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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Apr 03. 2020

어쩌면 나, 비로소 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릭 모디아노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책을 좋아한다고 동네방네 소문을 내고 다니다 보니 지인의 추천으로 문학동네 브랜드 소셜클럽에 초대를 받게 되었다. 지난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주년을 맞이하여 리커버 특별판 10권이 출간되었다. 그중의 한 권인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도시'를 선물로 받았다. 작가나 책에 대한 기본적인 정보 없이 책을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책 표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이렇게 책을 완벽하게 설명한 책 표지를 새삼 처음 본 듯했다.   


'어두운 상점들의 도시'는 기억을 잃은 채 탐정으로 살아온 기 롤랑이 마지막으로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찾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을 알지 모를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며 자신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다. 혹시라도 그일 수도 있고, 그의 주변 인물일 수도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정보와 신문기사, 사진 등을 통해 그는 자신을 추적해 나간다. 과거의 자신이 좀처럼 한 인물로 추려지지 않는 화자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 사이의 간극이 느껴졌다. 나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존재이지만 타인에게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사람, 혹은 정물일 수도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도달했다. 


모래는 우리들 발자국을 기껏해야
몇 초 동안밖에 간직하지 않는다.

고작 몇 초 후면 사라져 버리는 모래 위 발자국일지라도, 누군지 알 수 없는 한낱 환한 실루엣일지라도, 언젠가 한 줌의 재로 흩어질지라도 결국 '나'를 찾아가는 과정이 인생이다. 어쩌면 나일지도 모를 무언가를 갈망하면서 비로소 내가 되어간다. 사라져버릴 희망일지라도, 잊혀져버릴 존재일지라도.




문장 기록


P 75 

기이한 사람들. 지나가면서 기껏해야 쉬 지워져버리는 연기밖에 남기지 못하는 그 사람들. 위트와 나는 종종 흔적마저 사라져버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곤 했었다. 그들은 어느 날 무(無)로부터 문득 나타났다가 반짝 빛을 발한 다음 다시 무로 돌아가버린다. 미(美)의 여왕들, 멋쟁이 바람둥이들, 나비들. 그들 대부분은 심지어 살아 있는 동안에도 결코 단단해지지 못할 수증기만큼의 밀도조차 지니지 못했다. 위트는 ‘해변의 사나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을 나에게 그 예로 들어 보이곤 했다. 그 남자는 사십 년 동안이나 바닷가나 수영장 가에서 여름 피서객들과 할 일 없는 부자들과 한담을 나누며 보냈다. 수천수만 장의 바캉스 사진들 뒤쪽 한구석에 서서 그는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룹 저 너머에 수영복을 입은 채 찍혀 있지만 아무도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왜 그가 그곳에 사진 찍혀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리고 아무도 그가 어느 날 문득 사진들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나는 위트에게 감히 그 말을 하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해변의 사나이’는 바로 나라고 생각했다.


P 245

지금까지 모든 것이 내게는 너무나도 종잡을 수 없고 너무나도 단편적으로 보였기에…… 어떤 것의 몇 개의 조각들, 한 귀퉁이들이 갑자기 탐색의 과정을 통하여 되살아나는 것이었어요…… 하기야 따지고 보면, 어쩌면 바로 그런 것이 인생일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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