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권력의 빈자리, 그리고 묘한 핑크빛 기류

제18화: 권력의 빈자리, 그리고 묘한 핑크빛 기류


진 상무가 안산 물류 센터에서 법무팀 차량에 실려 나간 뒤, 본사 15층 마케팅 1팀은 폭풍이 지나간 바다처럼 고요했다. 하지만 그 고요는 평화가 아니라, 주인을 잃은 권력의 빈자리를 노리는 자들의 숨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민준은 자신의 책상에 앉아 시스템창을 확인했다.


[ 업무스킬 1-4 ‘즉흥 대응 스피치’ 해금 ]

[ 효과: 예상치 못한 공격과 돌발 상황에서 0.1초 만에 논리적 방어 기제 및 역공 멘트 생성 ]


‘진 상무는 시작일 뿐이야. 진짜 몸통은 그를 이 자리에 앉힌 사람이지.’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정제된 수트 차림의 한 남자가 들어왔다. 부회장의 최측근이자 한명그룹의 ‘청소부’라 불리는 김기림 상무였다. 그는 차가운 눈빛으로 민준을 지목했다.

“김민준 인턴? 5분 뒤 회의실로 오게. 부회장님께서 이번 ‘안산 사태’에 대해 직접 보고를 받고 싶어 하신다.”

사무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민준이 긴장하며 일어서려는데, 옆자리 이서연이 슬쩍 민준의 소매를 붙잡았다.

“민준 씨, 잠깐만요.”

서연은 평소의 무표정을 유지했지만, 손끝에는 미세한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녀는 민준의 넥타이가 살짝 비뚤어진 것을 발견하더니, 직접 손을 뻗어 바로잡아 주었다.

“부회장님은 빈틈 있는 사람을 싫어해요. 넥타이 정도는… 제가 봐줄 수 있으니까.”

순간 사무실 안의 공기가 묘하게 달달해졌다. 민준은 가까이 다가온 서연의 은은한 향기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아, 고마워요. 서연 씨.”


그런데 그 광경을 문밖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특종을 냄새 맡고 달려온 박하영 기자였다. 하영은 문을 쾅 열고 들어오며 특유의 당당한 걸음으로 민준에게 다가왔다.

“어머, 분위기 좋네? 근데 김민준 씨, 비즈니스 파트너보다는 나한테 먼저 보고해야 하는 거 아냐?”

하영은 서연을 묘하게 견제하는 눈빛으로 쳐다보며, 민준의 반대쪽 소매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민준의 입가에 묻은 (방금 전 먹은 샌드위치) 부스러기를 손가락으로 툭 털어내 주었다.

“넥타이보다 중요한 게 첫인상이지. 이런 거 묻히고 가면 부회장님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안 그래요, 이서연 씨?”


민준은 졸지에 양팔이 붙잡힌 채 두 여자의 시선이 교차하는 한복판에 섰다. 묘한 핑크빛 스파크가 튄다. 서연은 차분하게 대꾸했다.

“박 기자님은 홍보팀 일이 바쁘실 텐데, 굳이 인턴 업무까지 신경 써주시네요~”

“아유, 민준 씨가 워낙 ‘대어’라 제가 밀착 취재 중이거든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요. 이러다 합숙이라도 해야 되나 싶을 정도네요~”

민준의 심박수가 급격히 상승했다. 시스템 창에 경고가 떴다.


[ 경고: 사용자 심박수 이상 상승 ]

[ 분석: 현재 상황은 ‘업무 리스크’보다 ‘연애 리스크’가 높음 ]

[ 추천 행동: ‘즉흥 대응 스피치’를 활용해 자연스럽게 탈출할 것 ]


“하하, 두 분 다 감사합니다! 역시 제 비주얼 담당은 하영 씨고, 논리 담당은 서연 씨네요! 두 분 없으면 저는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얼른 다녀와서 두 분께 커피 한 잔씩 살게요!”

민준은 쩔쩔매면서도 입가에 번지는 미소를 숨기지 못한 채 회의실로 도망치듯 뛰어갔다. 뒤통수에 대고 하영이 “난 아이스 바닐라 라떼!”라고 외쳤고, 서연은 작게 “조심히 다녀와요”라고 읊조렸다.



회의실 안. 상석에는 한명그룹의 실세, 임 부회장이 앉아 있었다. 그는 서류조차 보지 않은 채 민준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김민준 군. 자네가 우리 진 상무를 아주 비참하게 만들었다고 들었네. 인턴이 상무를 치다니, 한명그룹 역사에 없던 일이지.”

김기림 상무가 옆에서 거들었다. “정의 구현을 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백명석 전무의 사주를 받은 건가?”


[ 스킬 발동: 즉흥 대응 스피치 1-4 ]


민준은 두 여자의 응원(혹은 애정공세) 덕분에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그는 허리를 곧게 펴고 미소 지었다.

“부회장님, 저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저는 그저 ‘숫자’의 편일 뿐입니다. 안산 물류 센터의 손실액 연간 200억. 그 돈이 부회장님의 ‘미래 전략 자산’에서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단지 부회장님의 자산에 기생하던 ‘리스크’라는 해충을 방역했을 뿐입니다.”

임기학 부회장의 눈썹이 움찔했다.

“해충 방역이라… 재밌는 놈이군. 좋네. 그 실력, 이번엔 더 큰 곳에서 발휘해 보게. 다음 달에 있을 ‘그룹 지배구조 개편안’ 서포트팀에 합류해. 김 상무 밑에서 말이야.”

지옥불 속으로 제 발로 들어가는 격이었지만, 민준은 물러서지 않았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회의실을 나온 민준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상대로 하영과 서연이었다. 두 사람은 복도 양옆에 서서 민준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됐어요?” 하영이 먼저 달려들었다. “부회장님 직속 개편안 팀에 합류하게 됐습니다.”

그 말에 서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건… 너무 위험한 곳인데.” 하영은 민준의 팔짱을 꽉 끼며 말했다. “괜찮아요! 내가 밖에서 든든하게 서포트해 줄게. 민준 씨, 오늘 고생했으니까 내가 맛있는 거 사줄게요. 우리 얼른 가요!”


서연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민준의 반대쪽 팔을 조용히 잡았다. “저도… 개편안 자료 정리는 도와줄 수 있어요. 같이 가요, 민준 씨.”

졸지에 양쪽에 미녀를 끼고 복도를 걷게 된 인턴 김민준. 지나가는 사원들의 부러움 섞인 시선이 화살처럼 꽂혔다. 민준은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이 묘한 긴장감이 나쁘지 않다는 듯 광대가 승천하고 있었다.

‘임상실험이 뇌에 연애 운까지 업로드 한 건가? 이 정도면 목숨 까짓 거 몇 번 이라도 걸만 한데~ ’민준의 행복한 고난은 여러 의미로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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