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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Apr 11. 2020

'사랑' 말고 '사랑하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김소연


우리가 학습해온 사랑은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 힘도 없다.

하지만 사랑함은 그렇지 않다.



'나도 노력해봤어 우리의 이 사랑을, 안 되는 꿈을 붙잡고 애쓰는 사람처럼. 사랑을 노력한다는 게 말이 되니.' 가수 박원의 '노력'이라는 노래 속 가삿말이 귀에 콕 박혔던 때가 있었다. '사랑'은 감정인데 그게 노력으로 가능한가,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생각했었다. 사랑이 식으면, 사랑이 끝나면 헤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혼 생활을 하면서 사랑에도 반드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랑한다고 상대를 다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더 알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사랑한다고 상대를 전부 이해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말장난 같은 표현이지만 나는 '사랑'이라는 말 안에는 '노력'도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사랑이라는 걸 단순히 감정의 동요로만 생각했던 걸까.


김소연 시인이 사랑에 관한 산문을 쓴다고 했을 때부터 기대가 됐었다. 소외된 곳을 따스하게 바라보는 시인이라면 사랑에 대해 무엇을 말할까. 출간된 책의 제목을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 사랑에는 사랑이 없다면, 무엇이 있다는 걸까. 프롤로그 '사랑의 적들'을 읽으며 그동안 말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사랑에 대한 불편한 진실을 알게 되었다. 여태껏 내가 알고 배워 온 사랑이 얼마나 단편적이었고, 감정적이었는지 말이다.


각자 어떻게 이별했는지에 관해서는
세세하게 이야기를 했지만,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에 관해서는
뭉뚱그려 표현했다는 것이 생각났다.

지나간 연애에 아파하며 마치 그것이 온통 사랑인 양, 그래서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연애를 하던 시절이 떠올랐다. 순간의 셀렘으로 시작된 관계, 그래서 어떻게 사랑하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별은 우주의 소멸처럼 느껴졌다. 아주 사소한 이유였음에도 인생이 무너진 것 같았다. 비련의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 스스로를 가엾게 여겼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무엇 때문에 그리 아파했는지 좀처럼 기억나지 않는다. 그땐 그게 너무나 당연했으므로.


결혼을 하고 나서 내게 '결혼'이라는 단어는 명사가 아닌 동사, 현재 진형행으로 바뀌었다. 매일 부부로서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사랑 또한 마찬가지이다. '사랑'은 명사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행동해야 한다. 사랑해야 한다.




문장 기록


P 10

심장이 짜릿한 설렘과 심장이 저릿한 통증을 함께 겪고 싶다고 막연하게 사랑을 꿈꾸지 않았을까. 거기에 어떤 약속과 어떤 책무가 뒤따르는지에 대한 예상은 그다음 순위의 관심으로 미뤄놓지는 않았을까.


P 13

사랑의 적들은 사랑의 반대편에 있지 않고 사랑의 내부에 매복해 있다는 것도 알아채야 했다.


P 75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사랑으로 인해서가 아니라 다른 것들로 인해서 더 큰 행복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사랑의 충만과는 별개로 고독해질 수 있다는 것. 오래된 연인이 함께해온 많은 방식을 어느 한쪽은 익숙해져 안온해하는 반면, 어느 한쪽은 지루해져서 변화와 모험을 욕망할 수도 있다는 것. 다른 사랑을 추억하고 상상할 수도 있다는 것. 사랑받는 자의 천성적인 그릇이 작아서 어떤 경우는 너무 넘쳐 받아내다 지칠 수도 있다는 것. 예민하던 사랑이 둔감해져 가는 자연스러운 사실에 대하여 한 사람은 생활이 되어간다며 안도감을 느끼지만 한 사람은 상실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것.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장 모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일 수도 있다는 것. 이 어쩔 수 없는 모습 앞에서, 사랑은 언제나 서툴다.


P 100

독실한 기독교인이자, 심리 치유자이며 작가인 스캇 펙은 이 용서라는 개념을 용인이라는 개념과 대비하여 설명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흐릿한 이해를 앞세운 후 잘못을 저지른 자를 외면하고 체념하는 것을 용인이라고 한다면, 당신의 문제는 바로 이것이라며 잘못을 분명히 해두는 것을 앞세운 후에 그자를 다시 포용하는 것은 용서라고.


P 136

그 시절에 그녀는 보르헤르트의 『이별 없는 세대』를 만났다. 이 소설의 어떤 점을 그렇게나 좋아했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기억나지 않았다. 작가의 이름과 작품의 제목과 좋아했다는 사실만이 어렴풋하게 기억에 남아 있을 뿐이었다. 어떤 느낌으로 좋아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아도 좋아했다는 것은 기억에서 선명하다는 점이 그 시절 그녀에게 찾아온 사랑들-이별들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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