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일도 연애도 아슬아슬한 민준의 균형잡기

제19화: 일도 연애도 아슬아슬한 민준의 균형잡기


부회장 직속 ‘미래전략 TF’ 사무실은 본사 최상층에 위치해 있었다. 마케팅 1팀과는 공기부터 달랐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이곳에서 민준은 김기림 상무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민준 인턴. 자네가 능력이 좋다는 건 진 상무의 파멸로 증명됐지. 하지만 여기선 그 잘난 ‘정의감’ 따위는 쓰레기통에 버려야 할 거야. 이번 자료를 보면 어느 편에 설지 정확한 입장을 볼 수 있겠지. 신중하게 처신하라고. ”

김 상무가 민준의 책상 위로 두꺼운 서류 뭉치를 던졌다.

“부회장님 지분이 얽힌 지배구조 개편안 초안이다. 이걸 기반으로 소액 주주들이 반발하지 못하게끔, 아주 ‘합리적이고 매력적인’ 수치로 포장해 와. 내일까지.”

민준은 서류를 펼쳤다. 겉으로는 그룹의 미래를 위한 효율화 전략이었지만, 시스템은 이미 빨간 경고등을 켜고 있었다.


[ 리스크 예측 가동 ]

[ 분석 결과: 해당 개편안은 순환 출자의 맹점을 이용한 ‘합법적 탈세’ 및 ‘경영권 편법 승계’ 모델임 ]

[ 경고: 이대로 문서를 작성할 경우, 부회장의 공범이 될 확률 높음 ]


‘이거였군. 나를 공범으로 만들어서 입을 막으려는 거야.’

민준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스마트폰이 짧게 진동했다. 박하영 기자였다.


[박하영 기자: 민준 씨, 김기림 상무가 준 서류 절대 그대로 쓰지 마요. 내가 방금 제보받았는데, 소액 주주 연대가 이미 그 개편안의 허점을 노리고 시위를 준비 중이래요. 그거 그대로 발표했다간 민준 씨가 독박 써요.]


하영의 발 빠른 정보력에 감탄하던 찰나, 옆자리에서 서연이 커피 한 잔을 내려놓으며 속삭였다.

“수치에만 집중하지 마요. 이 문서는 ‘누가 읽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거든요.”

서연은 김 상무의 눈치를 보며 민준의 모니터 구석에 작은 메모를 남기고 사라졌다.


[장부 밖의 숫자를 보세요. ‘한명 홀딩스’의 자회사 리스트에 답이 있어요.]


두 여자의 상반된, 하지만 자신을 위하는 조언 사이에서 민준의 뇌가 풀가동되기 시작했다.


[ 새로운 스킬 해금 퀘스트 발생 ]

[ 목표: 수신자(소액 주주와 부회장) 모두를 만족시키는 ‘양면 문서’를 작성하라 ]

[ 진행도: 10%... 40%... 80%... ]

[ 스킬 해금 예고: ‘자동 문서 최적화’ (수신자의 니즈에 따라 문맥이 변하는 마법의 문서 작성술) ]


민준은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쪽으로는 임 부회장이 원하는 ‘지배력 강화’의 명분을 완벽히 세우면서도, 그 이면에는 소액 주주들에게 배당금을 대폭 확대할 수 있는 ‘독소 조항 제거’ 시나리오를 심어넣었다.

워낙 방대한 양에 작업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텅 빈 사무실에 민준과 서연 단둘만 남았을 때, 서연이 민준을 묘한 눈길로 한참을 바라보다 물었다.

“민준씨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해요? 보통 사람이면 그냥 적당히 시키는 대로 하고 줄 잘 서서 성공하려고 할텐데. 쉬운 길을 두고 굳이 어렵고 위험한 길로 가려는 이유가 궁금해요.”

민준은 잠시 손을 멈추고 서연을 바라봤다.

“서연 씨가 그랬잖아요. 글자 사이의 시체들이 너무 많다고. 전 그 시체들을 살려내지는 못해도, 적어도 억울하게 죽은 사람은 없게 만들고 싶거든요. 그래야 평생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거 같아요. 천성이 이런 걸 어쩌겠어요. 생긴대로 살아야지요. ”

서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무언가 말하려다 입을 다물고는, 민준의 손등 위에 자신의 손을 아주 잠시 올렸다가 뗐다.

“민준 씨는… 제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강한 사람이네요. 그리고 좋은 사람이구요. 나중에 제 이야기도 다 할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네요.”




다음 날 아침, 김기림 상무의 보고 시간.

김 상무는 민준이 가져온 보고서를 훑어보더니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훌륭해. 부회장님이 아주 흡족해하시겠어. 소액 주주들을 ‘배당’이라는 사탕으로 입을 막다니, 영악하군.”

하지만 김 상무는 몰랐다. 민준이 하영을 통해 소액 주주 연대 측에 ‘이 보고서의 행간을 읽는 법’을 익명으로 전달했다는 사실을.

민준은 쩔쩔매는 척하며 대답했다. “상무님의 가르침 덕분입니다. 제가 인턴이라 아직 부족한 게 많아서요. 앞으로 알려주시는대로 지시하시는대로 부족한 실력이나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하영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박하영 기자: 민준 씨! 방금 주주 연대 대표랑 통화했는데, 보고서 내용 보고 완전히 돌아섰대요! 협상 주도권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어요. 오늘 저녁에 삼겹살 어때요? 내가 쏠게요!]


그때, 반대편 복도에서 서연이 서류 파일을 들고 걸어오다 민준과 하영의 메시지를 우연히(혹은 의도적으로) 보게 되었다.

서연은 민준 앞에 멈춰 서서 차갑지만 귀엽게 쏘아붙였다. “민준 씨, 저녁엔 저랑 같이 ‘홀딩스 자회사’ 분석해야 하지 않았요? 삼겹살보다는… 일식이 더 깔끔할 텐데.”

민준은 양옆에서 날아오는 제안에 식은땀을 흘리며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아, 저… 점심엔 삼겹살, 저녁엔 일식… 아니, 이게 아닌데!”


[ 시스템 알림 ]

[ 호감도 지수 폭발적 상승 ]

[ 해결책 도출이 어려운 난제로 인한 시스템 과부하 ]

민준의 뇌는 개편안의 수치를 계산하는 것보다, 두 여자의 저녁 메뉴를 조율하는 데 더 많은 연산 능력을 소모하고 있었다. 민준의 줄타기는 일에서도 연애에서도 아슬아슬하게만 보인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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