 조성 과정이랑 계열사 분리 내역이 다 들어있을 거예요. 진 상무가 그걸 당신한테 준 건, 못 끝내게 해서 자르려는 목적도 있겠지만…… 어쩌면 당신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테스트하려는 걸 수도 있어요.”

“걱정 마세요. 저는 그냥 ‘글자’만 맞출 거니까요.”

민준은 여유롭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하지만 속으론 긴장감이 차올랐다. 자리에 앉아 워드 프로세서를 켜는 순간, 푸른색 팝업창이 눈앞을 가득 채웠다.


[ 업무스킬 2-3 ‘워드’ 가동 ]

[ 스킬 효과: 문서 가독성 및 논리 완성도 극대화 ]

[ ‘행간의 진실 탐색’ 서브 옵션을 활성화하시겠습니까? (소모 뇌 용량 15%) ]


‘활성화해. 이왕 하는 거, 탈탈 털어줘야지.’

타닥, 타다닥—!

민준의 손가락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보통 사람들이 워드 작업을 할 때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은 ‘폰트’나 ‘줄 간격’이다. 하지만 민준의 뇌는 차원이 달랐다.

수백 페이지의 텍스트가 뇌 속에서 거대한 네트워크 구조로 재배치되었다. 1장 3절의 숫자가 5장 2절의 내용과 모순된다는 사실, 특정 인물의 이름이 빠져야 할 자리에 들어가 있다는 사실이 실시간으로 필터링 되었다.


[ 스킬 발동: ‘논리의 칼날’ ]

[ 효과: 비문, 중문, 논리적 오류를 즉시 삭제하고 가장 설득력 있는 문장으로 재구성합니다. ]


화면 위로 글자들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민준의 눈동자는 데이터를 스캔하는 기계처럼 좌우로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였다.

“아직도 안 갔네요?”

어느새 다가온 이서연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짐을 챙긴 채 민준의 모니터를 빤히 바라보았다. 민준은 어제 그녀가 숫자의 ‘부자연스러움’을 잡아냈던 것을 떠올리며 슬쩍 물었다.

“서연 씨, 이 문장 어때요? ‘그룹의 성장은 투명한 경영 세습을 통해 완성되었다’라는 문구인데.”

서연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피식 웃었다.

“‘세습’이라는 단어 뒤에 ‘완성’이라는 단어를 붙인 건 너무 노골적이네요. 마치 ‘우리는 법보다 핏줄이 우선이다’라고 자수하는 꼴이잖아요. 차라리 ‘책임 경영의 영속성’이라고 고치는 게 윗분들 입맛엔 더 맞을 텐데.”

민준은 속으로 감탄했다. 시스템이 추천한 수정안과 정확히 일치했다.

“서연 씨, 혹시 국문과예요? 아니면 탐정인가?”

“그냥…… 거짓말이 섞인 글은 읽기가 힘들어서요. 숨이 막히거든요. 그 그룹50년사(史), 너무 깊게 파지 마요. 글자 사이에 시체들이 너무 많으니까.”

서연은 가벼운 손인사를 건네고 멀어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민준은 생각했다. 이서연이라는 여자, 시스템이 알려주지 않는 무언가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다음 날 아침.

민준은 눈 밑이 약간 해진 채—하지만 시스템 보상인 ‘강철의 안구’ 덕분에 눈은 충혈되지 않았다—진 상무의 방으로 들어갔다. 책상 위에는 완벽하게 제본된 그룹50년사(史) 수정본이 놓였다.

진 상무는 비웃음을 흘리며 첫 페이지를 넘겼다.

“어디 보자, 인턴의 글 솜씨가…….”

하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진 상무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글이 매끄러워진 수준이 아니었다. 한명그룹의 50년 역사가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완벽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홍보팀의 수십 명 엘리트가 매달려도 해결하지 못했던 논리적 허점들이 민준의 손을 거쳐 ‘신의 한 수’ 같은 문장들로 승화되어 있었다.

특히, 진 상무가 교묘하게 숨겨두었던 ‘자금 세탁 관련 계열사’의 이름들이 들어간 부분은, 문맥상 너무나 자연스럽게 ‘효율적인 자산 관리의 표본’으로 둔갑해 있었다.

진 상무가 지우고 싶었던 치부는 덮였고, 강조하고 싶었던 공적은 빛이 났다. 하지만 민준은 알고 있었다. 이 완벽한 문장들 사이사이에, 나중에 법정에서 증거로 쓰일 수 있는 ‘진실의 파편’들을 주석처럼 숨겨두었다는 것을.


[ 워드 마스터 특수 효과: ‘트로이의 목마’ 삽입 완료 ]

[ 효과: 문서의 겉모양은 완벽하나, 특정 키워드 조합 시 숨겨진 원문이 드러남 ]


“……이걸 혼자 다 했다고?”

진 상무의 목소리가 떨렸다.

“네. 상무님이 강조하신 ‘행간의 의미’를 살리는 데 집중했습니다. 마음에 드십니까?”

진 상무는 한참 동안 민준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아니, 훌륭해. 인턴 수준을 넘었어.”

“감사합니다. 그럼 이제 인사팀에 보내실 추천서도 이 정도 수준으로 작성해 주시는 건가요?”

민준의 능청스러운 요구에 진 상무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사냥개를 길들이려다 호랑이 새끼를 데려온 꼴이라는 걸 직감한 듯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민준은 사원증을 만지작거렸다.


[ 퀘스트 완료: ‘그룹50년사(史)의 재구성’ ]

[ 보상: ‘내부 문서 연결 분석’ 스킬 해금 대기 ]

[ 레벨 업! 인턴 사원 김민준의 영향력이 사내 상위 5%에 진입했습니다. ]


민준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걸렸다.

“자, 이제 다음은 누구 차례지?”

흔하디흔한 이름 김민준. 하지만 이제 한명그룹에서 그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이름 뒤에 숨겨진 거대한 칼날이 본격적으로 춤을 출 준비를 마쳤다.


- to be continued

이전 11화제11화: 숫자의 덫, 그리고 낯선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