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화: 폭풍 전야, 리스크를 읽는 눈
진 상무의 비리 파일을 손에 넣은 다음 날, 한명그룹 본사 1층 로비는 평소보다 소란스러웠다. 대형 스크린에는 '한명그룹 미래 비전 선포식 D-7'이라는 문구가 번쩍이고 있었다.
민준이 엘리베이터에 오르려 할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 중심에는 빳빳하게 풀을 먹인 수트를 입고, 주변의 공기를 얼려버릴 듯한 차가운 눈빛을 가진 중년 남자가 있었다.
"저분이 전략기획본부장 백명석 전무야. 진 상무와는 차기 부사장 자리를 두고 다투는 숙적이지."
언제 나타났는지 김지환 대리가 민준의 옆에서 속삭였다. 민준은 백명석 전무의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 업무스킬 3-2 ‘리스크 예측’ 가동 ]
[ 분석 대상: 백명석 전무 및 주변 환경 ]
[ 예측 결과: 72시간 이내에 진 상무와의 전면전 발생 확률 89% ]
[ 경고: 민준 씨가 확보한 ‘지도’가 전쟁의 도화선이 될 위험 있음 ]
민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시스템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조용한 사무실 뒤편에서 얼마나 거대한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지.
사무실에 들어서자, 평소보다 더욱 까칠해진 진 상무가 민준을 불렀다.
"김민준, 너 어제 지환이랑 무열이 만났지? 보안팀이랑 IT 애들이랑 무슨 작당 모의를 한 거야?"
진 상무의 눈에 의심의 불꽃이 튀었다. 역시 김지환과 김무열이 파일을 빼돌린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민준은 미리 준비한 듯 태연하게 대답했다.
"작당 모의라니요. 어제 워드 작업 중에 히스토리 북 데이터 백업에 문제가 생겨서 도움 좀 받았습니다. 보안팀 무열 대리님은 제가 실수로 보안 구역 로그를 건드리는 바람에 경고차 오신 거고요."
"……그래?"
진 상무는 미심쩍은 듯 눈을 가늘게 떴지만,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옆에 서 있던 한 젊은 사내를 소개했다.
"이쪽은 이번 선포식의 메인 기획을 맡은 선호윤 대리다. 실력 하나는 확실한 놈이지. 호윤아, 이놈이 내가 말한 그 ‘독일어 괴물’이다. 이번 행사 외빈 의전 시나리오 검토할 때 이놈 좀 써먹어."
선호윤 대리는 날카로운 인상의 소유자였지만, 민준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서 묘한 신뢰감이 느껴졌다.
"선호윤입니다. 잘 부탁합니다, 김민준 씨. 상무님께 얘기 많이 들었습니다."
진 상무가 자리를 비우자, 선호윤은 민준에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서류 한 장을 건넸다.
"민준 씨, 의전 시나리오라고 하셨지만 사실 이건 ‘함정’입니다. 백명석 전무 쪽 인사들이 대거 참석하는 세션에 민준 씨를 배치해서, 실수를 유발하게 만들 계획이에요. 진 상무님은 민준 씨를 방패막이로 쓰고 버릴 생각입니다."
민준은 선호윤의 눈을 빤히 쳐다봤다.
"호윤 대리님은 왜 저한테 이런 걸 알려주시죠? 상무님 사람이시잖아요."
호윤은 쓰게 웃었다.
"상무님 사람? 아니요. 전 그저 ‘잘 만든 기획’이 망가지는 걸 싫어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진 상무님이 하려는 짓은 기획이 아니라 도박이거든요. 전 도박엔 배팅 안 합니다."
지환, 무열에 이어 이번엔 기획통인 선호윤까지. 민준의 주변으로 실무급 조력자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민준은 호윤이 준 시나리오를 시스템으로 스캔했다.
[ 리스크 예측 업데이트 ]
[ 시나리오 분석: 의전 중 백 전무의 질문에 오답 유도 -> 민준의 자격 박탈 -> 진 상무의 꼬리 자르기 ]
[ 최적의 대응 루트 생성 중… ]
‘좋아, 함정을 파놨다면 그 구덩이에 누가 빠질지 정하는 건 내 몫이지.’
민준은 다시 한번 뇌의 연산 장치를 풀가동했다. 그는 호윤에게 시나리오의 수정을 제안했다.
"호윤 대리님, 이 시나리오… 제가 조금만 비틀어봐도 될까요? 백 전무님이 질문을 하기도 전에, 대답할 가치조차 없게 만드는 완벽한 보고서를 먼저 띄워버리는 겁니다."
호윤의 눈이 반짝였다.
"그게 가능합니까? 백 전무는 한명그룹에서 가장 까다로운 데이터광으로 유명한데."
"저에겐 지환 씨의 데이터와 무열 씨의 보안 정보, 그리고 대리님의 기획안이 있잖아요. 이 셋을 합치면 못 만들 게 없습니다."
그날 밤, 민준과 조력자들은 비밀리에 모였다. 어느덧 선호윤 대리도 민준과 뜻을 함께하는 든든한 동지가 되었다. 지환은 백 전무가 선호하는 통계 모델을 해킹 수준으로 분석해냈고, 무열은 진 상무가 선포식 당일 터뜨리려던 ‘백 전무 공격용 찌라시’의 실체를 확보했다. 호윤은 이 모든 정보를 세련된 비즈니스 언어로 다듬었다.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서연이 커피를 들고 나타났다.
"다들 고생이 많네요. 근데 민준 씨, 하나 잊은 거 없어요?"
"네? 뭐가요?"
"백명석 전무는 숫자를 믿는 게 아니라, 숫자를 들고 있는 '사람'을 믿는 사람이에요. 데이터로 압도하는 것도 좋지만, 그가 민준 씨를 '자신의 편'이라고 느끼게 만들어야 해요. 그게 이 전쟁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일 거예요."
서연의 조언은 날카로웠다. 민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단순한 기술의 대결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훔치는 정치의 영역이었다.
[ 퀘스트 진행도: 90% ]
[ 새로운 스킬 해금 예정: 보고서 작성 5-1 ‘실무 보고서 작성’ ]
일주일 뒤, 한명그룹 미래 비전 선포식 당일. 화려한 조명 아래 백명석 전무와 진 상무가 나란히 앉아 서로를 향해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민준은 단상 옆에서 리모컨을 쥐고 심호흡을 했다.
진 상무가 민준에게 신호를 보냈다. 이제 함정이 작동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민준이 화면에 띄운 것은 진 상무가 검토했던 의전 시나리오가 아니었다. 그것은 백명석 전무가 지난 10년간 갈망해왔던, 하지만 아무도 감히 제안하지 못했던 ‘그룹 통합 물류망 혁신안’의 핵심 요약본이었다.
백명석 전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게 뭐야? 누가 이 자료를 준비했지?"
진 상무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그게…… 김민준 인턴이 실수를……."
"실수?"
백 전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다가왔다. 그는 화면에 띄워진 정교한 리스크 분석 표를 손으로 가리켰다.
"이건 실수가 아냐. 우리 그룹의 아킬레스건을 정확히 찌르면서도 대안을 제시하고 있어. 김민준 인턴, 자네가 직접 설명해 보겠나?"
진 상무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민준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백 개의 시선을 느꼈다. 그리고 등 뒤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지환, 무열, 호윤, 그리고 서연을 떠올렸다.
민준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우며 마이크를 잡았다.
"네, 전무님.
한명그룹의 미래 리스크를 0%로 만드는 전략, 지금부터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 스킬 발동: 리스크 예측 & 실무 보고서 작성 ]
[ 결과: 백명석 전무의 '확신' 획득 성공 ]
진 상무가 파놓은 무덤은, 이제 진 상무 자신의 차지가 될 준비를 마쳤다.
-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