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그룹 본사 15층 마케팅 1팀의 분위기는 묘하게 바뀌어 있었다. ‘흔하디흔한 이름’ 김민준은 이제 팀 내에서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되는 폭탄’ 같은 존재가 됐다.
민준은 자리에 앉아 어제 보상으로 해금된 스킬창을 띄웠다.
[ 업무스킬 4-3 ‘숨겨진 정보 탐색’ 활성화 ]
[ 효과: 삭제된 기록, 암호화된 데이터, 문맥 속에 숨겨진 의도를 추출합니다. ]
‘진 상무가 준 50년사 데이터… 그 안에 트로이의 목마를 심긴 했지만, 아직 내가 모르는 ‘진짜’가 더 있을 거야.’
그때, 민준의 책상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고개를 들자 낯선 얼굴 둘이 서 있었다. 한 명은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인상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운동선수처럼 체격이 건장하고 인상이 서글서글한 사내였다.
“저기, 김민준 씨 맞죠? 아까 탕비실에서 소문 들었습니다. 워드 작업으로 상무님 멘탈을 가루로 만드셨다면서요?”
안경을 쓴 사내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저는 IT 지원팀 김지환 대리라고 합니다. 이쪽은 보안팀 김무열 대리고요. 사실 저희가 이번에 ‘50년사’ 디지털 아카이빙 작업 지원 나갔다가 도저히 안 풀리는 암호화 파일이 있어서 고생 중이었거든요.”
민준은 직감했다. 이들이 들고 온 것이 진 상무가 필사적으로 숨기려던 그 ‘시체’들의 열쇠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무열이 주위를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상무님이 저희 쪽에 폐기 요청한 파일들인데, 지환이가 슬쩍 보니까 구조가 너무 이상하더라고요. 근데 우리 선에서는 도저히 분석이 안 돼서요. 민준 씨가 독일어에 엑셀에 워드까지 마스터라는 소문 듣고 염치 불구하고 찾아왔습니다.”
민준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빌런들이 득실거리는 이 소굴에서, 전문 지식을 가진 조력자만큼 든든한 건 없었다.
“한번 보죠. 제가 그런 ‘이상한 구조’ 파헤치는 건 좀 자신 있거든요.”
민준이 지환이 건넨 USB를 꽂는 순간, 망막 위로 강렬한 팝업창이 떴다.
[ 경고: 고도의 암호화 레이어 발견 ]
[ ‘숨겨진 정보 탐색’ 스킬을 120% 가동합니다. ]
[ 보조 연산 필요: IT 지식 데이터베이스 동기화 중… ]
민준의 눈앞에 수만 개의 코드 줄이 흘러갔다. 옆에서 지켜보던 지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아니, 민준 씨? 지금 코드를 눈으로 읽는 거예요? 디버깅 툴도 안 쓰고?”
“아, 예. 그냥 패턴이 좀 보여서요. 지환 씨, 여기 7번 노드랑 12번 노드 연결이 끊겨 있는데, 이거 강제로 우회시킨 흔적 맞죠?”
지환은 안경을 치켜올리며 모니터에 달라붙었다.
“맞아요! 역시! 이게 바로 진 상무가 비자금 세탁할 때 쓴 유령 계열사 서버 IP랑 연결되는 고리거든요. 근데 이걸 어떻게…….”
옆에 있던 무열이 듬직하게 민준의 어깨를 툭 쳤다.
“와, 민준 씨 진짜 대박이네. 나중에 우리 보안팀으로 와요. 이런 실력이면 인턴이 아니라 팀장급인데? 걱정 마요. 이 자료 분석하는 동안 상무실 근처 접근하는 놈들은 내가 다 차단할 테니까.”
민준은 든든한 우군을 얻은 기분이었다. 지환의 기술력과 무열의 물리적 방어력. 이제 남은 건 이 데이터 끝에 숨겨진 ‘결정적 한 방’이었다.
한참을 몰입하던 중,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다들 여기서 뭐 하시는 거죠?”
이서연이었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서류 뭉치를 안고 있었다. 지환과 무열은 움찔하며 자리를 피하려 했지만, 민준은 서연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서연 씨가 말한 ‘글자 사이의 시체’들, 지환 씨랑 무열 씨가 찾아온 것 같아요.”
서연의 눈동자가 아주 미세하게 커졌다. 그녀는 천천히 다가와 모니터에 뜬 복잡한 계보도를 훑었다.
“……생각보다 더 잔인하네요. 이건 단순한 비자금이 아니에요. 한명그룹 오너 일가의 승계 구도를 뒤집으려고 진 상무가 부회장 몰래 준비한 ‘반란의 지도’예요.”
민준은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단순히 돈의 흐름인 줄 알았는데, 이건 회사를 통째로 삼키려는 음모의 설계도였다.
그때, 민준의 시야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 돌발 퀘스트: ‘설계도의 주인’을 확인하라 ]
[ 단서: 파일 생성 날짜와 부회장의 해외 출장 일정의 상관관계 ]
[ 보상: 업무스킬 3-2 ‘리스크 예측’ 해금 ]
민준은 빠르게 키보드를 두드렸다. 지환과 무열도 민준의 지시에 따라 각자의 영역에서 데이터를 뽑아냈다. 지환은 서버 로그를, 무열은 당시 VIP실 출입 기록을 대조했다.
“찾았습니다.”
민준이 화면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진 상무가 이 파일을 최종 수정한 날, 부회장은 독일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부회장의 공식 일정은 ‘바이에른 테크’와의 비공개 협약이었죠. 하지만 여기 숨겨진 로그를 보면, 진 상무는 부회장 몰래 다른 유령 회사와 이면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지환이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거 터지면 한명그룹 뒤집어지겠는데요?”
“뒤집어지는 정도로 안 끝날 겁니다.”
서연이 낮게 읊조렸다. 그녀의 시선은 민준이 찾아낸 데이터 너머, 더 높은 곳을 향해 있었다.
민준은 화면을 끄며 지환과 무열을 바라봤다.
“지환 씨, 무열 씨. 위험할 수도 있는데 계속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무열이 주먹을 불끈 쥐며 웃었다.
“민준 씨, 우리 보안팀은 원래 정의로운 놈 편이에요. 진 상무 그 양반, 평소에 우리 부하들 무시하는 거 꼴 보기 싫었는데 잘됐네.”
지환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터는 거짓말 안 하니까요. 끝까지 가보죠.”
민준은 두 조력자의 든든한 지지를 확인하며 사원증을 꽉 쥐었다. 이제 진 상무는 자신이 키운 인턴이 어떤 괴물이 되어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것이다.
[ 퀘스트 완료: ‘반란의 지도’ 확보 ]
[ 보상 지급: 전략 수립 스킬 3-2 ‘리스크 예측’ 활성화 ]
민준의 뇌가 다시 한번 차갑게 식으며, 다음 수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진 상무의 파멸은 이제 시간문제였다.
“자, 이제 이 지도를 들고 누구를 찾아갈까요, 서연 씨?”
민준의 물음에 서연이 아주 희미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미소 지었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