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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May 26. 2020

해답은 가까이에

섬, 장 그르니에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순간이 있다.



  어릴 적 나는 집에서 '싸가지 없는', '이기적인' 아이로 통했다. 방의 모든 문이 열려 있어도 내 방문만은 언제나(대체로) 닫혀 있었다. '가족'이라고 해서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타고난 기질 탓인지, 아니면 후천적으로 깨우친 개똥철학 탓인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가족이든, 애인이든, 친구든 간에) 사람은 결국 개별적인, 독립적인 존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을 보는 순간 '섬'이라는 단어에 마음을 빼앗겼다.


책은 누구나 한 번은 겪을 '여명'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여명의 순간이라 하면 드라마틱하게, 섬광처럼 지나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생의 전체에 걸쳐 점진적인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해 보이는 여러 해의 세월이 '여명'일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라는 테두리가 정한 기준에 따라 누군가는 성공하고, 누군가는 실패한 것처럼 비쳐진다. 이런 인간중심적 사고(사회에서 정한 그 기준)는 멋지고 가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텅 비어있는 공(空)과 같다. 그렇다면 공은 어떻게 채울 수 있을까.


저자는 고양이로부터, 여행이나 여행지로부터, 타인과의 대화로부터, 문득 떠오르는 어떤 날로부터, 그리고 일상으로부터 공을 채울 수 있는 해답을 발견했다. 나는 여행이나 여행지에 대한 일화는 매우 공감했으나 또 다른 이야기는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누구나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으므로.


사실 이 책의 서문은 저자인 장 그르니에가 아닌 알베르 카뮈의 '섬에 부쳐서'로 시작된다. 카뮈는 스승인 저자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다만 우리들에게 단순하고 친숙한 경험들을 눈에 드러날 만큼 꾸미는 일이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우리들 자신이 스스로 좋은 대로 해석하도록 맡겨둔다."


작년 가을, 사업을 시작하면서부터 지금까지 쭉 나의 멘토가 되어주신 분의 집에 초대를 받았다. 맛있는 저녁과 근사한 와인을 대접해 주셨고 자신의 서재에서 몇 권의 책도 기꺼이 내어주셨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장 그르니에의 '섬'이었다. 자신의 경험을 공유해주시지만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고, 내가 받아들이는 그대로를 인정해주시는 멘토님의 모습이 흡사 장 그르니에와 닮아 있었다. 그러니 책은 내게 퍽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하기야 독서록을 쓰기 위해 책을 다시 읽으면서부터 나는 이 책을 평생 읽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문장 기록


P 28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사건들은 ─ 하여간 내면적인 사건들은 ─ 내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던 것이 차례차례 겉으로 드러나는 일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나는 확신하고 있는 터이니까 말이다.


P 30 나는 물결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았지만 물결은 뒤로 물러났다 앞으로 나아갔다 하면서, 마치 든든한 밧줄로 바다 깊숙이 비끄러매 놓은 부표처럼 끝내는 나를 제자리에 그대로 남겨놓는 것이었다.


P 32 가장 못한 것이 오직 다르다는 이유로 널리 쓰일 수도 있다. 가장 좋은 것도 없고 가장 못한 것도 없다. 이때에 좋은 것이 있고 저때에 좋은 것이 있다. 이 세상에는 완전한 것이란 없음을 나도 잘 알지만 이 세상에 일단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이 세상 속에 일단 얼굴을 내밀기로 작정만 하면, 우리는 더할 수 없을 만큼 기묘한 악마의 유혹을 받게 된다.


P 43 물루는 행복하다. 세계가 저 혼자서 끝없이 벌이는 싸움에 끼어들면서도 그게 제 행동의 동기가 한갓 환상일 뿐임을 깨달으려 하지 않는다. 놀이를 하되 놀고 있는 제 스스로의 모습을 바라볼 생각은 하지도 않는다. 그를 바라보는 것은 나다. 조그만 빈틈도 없이 정확하게 몸을 놀려 제가 맡은 역할을 다하고 있는 그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황홀해진다. 매 순간 그는 제 행동 속에 흠뻑 몰두해 있다.


P 61 사실, 어떤 절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그리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할 때, 그러기 위한 모범으로써 한 마리의 동물보다 더 나은 것이 어디 또 있겠는가.


P 66 이른바 불행한 존재들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지만 사실은 그 존재들의 비참한 모습을 눈으로 보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그들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다. 또 어쩌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당사자보다도 더 견디기 어려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P 78 나는 오로지 나만의 삶을 갖는다는 즐거움을 위하여 별것 아닌 행동들을 숨기기도 한다.


P 79 <억세고 활동적인 데다가 남의 사정에 궁금해하기보다는 자기 일에 더 골몰하는 그 대단한 백성들의 무리에 섞인 채, 사람의 왕래가 가장 잦은 대도시가 갖추고 있는 편리함은 골고루 다 누려가면서 나는 가장 한갓진 사막 한가운데서 사는 것 못지않게 고독하고 호젓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데카르트의 선택은 적절한 것이었다. 그는 생활을 완전히 개방해놓음으로써 정신은 자기만의 것으로 간직할 수 있었다.


P 84 그때 나는 하나하나의 사물을 아름답게 만드는 비밀을 예찬했다. 비밀이 없이는 행복도 없다는 것을.


P 89 만인에게 감추어진 삶에는 어떤 위대함이 있다.


P 90 달은 우리에게 늘 똑같은 한쪽만 보여준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의 삶 또한 그러하다. 그들의 삶의 가려진 쪽에 대해서 우리는 짐작으로밖에 알지 못하는데 정작 단 하나 중요한 것은 그쪽이다.


P 97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서 도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 그것은 불가능한 일 ─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하여 여행한다고 할 수 있다.


P 98 엉뚱한 인식이야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즉 잊었던 친구를 만나서 깜짝 놀라듯이 어떤 낯선 도시를 앞에 두고 깜짝 놀랄 때 우리가 바라보게 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P 101 내 마음속에 그리움을 자아내는 행복은 덧없는 순간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하고 항구적인 어떤 상태이다. 그 상태는 그 자체로서는 강렬한 것이 전혀 없지만 시간이 갈수록 매력이 점점 더 커져서 마침내는 그 속에서 극도의 희열을 느낄 수 있게 되는 그런 상태인 것이다.


P 145 인도는 비록 정복을 당할지라도 일체의 영향으로부터 항상 벗어났다. 인도는 오직 한 가지뿐인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자신을 세계로부터 소외시킨다는 야심이다.


P 155 인간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반드시 필요한 일이 아닐까?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몫은 바로 인간을 제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만드는 그것이니까……. 폭력에 의하여, 힘에 의하여, 터무니없는 제도에 의하여, 견딜 수 없는 속박에 의하여 인간으로부터 신성이 분출하도록 만들고 있는 것이다.


P 159 인도가 가져온 지적 혁명을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어떤 비현실주의. 우선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그다음에 세계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P 167 최고의 사치란 무상으로 주어진 한 삶을 얻어서 그것을 준 이 못지않게 흐드러지게 사용하는 일이며 무한한 값을 지닌 것을 국부적인 이해관계의 대상으로 만들어놓지 않는 일이다.


P 170 나는 오직 나무들, 하늘, 동물들, 침대, 탁자의 일상적인 되풀이를 통해서만, 육체적이고 자연적인 향수에 의해서만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우리는 항상 어디 가나 우리를 따라다니는 어떤 존재를 우리들의 마음속에 지니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 다른 존재는 단순한 정신적 애착만으로도 가까워질 수 있다.


P 175 여행을 해서 무엇하겠는가? 산을 넘으면 또 산이요 들을 지나면 또 들이요 사막을 건너면 또 사막이다. 결국 절대로 끝이 없을 터이고 나는 끝내 나의 둘시네를 찾지 못하고 말 것이다.


P 176 태양과 바다와 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나 나에게는 보로메 섬들이 될 것 같다. …… 한 번의 악수, 어떤 총명의 표시, 어떤 눈길…… 이런 것들이 바로 ─ 이토록 가까운, 이토록 잔혹하게 가까운 ─ 나의 보로메 섬 들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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