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화: 숫자의 덫, 그리고 낯선 시선


진 상무의 '전용 도구'가 된다는 것은, 한명그룹 본사 15층에서 가장 뜨거운 지옥 불 옆에 자리를 잡는다는 뜻이었다.

독일 바이에른 테크와의 회의가 끝난 직후, 민준의 책상은 이미 초토화 상태였다. 진 상무가 던져놓고 간 케케묵은 프로젝트 기획안들과 각종 미승인 보고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야, 김민준.”

민준의 어깨를 툭 치며 나타난 것은 선배 도윤이었다. 아까 회의실에서 민준이 독일어로 좌중을 압도하는 것을 보고 배가 뒤틀릴 대로 뒤틀린 표정이었다.

“상무님이 이거 내일 오전 전략회의 전까지 PPT로 다시 뽑으래. 디자인은 세련되게, 내용은 콤팩트하게. 알지? 아, 그리고 너 아까 독일어 말이야. 그거 진짜 독학 맞냐? 비법 있으면 공유 좀 하자고.”

비법? 뇌를 해킹당하고 실험실 폭발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으면 된다는 말을 해줄 순 없었다. 민준은 건조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비법이랄 게 있나요. 그냥 머릿속에 사전 한 권 들어있다고 생각하면 편합니다.”

“참 나, 알려주고 싶지 않다 이거지? 아무튼 오늘 밤새야 할 거다. 상무님 안목이 보통 까다로우신게 아니야. 웬만한 템플릿으로는 눈도 까딱 안 하셔. 이번에도 어디 잘 해 봐라 ”

도윤이 낄낄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러 사라졌다.


사무실의 불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민준은 커피 한 잔을 들이켜며 모니터를 응시했다. 진 상무가 준 자료들은 하나같이 앞뒤가 맞지 않는 수치들로 가득했다.

‘이건 그냥 기획안이 아니야. 자금 흐름을 교묘하게 세탁하려는 흔적이 보이는데?’

집중력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등 뒤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인기척이라기보다는 아주 은은하고 차분한 향기였다.


“……저기, 혹시 탕비실에 남은 비타민 음료 어디 있는지 아세요?”

민준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순간, 뇌의 연산 장치가 일시적인 과부하를 일으키는 기분을 느꼈다.

차분하게 내려앉은 생머리, 화려하지 않지만 단단함이 느껴지는 눈매. 같은 인턴 동기들 사이에서도 유독 말수가 적어 존재감이 희미했던 이서연이었다. 아니, 희미했다기보다 스스로를 지우고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아, 그건 아마 이 대리님이 다 마셨을 텐데. 제가 사둔 게 하나 있는데 드릴까요?”

민준이 서랍에서 음료를 꺼내 건네자, 서연이 살짝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민준 씨라고 했죠? 아까 회의실 소문 다 났더라고요. 독일어 전공자들도 혀를 내둘렀다면서요.”

“운이 좋았죠. 서연 씨는 퇴근 안 하셨네요?”

“전략기획팀에서 데이터 검수 보조하느라 조금 늦었어요. 근데…….”

서연의 시선이 민준의 모니터 화면에 머물렀다. 민준은 본능적으로 화면을 가리려 했다. 아직 외부에 공개해서는 안 될 진 상무의 ‘내밀한’ 기획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연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이 부분 말이에요.”

서연이 하얀 손가락으로 화면의 특정 수치를 가리켰다.

“해외 마케팅 비용 집행 내역이 작년 대비 300% 급증했는데, 실제 매출 연동 지표는 그대로네요. 이건 단순한 기획 오류가 아니라… 어딘가로 새고 있다는 뜻 아닐까요?”

민준은 내심 경악했다. 자신은 뇌에 이식된 시스템의 도움으로 알아낸 사실을, 서연은 단 몇 초 만에 육안으로 잡아낸 것이다.

‘이 여자, 평범한 인턴이 아니야.’

“서연 씨는 어떻게 알았어요? 이건 전문 회계사들도 한참 봐야 알 텐데.”

“그냥… 숫자가 안 예쁘잖아요. 거짓말하는 숫자들은 억지로 끼워 맞춰진 느낌이라 티가 나거든요.”

서연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민준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너무 열심히 하지 마요. 때로는 너무 잘 만드는 게 독이 될 수도 있으니까. 특히 진 상무님 같은 분 밑에선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서연이 사무실을 떠났다.

민준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묘한 긴장감을 느꼈다.

‘이서연…… 대체 정체가 뭐야?’

하지만 의문은 뒤로 미뤄야 했다. 황금빛 테두리의 알림창이 다시 한번 강렬하게 점멸했기 때문이다.


[ 긴급 퀘스트: ‘진 상무의 이중장부’ 탐색 진행 중… ]

[ 분석 결과: 해당 기획안은 허위 지출을 정당화하기 위한 장치임 ]

[ 업무스킬 2-2 ‘파워포인트’를 가동합니다. ]


민준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날아다녔다. 서연이 짚어준 오류를 중심으로, 민준은 새로운 전략을 짰다. 겉보기에는 진 상무의 입맛에 딱 맞는 화려한 보고서지만, 데이터의 이면을 파고들면 부정의 흔적이 튀어나오게 설계된 ‘데이터의 덫’이었다.


[ 스킬 효과: 수신자의 무의식을 자극하는 인포그래픽 자동 생성 ]


밤을 지새워 완성된 슬라이드는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폰트의 간격, 색상의 조화, 그리고 시선의 흐름까지 완벽하게 계산된 결과물이었다.



다음 날 오전 9시. 전략회의실.

진 상무를 비롯한 주요 팀장들이 모였다. 회의실 전면 스크린에 민준이 만든 PPT가 띄워졌다.

“……오?”

첫 슬라이드가 넘어가자마자 회의실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거 누가 만들었나? 디자인이 거의 글로벌 컨설팅 펌 수준인데?”

진 상무 역시 만족스러운 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우리 팀 김민준 인턴이 밤새 고생 좀 했지. 내가 방향을 좀 잡아줬거든.”

진 상무는 자신의 공인 양 어깨를 으쓱거렸다. 민준은 구석에서 묵묵히 발표를 지원했다. 회의가 중반을 넘어설 때쯤, 민준은 서연이 지적했던 그 ‘부자연스러운 숫자’가 담긴 장표를 띄웠다.

“상무님, 이 부분에서 해외 지출액의 효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특수 애니메이션을 넣었습니다. 직접 클릭해 보시겠습니까?”

진 상무는 아무런 의심 없이 마우스 포인터를 눌렀다.


순간, 화면의 그래프가 화려하게 움직이더니 300% 급증한 마케팅 비용 부분이 붉게 깜빡이며 화면 정중앙에 거대하게 확대되었다. 마치 “여기서 돈이 새고 있습니다!”라고 소리라도 지르는 것처럼.

회의실의 공기가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수치를 대충 훑어보던 다른 팀장들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진 상무의 얼굴은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당황해서 민준을 노려보았지만, 민준은 세상에서 가장 무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상무님, 데이터의 임팩트가 워낙 커서 가독성을 극대화해 봤습니다. 제가 너무 의욕이 앞섰나요?”

“이, 이…….”

진 상무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서 민준을 다그치면 자신이 이 데이터를 조작했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회의실 뒷문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박하영 기자가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민준에게만 보일 듯 말 듯 엄지를 치켜세웠다.

회의가 끝나고 나가는 길, 민준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시 이서연과 마주쳤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서류 봉투를 안고 서 있었다.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민준 씨.”

그녀가 작게 속삭였다.

“근데…… 방금 그 PPT, 제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쁜 무기였어요.”

서연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민준은 닫히는 문 사이로 보이는 그녀의 차분한 눈동자를 보며 확신했다. 이 회사에서 자신이 믿을 수 있는, 혹은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 생겼다는 것을.


[ 퀘스트 완료: ‘진 상무의 이중장부’ 단서 확보 성공 ]

[ 보상 지급: 문서 작업 스킬 ‘워드’ 마스터 단계 진입 ]

민준의 사원증이 가슴 위에서 차갑게 빛났다. 한명그룹이라는 거대한 괴물의 배 속에서, 이제 막 첫 번째 수술칼을 찔러 넣은 참이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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