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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Jul 01. 2019

인생은 여행=달리기

여행의 이유, 김영하

  지난 4월, 김영하 작가의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사야겠다고 생각만 하던 중 우연히 들른 동네 책방에서 맞닥뜨린 그 책은 내가 봤던 표지와 사뭇 달랐다.


나 대표님, 이 책 표지가 왜 이래요?

Y(동네책방 대표) 아, 이거 동네 서점에만 입고되는 에디션인데 딱 한 권 남아 있어요.

나 정말요? 그럼 저 살래요!


김영하 작가의 '여행의 이유'는 그렇게 내게 왔다. 소설뿐 아니라 산문집을 통해 본 김영하 작가의 섬세함이 나는 좋았다. 하지만 인간적으로 더 매력을 느낀 건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을 통해서였다. 책은 줄곧 읽어왔지만 독서모임을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고 독자모임은 단 한 번도 참여한 적이 없으니 작가를 가까이서 접한 게 처음이라면 처음이었다. 하나의 정물을 얼마나 진지하게 관찰하는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예리함과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러니 '여행의 이유'는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이었다.



선생님이셨던 아빠는 여름과 겨울, 두 번의 방학에는 숙제처럼 우리를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습관처럼 떠난 여행이었고 고3을 제외하고는 여행에 끌려다니다시피 했다. 엄마는 여행 중 숙소에서 먹을 반찬도 만들어갈 정도로 철저히 계획하고 준비하는 사람이었다. 떠나기 위해서는 만반의 준비를 해야 했다. 여행은 자유가 아니라 강요였다. 자연스레 나는 여행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여행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게 된 건 아마도 나영석 PD 덕분이 아닐까 싶다. '1박 2일'을 시작으로 '꽃보다' 시리즈, '삼시 세 끼', '신서유기', '윤식당', '알쓸신잡', '스페인하숙' 까지 여행을 테마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그동안 내가 경험했던 습관적이고 계획적인 여행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특히 어떤 준비도 없이 떠나는 '꽃보다' 시리즈와 함께 여행을 떠나지만 자신의 취향에 따라 여행을 하고 만나는 '알쓸신잡'을 보며 여행을 새롭게 정의하게 되었다.  


'여행의 이유'를 읽으면서 다시 한번 여행이란 무엇일까, 정리하는 시간이 되었다. 스물여덟, 혼자 제주도를 한 달 동안 여행하면서 경험한 여행이 내게는 진정한 첫 여행이었다. 꼼꼼하게 계획을 세웠지만 처참히 어그러지면서 여행이란 계획처럼 되지 않는다는 것을 , 그것이 꼭 삶과 닮아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것이 내게는 특별했다. 고작 한 달이었으면서도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휘젓고 다니면서 나는 스스로를 현지인이라고 여겼지만 모든 현지인에게 나는 이방인이었다. 결국 나는 떠나왔던 곳으로 다시 돌아갔다. 여행은 그렇게 다시 나를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냈다. 그것이 꼭 마라톤을 닮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그것과 닮은 것들을 좋아하게 되었다. 언젠가 또 인생을 닮은 무언가를 발견하게 되면, 나는 천천히 그것을 좋아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여행도, 달리기도 그러했던 것처럼.



문장 기록


P 18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여행의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P 51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P 55

오래 내면화된 것들이라 하지 않고 살고 있으면 때로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P 57

모든 인간은 다 다르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딘가 조금씩은 다 이상하다.


P 79

작가는 우렁찬 목소리보다는 작은 속삭임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자신 없는 음성으로 낮게 읊조리는 소심한 목소리에 삶의 깊은 진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웅얼거림을 잘 들으려면 발화자 가까이에서 귀를 기울여야 한다.


P 80

영감을 얻기 위해서 혹은 글을 쓰기 위해서 여행을 떠나지는 않는다. 여행은 오히려 그것들과 멀어지기 위해 떠나는 것이다. 격렬한 운동으로 다른 어떤 것도 생각할 수 없을 때 마침내 정신에 편안함이 찾아오듯이, 잡념이 사라지는 곳, 모국어가 들리지 않는 땅에서 때로 평화를 느낀다.


P 97

모든 여행은 끝나고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게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P 109

과거는 이미 지나갔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고 알 수도 없다. 그렇다면 그냥 현재를 즐기자. 현재는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여행을 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사람들과 마주 앉아 다양한 주제로 대화를 하고 있다는 것. 미래는 포기하고 현재에 집중하자고 생각했고 그것은 사실 내가 모든 여행에서 택하는 태도이기도 했다.


P 114

'어떤 타자를 감수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여행했을 때에는 놓칠 수 있는 거을 타인을 통해 경험하는 것, 타인이 놓쳤을 어떤 것을 상상력을 동원해 복원하는 것, 이런 것들이 우리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고 보았다.


P 132

그토록 길고 고통스러웠던 여행의 목적은 고작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었다.


P 155

여행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자', 노바디 nobody일 뿐이다.


P 165

우리의 정체성은 스스로 확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타인의 인정을 통해 비로소 안정적으로 유지된다.


P 180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P 203

어둠이 빛의 부재라면, 여행은 일상의 부재다.


P 204

소설은 우리를 다른 세계로 끌어들인다. 자기도 모르게 집중하게 된다. 소설에서는 그냥 일어나는 사건이 거의 없다. 나중에 일어날 일들과 어떻게든 연결되어 있다.


P 207

당연하게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이제 더 이상 당연하지 않게 된다. 귀환의 원점은 겨우 찾았지만 그 자신이 이미 변화했기 때문에 원점은 의미를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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