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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현 Feb 25. 2022

가족이라는 세계

까트린 이야기, 빠트릭 모디아노

지금 뉴욕엔 눈이 내리고, 나는 59번 거리 내 아파트 창문 밖으로

맞은편 건물을 건너다보고 있다.



갑작스러운 책 선물은 언제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나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골라준 책, 이 책에는 어떤 마음이 녹아져 있을까. 종이가 누레진 중고책은 1996년 초판 6쇄의 책이었다. 작가 빠트릭 모디아노는 내가 읽은 '어두운 상점의 거리'를 쓴 파트릭 모디아노였다. 세월이 지나면서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조금 부드러워졌다. 작가가 이런 책을 쓸 줄이야, 새삼 신기했고 그림작가가 '장 자끄 상뻬'라는 점도 놀라웠다. 유명한 두 작가의 그림책. 읽기 전부터 벌써 가슴이 두근거렸다.


눈이 오는 어느 날, 뉴욕에서 발레학원을 운영하는 까트린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책이 시작된다. 30년 전, 까트린은 파리에 살았다. 발레리나인 엄마는 고향인 미국이 그리워 떠났고 파리에서 회사를 운영하는 아빠와 둘이 평범한 나날을 보냈다. 까트린은 아빠의 사무실에서 아빠의 동업자인 까스트라드와 거래처 사람 슈브로를 만났고, 발레학원에 다니면서 오딜이라는 친구와 발레 선생님인 디스마일로바 여사를 만났다. 파리에서 기억은 그들과의 소소한 에피소드로 채워져 있었고 이 모든 이야기 속에는 아빠와 늘 함께였다.

 


책을 다 읽은 후 장 자크 상뻬의 그림 속에도 아빠와 까트린은 함께 였고, 늘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아빠와 둘이 몰래 저울판에 올라갔을 때, 아빠가 면도를 할 때마다 비눗방울을 묻히려고 쫓아와서 도망갈 때, 아빠를 통해 안경을 쓰느냐 벗느냐에 따라 세상을 다르게 보는 방법을 배운 모습 등에서 두 사람의 특별한 즐거움이 전해졌다.


아빠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성인이 된 까트린은 여전히 정확히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족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 아니다. 그들만의 추억이 삶 곳곳에 머물러 있다면 충분하다. 아빠에게 배운 세상을 두 세계로 보는 방법은 까트린의 인생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 디스마일로바 선생님에게서 무용을 배우던 시절, 저녁에 있을 무용 강습을 생각해서 낮 동안에 안경을 쓰지 않고 지내는 훈련을 하던 일이 생각난다. 그럴 때면 사람과 사물의 윤곽이 예리함을 잃으면서 모든 것이 흐릿하게 보이고 소리마저도 점점 둔탁해졌다. 안경을 쓰지 않고 보면, 세상은 더 이상 꺼슬꺼슬하지 않았고, 뺨을 대면 스르르 잠을 불러오던 내 커다란 새털 베개만큼이나 포근하고 보들보들했다.(p.8)

- 처음엔 안경을 쓰지 않은 내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 애들에게는 불편할 게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에게 한 가지 유리한 점이 있었다. 안경을 쓰느냐 벗느냐에 따라 서로 다른 두 세계에 살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었다.(p.49)

- 네가 안경을 벗고 있을 때면, 다른 사람들은 너의 눈길에서 어떤 보얗고 다사로운 기운을 느끼게 될 게다. 사람들은 그걸 매력이라고 부르지.(p.50)


나의 삶에도 아빠에게 배운 즐거운 지침이 있다. 바로 책을 읽는 삶이다. 아빠는 어린 언니와 나를 서점에 자주 데려갔다. 그 무렵 아빠의 친한 친구(지금도 친한 친구인지는 모르겠다)가 서점을 열었고 우리는 그곳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었다. 친구의 가게에서 우리가 마음껏 뛰어다니고 책을 읽는데 사주지 않기는 곤란했을 거다. 그 덕분에 지금도 책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닐까. 어쩌면 이런 사소한 일들이 내 삶에 더 많이 존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너무 사소하다며 하찮게 여기진 않았을까, 특별하지 않아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 그래서 쉽게 잊어버린 건 아닐까.


우리 두 사람에게 활기찬 삶을


가족이라는 세계는 그렇다.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해도 나의 내면 깊은 곳에 흔적을 남기어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 닮고 싶지 않은 것까지 닮게 한다. 그러니 우리도 까트린의 아빠처럼 매일 이렇게 말해보면 어떨까. 이 주문이 우리의 삶에 변화를 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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