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실한 마음, 델핀 드 비강
첫 문장을 잊을 수 없는 몇몇의 소설들이 있다. 『이방인(알베르 카뮈)』이 그랬고,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마쓰이에 마사시)』가 그랬다. 이미 어떤 일이 벌어졌고, 그 상황을 언어로 나열했다는 느낌이 드는 첫 문장을 만났을 때에 나는 책을 덮지 못한다. 아니 덮을 수가 없다. 이미 책이 말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이나 고통을 쉬이 발견할 때가 있다. 낯익은 표정이나 행동들, 그건 나의 경험을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회피하려고 해도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타인이 곧 '나'이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학기가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엘렌'은 '테오'에게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아채지 못했지만 '엘렌'은, 그녀는 모를 수가 없었다.
시선을 피하며 행동하는 아이만의 방식에
무언가가 깃들어 있었다.
내가 아는, 속속들이 아는 방식이었다.
이혼한 부모 사이에서 고통받는 아이 '테오'와 그 사실을 직감적으로 안 담임 선생님 '엘렌', 친구인 테오의 비밀을 숨겨주는 '마티스', 마티스의 엄마 '세실', 4명의 주인공 시점에서 이야기는 전개된다. 하지만 각자의 입장과 경험에 따라 이 상황은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그리고 각자 최선을 다해 부모를, 학생을, 친구를, 가족을 위해 행동한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은 긍정적으로 들린다. 하지만 과연 누구를, 무엇을 위한 최선이었을까.
'몸속 어딘가 잠들어 있는 어린 시절의 법칙,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가치, 저항하게 하는 근거, 우리를 갉아먹고 가두는, 해독할 수 없는 원칙. 우리의 날개이자 굴레. 우리의 힘이 펼쳐지는 발판, 그리고 꿈을 묻어둔 참호.'
책의 시작에서 작가가 말한 '충실한 마음'에 대한 정의는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작가가 말한 '충실'은 내게 '최선'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결국 어떤 최선도 완벽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 질문에 기꺼이 대답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요. 난 최선을 다할 겁니다.
문장 기록
P 28
매주 금요일 거의 비슷한 시간에 그는 이런 일을 해야만 한다. 가교도 안내자도 없이 이쪽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이동한다. 서로 교차하는 지대 하나 없는 완전한 두 세계 사이를 오간다. 지하철 여덟 정거장이면 된다. 그러면 다른 문화, 다른 관습, 다른 언어가 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시간은 고작 몇 분밖에 없다
P 42
나는 혼자서 말한다. 아무도 없을 때 집에서, 아니면 거리에서, 누구도 나를 보지 않는다고 확신할 때. 나는 나 자신에 말한다. 정말이다. 아니, 내 일부가 나의 다른 일부에게 말한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는 내게 말한다. ‘넌 할 수 있어.’ ‘잘 헤쳐나갈 거야.’ ‘계속 이러면 안 돼.’ 이런 식이다.
P 51
그들은 말을 하지 않고도 서로 어울릴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 서로 바라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사회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말이 필요 없는 무언의 공동체. 추상적이고 일시적인, 하지만 서로가 알아볼 수 있는 신호들. 이런 걸 무엇이라 명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이제 떨어지지 않는다.
P 65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내 눈에만 저 상처가 보이는 거야. 내 눈에만 그 피 흘리는 모습이 보이는 거야. 나는 눈을 감았다.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려, 호흡을 가다듬어보려, 테오를 상담한 보건교사의 단호하고 확신에 찬 억양이 새겨진 말들을 다시 떠올려보려 애를 썼다. “아무것도 없었어요. 표시도, 흔적도, 상처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구타당했다는 사실만 빼면. 그러니 나에게만은 그런 말이 통하지 않는다.
P 131
저녁 식탁에서 남편을 관찰한다. 그러면서 나 자신에게 묻는다. 저 안에 있는 괴물이 그의 냄새를, 그의 방식을, 내가 알아볼 수 없었던 그 분노의 메아리를 받아들이게 만든 걸까? 아니면 내가 변한 걸까? 그를 쓴맛 나는 존재로, 독을 잔뜩 품은 존재로 만든 게 혹시 내가 아닐까?
P 168
아이들은 자신의 부모를 보호한다. 그 무언의 약속은 때때로 아이들을 죽음으로 이끈다.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무언가를 이제 나는 안다. 그래서 모르는 체할 수가 없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다는 게 고작 이런 거구나. 잃어버린 것들과 잘못 끼운 첫 단추를 손보는 것. 그리고 우리가 어렸을 때 했던 약속들을 지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