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월모일, 박연준
작년 오늘을 어떻게 보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기야 어제 일도 잘 기억나지 않는데 작년 일이 기억날 리 만무하다. 그저 어렴풋이 작년 이맘때쯤 임신을 준비하며 병원에 다녀온 일이 기억난다. 생각지 못한 검진 결과만 기억날 뿐 정확한 날짜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니 그쯤의 일상에 관한 기억은 오죽할까. 그저 힘든 나날들을 잘 견디며 지냈으리라. 결국 모월모일이다.
오랜만에 휴대폰 속 사진을 들여다봤다. 지나간 나날들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목젖이 보일만큼 웃어젖히는 사진,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엉엉 울고 있는 사진(우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아이 같다며 남편이 찍어놓은), 침대 위 이불에 돌돌 말려 잠에 취해 있는 사진 등등. 사진을 보아도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렴풋하게나마 그 날의 기분과 감정이 전해졌다. 나는 행복하기 했고, 불행하기도 했지만 대체적으로 무난한 일상을 보내왔다. 퍽 다행이다.
평범함은 특별하다.
우리가 그 속에서 숨은 모과를 발견하기만 한다면
평범이 특별함이다.
매일 뜨는 달이 밤의 특별함이듯.
서문에서 시인은 아무 날도 아닌 평범한 모월모일들로 이루어진 삶이 특별하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책의 본문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하찮은 나의 모월모일이, 평범한 나의 일상이 특별하다고 이야기해주는 시인이 너무 고마워서.
얼마 전 남편과 함께 안산 자락길에 다녀왔다. 봄에 꼭 가고 싶었던 곳이었기에 빗방울이 조금 떨어지는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개한 벚꽃보다 메타세쿼이아 길을 함께 걷고 싶었다. 그곳에 당도한 우리는 나란히 벤치에 앉아 신발을 벗는다. 나무를 바라본다. 고개를 들어 흔들리는 나무의 가지를 바라본다. 나뭇가지를 흔드는 바람을 고스란히 맞는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에 집중한다. 바람의 냄새에 봄이 들어있다.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에 시간을 들인다. 곧 잊힐 오늘이 특별해진다. 모월모일이다.
문장 기록
P 18
상처는 사라지는 게 아니므로 아물 때까지 돌봐야 한다. 슬픔도 사라지는 게 아니다. 잠잠해지는 거다. 그러니 어린 시절의 내가 당시의 슬픔을 손에 쥐고 다시 돌아온다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잠잠해지도록, 슬픔을 달래야 한다.
P 22
중요한 건 첫인상이 아니다. 지금 내가 당신을 어떤 마음으로 그리고 있는가. 그게 더 중요하다.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됐을까' 중얼거리며, 도토리를 가만히 만져보는 시간.
P 55
큰 나무든 작은 나무든 높이가 중요한 게 아니란 생각은 못한다. 성장은 위가 아니라 아래로 깊어지는 일이라는 것, 보이지 않게 이루어지는 일이란 것을 모른 채 숲을 헤맨다. 성장의 비밀은 뿌리에 있다. 팔을 위로 올리고 싶으면 아래에서 반대로 당기려는 몸통과 다리가 있어야 한다.
P 71
운동은 수련이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지기 위해, 매일 같은 동작을 반복하는 것, 그런 게 좋다. 이제 그런 것만 믿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발전.
P 73
아무리 좋아도 오래 붙어 있다 보면 종종 상대의 빛을 보지 못한다. 혼자일 때 빛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둘이 될 때, 내 빛남으로 당신을 돌볼 수 있도록, 그 반대가 되어선 곤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