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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Jul 17. 2019

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수학자의 아침, 김소연

  한 작가의 시를 꼭꼭 씹어서 한 권의 시집을 덮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언제나 시는 표현상 의미나 특징을 찾아야 했고, 그건 마치 수학처럼 정답이 있었다. 그렇기에 시를 읽고 어떤 감정을 느끼는 것이 불편했다. 틀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였을까?


시를 읽게 된 건 독서모임을 하면서 만난 경님 덕분이었다. 그녀는 시에 대해 어떠한 단정도 짓지 않았다. 그저 시를 읽어주었다. 천천히, 소리 내어, 덤덤하게 읽어주었다. 참 좋았다, 음색이, 속도가, 띄어 읽기가, 높낮이가. 시를 읽다가 이해가 되지 않을 때 나도 소리 내어 시를 읽었다.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음에 와 닿았다. 뭔지 모르는 뭔가가 마음을 툭, 건드렸다. 그렇게 나는 김소연 시인의 시집을 읽었다.



읽는 내내 시인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사람이길래 이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것일까. 시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세상은 그동안 내가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사소한 것 하나도 허투루 보지 않는 세심함이 있었고 어떠한 경계도 없이, 다양한 위치에서 관찰하는 예리함이 있었다. 누구나 볼 수 있지만 아무나 볼 수 없는 시인만의 따뜻함이 있었다.


시집을 읽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집 근처에 있는 인쇄소를 지나쳤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신문을 인쇄하고 접고 옮기는 곳이었다. 문득 그 안을 들여다보는데 아저씨 한 분이 테이블에 누워 잠이 들어 있었다.




그림자


잉크 냄새가 스민 책상에

커다란 그림자


하루 종일 구겨져 있다가

빛이 사라진 시간에서야 제 모양을 찾는다


열 손가락 하나 하나

흐트러진 머리 한올 한올


눈코입 없이

하루종일 여기저기 쏟아지는 것을 전했지만

폐지 속으로 사그라진

오늘의 전부




내가 내게 말을 걸었다. 시는 세상을 들여다보는 거라고, 누구나 볼 수 있는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시를 쓰고 싶은 밤이라고, 매일 시를 써야 한다고.



문장 기록


P 11 오, 바틀비

모두가 아름답게 불행해질 때까지 모두가 눈물겹게 불행해질 때까지.


P 15 수학자의 아침

눈물 따위와 한숨 따위를 오래 잊고 살았습니다

잘 살고 있지 않는데도 불구하고요.


P 17 그래서

잘 지내냐는 안부는 안 듣고 싶어요

안부가 슬픔을 깨울 테니까요

슬픔은 또다시 나를 살아 있게 할 테니까요


P 19 장난감의 세계

같은 장소에 다시 찾아왔지만

같은 시간에 다시 찾아가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P 29 사랑과 희망의 거리

우리는 어깨로 얘기를 들어주고 있다

다가갔다 물러섰다,

빗방울이 앉았다 넓어졌다 짙어지는

우리의 어깨가 얼룰이 질 때


P 57 열대어는 차갑다

하나의 문장으로도 세계는 금이 간다

이곳은 차가우므로 더 유리하겠지


P 64 바깥에 사는 사람

버스에 가장 오래 앉은 사람은

가장 바깥에 산다 그곳은 춥다


P 72 생일

슬픔을 슬퍼하는 사람이 오로지 슬퍼 보인다

사람인 것에 지쳐가는 사람만이 오로지 사람다워 보인다


P 114 막차의 시간

멀어지는 방식은 모두 비슷하다

뒷모양을 오래 쳐다보게 한다


P 116 있고 되고

있는 것들이 오랜동안 그렇게 있을 때

우리가 기다리던 것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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