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화: 천국의 보고서, 그리고 지옥의 저녁 식사
김기림 상무의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자신이 던져준 독소 조항 가득한 개편안을 민준이 완벽하게 ‘마사지’해서 가져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준의 모니터 너머에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연산이 이뤄지고 있었다.
[ 스킬 해금 완료: 문서 작업 스킬 2-4 ‘자동 문서 최적화’ ]
[ 효과: 읽는 사람의 권한과 니즈에 따라 데이터의 강조점과 행간의 의미가 실시간으로 변동됨 ]
[ 현재 상태: ‘부회장용 승계안’과 ‘주주용 상생안’의 완벽한 오버레이 성공 ]
“김민준 인턴, 준비됐나? 부회장님께 직보고 들어간다.”
김 상무의 재촉에 민준은 USB를 챙겨 일어났다. 그때 옆자리에서 지환이 몰래 엄지를 치켜세웠고, 무열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회의실 근처 복도를 서성거리며 보초를 섰다. 선호윤 대리는 뒤에서 입모양으로 ‘파이팅’을 외쳤다. 든든한 ‘민준 사단’의 응원을 받으며 민준은 부회장실로 향했다.
회의실 안, 임 부회장은 차가운 눈으로 스크린을 주시했다. 민준이 프리젠터 버튼을 눌렀다.
“이번 지배구조 개편안의 핵심은 ‘투명한 효율성’입니다.”
민준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김 상무의 태블릿에는 부회장의 지배력이 15% 상승한다는 도표가 떴다. 김 상무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동시에 박하영 기자가 미리 정보를 흘려둔 소액 주주 연대 측의 단톡방에는, 민준이 심어둔 ‘배당금 300% 상향’ 및 ‘사외이사 추천권 확보’라는 핵심 로직이 해독되어 퍼지고 있었다.
보고가 끝날 무렵, 임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김 상무, 이 내용이면 주주들 반발 없이 조용히 넘어갈 수 있겠나?”
“물론입니다, 부회장님. 김 인턴이 아주 영악하게 수치를 잘 만졌습니다.”
그때였다. 김 상무의 휴대폰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홍보팀과 법무팀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상무님! 지금 주주 연대에서 개편안 찬성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조건이… 우리가 넣지도 않은 배당 확대안을 ‘민준 인턴의 보고서’를 근거로 확정해달라고 난리입니다!”
“뭐? 그게 무슨…!”
김 상무가 당황해 민준을 돌아봤다. 민준은 특유의 ‘순진무구한 인턴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어라? 제가 작성한 시뮬레이션 데이터가 워낙 완벽해서 주주들이 행간에 숨은 ‘기업 가치 제고’의 뜻을 알아챘나 봅니다. 역시 진심은 통하는 법이네요, 상무님.”
임 부회장은 김 상무의 넋이 나간 표정과 민준의 여유로운 미소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김 상무, 자네가 키우려던 사냥개가 사냥꾼을 물어버렸구만. 하지만 덕분에 주주 총회는 무혈입성이겠어. 이번 건은 김민준 인턴의 공으로 돌리지. 그게 그림이 좋겠어.”
김 상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다 잡았다고 생각한 민준을 자기 손아귀에 넣으려다, 오히려 민준의 입지만 강화시켜준 꼴이 됐다.
승전보를 울리며 사무실로 돌아온 민준을 맞이한 건, 업무보다 더 무서운(?) 저녁자리 조율이었다.
“민준 씨, 오늘 고생했으니까 삼겹살 먹으러 가야죠? 예약해 뒀어요.” 박하영 기자가 퇴근 시간에 맞춰 홍보팀에서 마케팅팀으로 당당히 쳐들어왔다.
그 순간, 옆에서 짐을 챙기던 서연이 차분하게 끼어들었다. “민준 씨, 아까 낮에 말했던 ‘자회사 분석’… 오늘 밤 아니면 시간이 없는데. 일식집 예약 인원 수정할까요?”
민준은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시스템창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 돌발 이벤트: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
[ 분석: 박하영(공격력 상, 정보력 상), 이서연(방어력 상, 통찰력 상) ]
[ 추천 스킬: 없음. 이건 스킬로 해결 안 됨. 행운을 빕니다. ]
“저… 그게… 사실 오늘 우리 팀 회식이 있지 않나요?” 민준이 구원 요청의 눈빛으로 선호윤 대리와 지환, 무열을 바라봤다. 눈치 빠른 지환이 얼른 거들었다.
“아! 맞다! 오늘 ‘민준 사단’ 결성 기념 삼겹살 회식이었지! 박 기자님도 오시고, 서연 씨도 같이 가시죠! 삼겹살 먹으면서 일식… 아니, 자회사 분석하면 되잖아요!”
결국, 강남의 한 삼겹살집. 민준은 가운데 앉아 왼쪽에서는 하영이 구워주는 고기를 받아먹고, 오른쪽에서는 서연이 챙겨주는 쌈을 받아먹으며 ‘고문’인지 ‘포상’인지 모를 저녁 식사를 시작했다.
“민준 씨, 이거 먹고 힘내서 다음엔 김 상무 비자금 털러 가야죠?” 하영이 고기를 얹어주며 속삭였다. “민준 씨, 너무 급하게 먹지 마요. 체하면 분석 데이터 안 읽히니까.” 서연이 물을 건네며 받아쳤다.
민준은 입안 가득 쌈을 문 채 생각했다. ‘임상실험 때 뇌만 변한 게 아니라 팔자도 변한 것 같은데… 이거 좋은 거 맞지?’
멀리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지환과 무열은 소주잔을 기울이며 혀를 찼다. “민준 씨, 부회장보다 저 두 여자가 더 무서울걸?” “내 말이. 그래도 부럽다, 부러워.”
삼겹살 연기 속에서 민준의 행복하고도 아찔한 사회생활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