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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Jul 07. 2020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어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아하던 서점이 문을 닫게 되었을 때, 마지막까지 이 책이 남아 있다면 내가 꼭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서점의 마지막 날 나는 아쉬운 마음과 셀레는 마음으로 이 책을 들고 서점을 나왔다.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는 카푸스라는 젊은 시인이 릴케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10번의 답신으로 이루어져 있다. 카푸스의 편지가 담겨져 있진 않지만 릴케의 답신을 통해 그의 편지 속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릴케는 여덟 번의 편지를 통해 젊은 시인에게 내면의 힘에 대하여, 고독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인내에 대하여, 사랑과 슬픔, 죽음에 대한 여러 감정들에 대하여 편지를 썼다. 너무 단순하고 당연한 이야기어서 일상 속에서 놓치기 쉬운 가치들이었다. 아마도 젊은 시인도 그러했으리라. 여러 번 반복적인 내용의 편지를 쓰던 릴케는 아홉 번째 편지에서 그의 답답한 심정을 전하기도 했다.


"이제 당신이 한 말들에 대해 일일이 언급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 모든 것에 대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미 예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것들뿐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릴케는 다시 이렇게 말한다. 


"다시 말해서 다음과 같은 부탁입니다. 마음속에 늘 충분한 인내심을 지니십시오. 또한 소박한 마음으로 믿으십시오. 어려운 것을 더욱더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당신의 고독을 신뢰하십시오. 그리고 그 말고는 삶이 당신에게 벌어지는 대로 놔두십시오. 내 말을 믿으십시오. 삶은 어떠한 경우에도 옳습니다."


스물아홉의 릴케가 쓴 편지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내게도 큰 귀감이 되었다. 아마 우리 모두는 이미 해답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만 깊이 침전되어 있는 그것을 들여다볼 시간과 용기, 인내가 부족한 게 아닐까.






문장 기록


P 22 왜냐하면 어떤 다른 일에서보다도 특히 가장 심오하고 중요한 일들을 결정함에 있어서는 우리 인간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혼자이기 때문입니다. 


P 39 당신이 자연을 향해 다가간다면, 그러니까 자연 속의 소박한 것, 거의 눈에 띄지 않는 작은 것, 느닷없이 커져 측정할 수 없는 것 쪽으로 다가간다면, 당신이 보잘것없는 것들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고서, 주인을 모시는 하인처럼 아주 겸손한 태도로 빈약해 보이는 것들의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한다면, 모든 것이 당신에게 더 쉽고, 당신과 더 한 몸이 되고 그리고 더욱 친근한 관계가 될 것입니다. 


P 40 당신의 가슴속에 풀리지 않은 채로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인내심을 갖고 대하라는 것과 그 문제들 자체를 굳게 닫힌 방이나 지극히 낯선 말로 적힌 책처럼 사랑하려고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당장 해답을 구하지 못하려 들지 마십시오. 아무리 노력해도 당신은 그 해답을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아직 그 해답을 직접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직접 몸으로 살아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P 47 당신은 바로 고독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당신의 모든 길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P 58 단신의 가슴속에서 솟아나는 것에 대해서는 극히 주목하시고, 그것을 당신 주변에서 보이는 모든 것들보다 우위에 놓으십시오. 당신의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당신의 모든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P 68 무언가가 어렵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 일을 하는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P 69 사랑은 개인이 성숙하기 위한, 자기 안에서 무엇이 되기 위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즉 상대방을 위해 자체로서 하나의 세계가 되기 위한 숭고한 동기입니다.


P 75 우리의 사랑은 두 개의 고독이 서로를 보호해주고 서로의 경계를 그어놓고 서로에게 인사를 하는 사랑입니다.


P 80 슬픔의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하여 사람들이 슬픔을 시끌벅적한 곳으로 들고 갈 때, 오히려 그 슬픔은 위험스럽고 나쁜 것이 되는 것입니다.


P 82 우리가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더 조용해지고, 더 인내심을 갖고, 더 마음을 열수록, 새로운 것은 그만큼 더 깊고 더 확실하게 우리의 가슴속으로 들어옵니다.


P 83 즉 낯선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것이었던 것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이 꼭 필요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운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바깥으로부터 우리의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는 사실을 서서히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P 86 모든 것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이 세상의 그 어느 것 하나, 이를테면 불가사의한 것까지도 배제하지 않는 사람만이 상대방에 대한 관계를 무언가 생동감 있는 것으로서 체험하고 또 그 자신의 현존재의 샘물을 남김없이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P 87 늘 어려운 쪽을 향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삶을 이룩해나간다면, 지금 당장은 우리에게 낯설어만 보이는 것도 우리에게 더없이 친숙하고 소중한 것이 될 것입니다.


P 90 당신의 힘의 소모가 많은 것은 다름 아니라 당신이 승리를 너무 과대평가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당신의 느낌이 맞기는 하지만 당신이 이루어낸 "위대한 것"을 꼭 승리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것은, 그와 같은 기만의 자리에 대신 놓을 수 있는 것이 당신에게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P 96 잘 훈련만 시킨다면, 당신의 회의도 당신의 훌륭한 특질이 될 수 있습니다. 당신의 회의는 탐구적이어야 하고 비판적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의 회의가 당신의 무언가를 파괴하려 들면, 그때마다 그 무언가가 도대체 왜 보기 싫은 건지 회의에게 물어보십시오. 그리고 회의에게 그에 대한 증거를 요구하시고, 회의를 시험해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아마도 회의가 할 말을 잃고 당혹해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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