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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종만 Oct 19. 2020

산의 미덕은 기다림에 있더이다

세월호 품은 진도 동석산

  산악국가 대한민국에는 산이 참 많습니다. 어머니 품 같다는 지리산, 금강산보다 아름답다며 엄지손가락을 꼽는 이들이 많은 설악산, 남한에서 가장 높은 한라산. 이밖에도 덕유산, 태백산, 월출산 등등 저마다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산들이 하나 둘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이번에 펴내는 등산 에세이집을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첫 번째 이야기는 진도 동석산에서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동석산은 경관도 수려하고 조망도 장쾌한 편이지만 해발 219m로 낮을 뿐만 아니라 코스도 비교적 짧아 찾는 이들이 그리 많은 산이 아닙니다. 산림청 선정 100대 명산은커녕 한국의 산하 선정 300대 명산에도 포함되지 못한 산입니다. 다른 산들과는 달리 딱 한 차례 산행을 했던 동석산 이야기로 문을 연 것은 무슨 이유에서였을까요? 수 없이 망설이던 저를 묵묵히 기다려준 고마움 때문이었습니다. 


멀리 팽목항이 보였습니다

  2017년 2월 18일 새벽 마침내 진도 동석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전날 밤 자정 무렵 강남 신사역 5번 출구 앞에서 산악회 버스에 오른 뒤 여섯 시간 가까이 달려온 뒤였습니다. 

  밤새 먼 거리를 달려왔고 새벽이 멀지 않았음에도 제주도, 거제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로 큰 섬 진도는 여전히 캄캄한 어둠에 묻혀 있었습니다. 마침 절기상으로 봄이 들어선다는 입춘과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서 깬다는 경칩 사이 우수(雨水)인 데다 국토 서남단에 위치한 섬이었지만 살을 에는 추위는 내륙지방 못지않았습니다. 

  일행과 함께 날이 밝기 전에 식사를 마치기로 하고 주변을 살펴보니 등산로 입구 들녘에 하얀 비닐하우스가 보였습니다. 수확을 마친 비닐하우스는 다행히 비어있었습니다. 먼저 주인의 허락을 받는 게 예의였겠지만 연락처를 모르니 혹시라도 나중에 주인이 나타나면 양해를 구하기로 하고 서둘러 식사 준비에 들어갔습니다. 

  버너를 켜고 코펠에 물을 부어 라면을 끓이는 동안 서서히 어둠이 물러났습니다. 식사를 마칠 무렵에는 산행에 나서도 될 만큼 사방이 밝아졌습니다. 식사한 자리를 깨끗이 치우고 산행 채비를 마친 후 보이지 않는 비닐하우스 주인을 향해 마음으로나마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강하진 않지만 바람도 불고 기온이 낮아 추위에 떨면서 식사를 한 뻔했는데 비닐하우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동석산 산행 들머리는 지산면 심동리 천종사 입구와 종성교회 입구 두 곳인데, 우리 일행은 종성교회 쪽에서 올랐습니다. 등산로는 마을길에서 벗어나자마자 완만한 산길로 이어졌고, 점차 경사가 가팔라졌지만 그리 길지는 않았습니다. 10여분 만에 거대한 암벽이 길을 막아섰습니다.

  본래 동석산은 해발 219m로 그리 높은 산도 아니고 등산객들이 즐겨 찾는 산도 아니었습니다. 진도에서 먼 수도권은 물론이고 남해지역에서도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산은 낮지만 화산암 계열의 바위산이 전문가가 아니면 오르기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도군에서 계단과 밧줄 등을 설치한 이후 일반인도 안심하고 즐길 수 있는 산행지로 변신했지만 들머리에서 정상까지 약 1.3km 정도 이어지는 암릉은 칼날같이 날카롭고 험하기 때문에 여전히 조심해야 합니다. 자칫 방심이라도 하는 날이면 곧바로 위험이 닥칠 수도 있는데, 실제로 2016년 3월 등산객 한 분이 벼랑 아래로 추락해 소방헬기로 후송했으나 숨지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아직 날이 완전히 밝지도 않았고 곳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코스였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면서 거대한 암벽 뒤쪽에 설치된 가파른 철계단을 조심조심 올라갔습니다. 잠시 후 전망대가 나타났습니다. 산행을 시작한 지 불과 15분여 만이었습니다. 

  전망대에서의 조망은 장쾌하기 그지없습니다. 바로 아래쪽에 우리 일행이 산행을 시작한 산행 들머리가 보이고 그 뒤로 제법 너른 들판이 보입니다. 들녘 사이로 천종사 앞 봉암저수지에서 시작된 수로가 들판을 가로질러 바다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잔잔한 바다 너머 팽목항이 가물가물 다가섭니다. 아 팽목항! 문득 눈가가 뜨거워지기 시작합니다. 


해가 뜹니다, 오늘도 주책없이

  그렇습니다. 오늘 산행의 최종 목적지는 동석산이 아닙니다. 팽목항입니다. 사실 벌써부터 팽목항을 찾고자 했었습니다. 함께 동석산을 찾은 일행 대부분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입니다. 잠시 동석산에 들렀다가 팽목항 가서 조문을 하자는 산행을 제안한 지 보름도 안 되어 좌석이 꽉 찼습니다. 무박산행에 먼 거리를 다녀와야 하는 점을 고려하여 회비가 비싼 우등버스 산행을 제안했음에도 말입니다.  

  산악회 자체에서 기획한 산행이 아니라 이번처럼 일반 회원이 산악회장에게 산행과 제안하는 경우 모객이 쉽지 않아 실제로 산행이 성사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점을 감안하면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이번에 함께 동석산 등반을 기획한 산우들을 제외한 30명의 회원들은 일면식도 없는 분들입니다. 그런데 하나 같이 전망대 멀리 팽목항 쪽을 바라보며 숙연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만 봐도 예감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오래전부터 진도에 한 번 내려와야지 하고 별렀던 수많은 국민들 중의 하나들이었던 겁니다. 

  그렇게 조망을 즐기는 것도 잠시 갑자기 사방에 붉은 기운이 펼쳐집니다. 재빨리 전망대 뒤로 이어진 바위 봉우리 위에 올라서니 천종사와 봉암저수지 뒤쪽 낮은 봉우리들 너머 눈부신 일출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림 같은 일출입니다. 너무 아름다워 속이 다 상할 정도입니다.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이렇게 아름다운 일출이라니. 가슴에 맺힌 미안함을 조금이라도 씻어볼까 내려온 길 끝에서 이토록 향기롭고 아름다운 해돋이를 선사하다니, 이러면 미안함만 더 많이 쌓이는 것을.

  재택근무를 주로 하는 직업 덕분에 세월호 참사 당일 하루 종일 TV를 지켜보며 여느 국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멍이 들도록 답답한 가슴을 치고 있었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이상했습니다. 탑승객을 구조해야 하는 해경 선박과 헬기는 빠르게 침몰하는 세월호 주변을 빙빙 돌기만 할 뿐 구조 활동에 나서지 않았습니다. 

  탑승객들도 이상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빨리 선실을 빠져나와 구조요청을 하는 게 상식인데 선원으로 보이는 장년들 몇 명 외에 학생들의 모습은 거의 보이질 않았습니다. 이상하고 답답했습니다. 당장 달려가 모두 밖으로 나오라고, 나와서 바다에 뛰어들라고, 그렇게 헤엄을 쳐서라도 일단 사지를 벗어나라고, 그러다 보면 해경 선박이든 어선이든 구조하지 않겠냐고, 그렇게 힘껏 외치고 싶었습니다. 

  어디 저만 그랬을까요? TV를 지켜보던 분들 모두 마찬가지 심정이지 않았을까요? 틀림없습니다. 배가 전복되어 침몰하고 있는데, 당장 선실을 벗어나는 건 상식 중의 상식 아닙니까? 당장 나오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오지 않으면 구조요원들이 들어가 데리고 나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정도는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거  아닙니까? 알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가만히 있어라?

  사고 직후 방송을 통해 특히 단원고 학생들을 선실에 머물게 했다는 뉴스를 처음 들었을 때 저는 재빨리 식탁 밑으로 숨었습니다. 금세 벼락이라도 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천인공노할 얘기 아닙니까? 마른하늘에 벼락 칠일 아닙니까? 

  그런데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습니다. 천둥번개는커녕 방귀 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 진도 동석산에 찬란한 일출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주책없이 아름다운 일출이 두려워 다시 식탁 아래 숨고 싶지만 칼날 같은 동석산 암릉에는 숨을 곳이 없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비현실적인 풍광 속을 걸으며

  세월호 참사가 그랬던 것처럼 동석산 산행도 어딘 지 비현실적인 느낌이 들었습니다. 비극의 현장을 묵묵히 지켜보았을 암릉길에서 만나는 조망이 어찌 이렇게 하나 같이 장쾌한 것인지, 정말 이곳이 속세인지 아닌지, 신선들만 산다는 별유천지 비인간, 무릉도원이 바로 여기가 아닌지.

  그러나 경이로운 풍광에 너무 깊이 젖어들다가는 실제로 아찔한 순간을 맞을 수도 있으니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특히 동석산 칼날 능선 구간은 너무 날카롭고 위험하기 때문에 왼쪽의 우회로를 이용하는 게 좋습니다. 

  곧바로 칼날 능선 북봉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에 비해 한참을 내려섰다가 다시 올라가는 코스가 마땅치 않을 수도 있지만 괜한 호기를 부려선 안 됩니다. 지나친 자신감은 때로 스스로 위험을 자초하는 첩경이 될 수도 있으니 시간이 다소 걸리더라도 가파른 경사로에 설치되어 있는 밧줄 등을 이용해 안전산행을 이어가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렇게 우회했다가 다시 올라선 전망바위에서의 조망은 더욱 비현실적입니다. 코뿔소 코처럼 툭 튀어나온 봉우리 위에 서면 부엌칼을 엎어놓은 듯 날카로운 칼날 바위와 그 너머 솟아있는 암봉들과 멀리 진도 앞바다까지 어우러지면서 장관을 연출합니다. 일출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하늘빛 아래 까치발을 한 것 같은 이름 모를 봉우리들 사이 바둑판 모양의 들판도 정겹고 신비롭습니다. 

  비현실적인 조망을 잠시 뒤로 하고 5분여 오르막을 오르면 마침내 동석산 정상입니다. 타원형 모양의 정상석 뒤로 세방낙조 전망대로 이어지는 암릉길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미 지나쳐온 능선에 비하면 한결 편하고 순한 길입니다. 그 길을 따라 30여분 걸으면 삼각점이 있는 230.9m 봉이 나타납니다. 지나온 남쪽의 암봉과 암릉 대부분을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암릉길이 끝나고 평범한 능선길이 이어집니다. 멀리 조망되는 작은 애기봉, 큰애기봉을 보면서 완만한 능선길을 걷다 보면 쉬어가기 좋은 헬기장이 나타나고 이어 사거리인 가학재가 코앞입니다. 

  가학재 지나 세방낙조 전망대 가는 길 왼 편으로 전망 좋은 촬영 포인트가 한 곳 있는데 그냥 지나치기 쉬우니 주의해야 합니다. 푸른 바다 위 크고 작은 섬들이 올망졸망 떠 있는 모습이나 황홀한 낙조가 그 어느 전망대보다 멋지게 조망되는 곳이라 놓치면 후회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동석산 산행 날머리로 삼은 세방낙조 전망대 주차장까지는 계속 내리막길입니다. 중간에 큰애기봉 전망대에 들르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경사도 심하지 않고 길도 잘 정비되어 있어 일행은 약속했던 것보다 일찍 주차장에 도착했습니다. 

  최대한 게으름을 피우며 슬렁슬렁 걸었음에도 기상대가 선정한 한반도 최남단 최고의 낙조 조망지인 세방낙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오전 10시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 만큼 산행은 힘들지 않았습니다. 뛰어난 암릉미와 경쾌한 조망과 아기자기한 코스를 생각하면 산행 자체는 다소 싱거웠다 할 것입니다. 


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요?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일행들은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촬영하거나 카페에서 뜨거운 커피를 사 마시면서 시간을 때웠습니다. 이미 다들 도착했기 때문에 서둘러 팽목항으로 향할 수도 있었지만 기사님이나 회원님들 누구도 독촉하는 기색이 없습니다. 가긴 가야 하는데 하면서도 내심 가기 싫은 표정들을 숨기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더러 너무 일찍 도착했다는 낭패감으로 표정이 어두운 이들도 보였습니다.

  하긴 이런 감정이 낯선 것도, 이날만 그랬던 것도 아닙니다. 아마 참사 당일부터 줄곧 그래 왔을 겁니다. 반드시 찾아가긴 찾아가야 하는데 도무지 면목도 없고 너무 참담해서 엄두가 나지 않는 마음. 어디 동석산을 찾은 우리 일행들뿐이었겠습니까? 국민들 모두 그랬을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고요. 

  실제로 참사 직후부터 틈나는 대로 팽목항을 찾으려 했지만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작은 도움의 손길이나마 보태고 싶었지만 마음과 달리 발이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참사가 발생한 해에 여수에 소재한 정유회사 엔지니어로 취업한 아들을 만나기 위해 수시로 여수를 드나들면서도, 평소 자주 어울리는 산우들과 진도에서 가까운 영암 월출산이며 장흥 천관산 등을 오르내리면서도, 정작 진도는 찾지 않았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무 미안하고 너무 속상해서 본의 아니게 진도를 외면했던 것이지만 그렇다고 스스로 이해하거나 납득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나 아니더라도 가서 돕는 분들도 많은데 뭐, 일도 바쁜데 나중에 가지 뭐, 진도 근처에 왔지만 일정과 코스가 다르니까 다음에 들러야지 뭐, 끊임없이 핑계를 만들어내면서 한 편으로는 미안해하는 나날을 이어나갔습니다.

  솔직한 심정은 두려움이었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유가족들을 대할 자신이 없었습니다. 당시 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까지 다녀와 취직을 했지만 늦게 낳은 딸아이는 단원고 학생들과 같은 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습니다. 역시 학교에서 제주도 수학여행이 계획되어 있었지만 세월호 참사로 인해 취소되었습니다. 

  단원고 학생들 대신 우리 딸아이와 급우들이 그 배를 탔으면 어땠을까요? 한편으로 우리 아이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매일 같이 바다를 바라보며 자식이 돌아오길 학수고대하는 유가족들을 떠올리면서 돌덩이처럼 무겁고 답답한 마음에 자주 가슴을 쳐야 했습니다. 미사 봉헌에 앞서 지난 잘못을 반성하는 의미로 제 탓이요, 제 탓이요, 저의 큰 탓이옵니다를 외치며 가슴을 쳐대는 것처럼 말입니다.

  참사가 발생하기 한 해전 친한 벗들과 같은 배를 타고 제주도에 가서 한라산을 등반했던 추억도 공포로 상기되곤 했습니다.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제주도로 타고 가던 배가 갑자기 침몰하면서 잠들어 있는 선실로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꿈. 밖으로 나가려고 선실 문을 밀어 보지만 굳게 잠긴 듯 문이 열리지 않는 꿈. 그러니 내가 아니라 다행이었다는 생각은 당초부터 가당치 않은 것이었습니다. 


한 방울 눈물로 꽃은 피우더라도

  약속시간을 지켜 출발하는 것으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다소라도 진정시키고자 했지만 이런 꼼수는 통하지 않았습니다. 출발한 지 10분도 안 되어 도착한 팽목항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했으며 팽팽한 긴장감에 심장은 오그라 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반겨준 것은 휭 하니 스쳐가는 차가운 바닷바람 속에서 멀리 동석산 암릉을 배경으로 두 팔 벌려 서 있는 철제 십자가상이었습니다. 녹슨 쇳덩어리로 대충 만들어 세운 것 같은 십자가상이 정교하지도 않고 날것 그대로라 더욱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십자가 중앙엔 예의 노란 리본이 낙엽처럼 붙어있습니다.

  일반 조문객들을 위해 작은 컨테이너 박스에 마련해 놓은 빈소를 찾았습니다. 미수습자를 가족 품으로, 잊지 않겠습니다, 같은 문구가 적힌 나무기둥 몇 개가 상주를 대신해 맞아주는 빈소 한쪽 벽에는 참사로 목숨을 잃은 피해자들의 영정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2014년 4월 16일 476명의 승객을 태우고 제주도로 향하던 6,000톤 급 대형 여객선 세월호가 아직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는 원인불명의 사고로 허망하게 침몰한 이후 극적으로 귀환한 172명 외에 결국 돌아오지 못했던 304명입니다. 다시 한 번 감정이 북받치고 입에 담기 어려운 육두문자들이 목구멍 바로 아래까지 치밀러 올라옵니다. 

  하지만 신성한 장소에서 예의를 다하는 자리에 육두문자를 쏟아낼 수는 없습니다. 대신 순서대로 향을 바치고 두 번씩 절을 했습니다. 긴 시간 기도를 바치며 예의를 다하는 분들도 보였습니다. 

  왈칵 쏟아지는 눈물을 참지 못하는 분들도 적지 않았지만 소리 내어 흐느끼지는 못했습니다. 차마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살아남은 주제에, 대신 죽어줬을지도 모를 망자들 앞에서, 과연 무슨 염치로 함부로 슬픔을 표시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한 방울 눈물로 망자들을 위한 꽃을 피울 수 있다 해도 죄스런 마음을 달래선 안 될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자꾸 쏟아지는 눈물과 가슴에 맺힌 죄스러움을 퉁치고 싶은 마음이 너무 염치없는 것 같아 서둘러 빈소를 벗어났습니다.

  주차장에 마련된 빈소를 떠나 방파제로 향하는 일행들 머리 위로 무서운 소리를 내며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뺨을 때리는 거센 바람에 고개를 숙이고 걷는 동안 이상하게 마음이 편했습니다. 바람이 거셀수록 추위가 심할수록 마음은 편안합니다. 물론 이 역시 조금이라도 송구한 마음을 탕감받고 싶어 하는 마음속 꼼수인 것을 모르는 일행들은 없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기적을 만듭니다

  방파제 난간에는 노란 리본들이 촘촘히 묶여 있습니다. 본래 노란 리본은 가수 Tony Orlando가 부른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d oak tree라는 노래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남자가 고향으로 가면서 사랑하는 여자에게 아직도 자기를 잊지 않고 기다린다면 고향 어귀 떡갈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 달라는 편지를 쓴 데서 유래한 것이죠. 남자는 긴가민가하며 고향으로 갔지만 떡갈나무 가지엔 수백 개의 노란 리본이 묶여 있더란 것이죠.

  바람에 펄럭이는 노란 리본 사이를 걸어 방파제 끝까지 걸어갔습니다. 사랑하는 남자가 돌아온다는 소식에 밤새도록 노란 리본을 만들어 떡갈나무 가지에 걸었던 여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비록 금의환향하는 게 아니라 감옥에서 풀려나 돌아오는 처지지만 어쨌든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서 돌아오니 말입니다.

  하지만 방파제 난간에 매달려 비통하게 울부짖는 노란 리본 사이를 걸으면서 그 여자와 같은 행복감은 영원히 느끼지 못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물론이고 그동안 이곳을 찾았던 이들, 아니 유족들까지도. 너무 멀고 너무 아득한 곳으로 떠났으니까요, 사랑하는 우리 희생자들 모두는.

  그럼에도 이거 한 가지는 믿었습니다. 간절한 마음들이 모이면 더러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것.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습니다. 마침내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유가족들이 그토록 바랐음에도 무능한 데다 몰염치했던 지난 정부의 거의 의도적인 외면 속에 방치됐던 세월호 선체 인양과 참사에 대한 진상조사가 재개되기에 이른 것이었습니다.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이 담긴 촛불 덕분이었습니다.

  물론 유사 이래 최초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촛불집회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 차원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치며 스스로 비정상을 자행한 지난 정부의 적폐 청산 여망이 촛불의 동력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광장을 채운 수많은 촛불 안에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규명에 대한 염원도 분명 담겨 있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특히 참사 당일 사라진 7시간 이후 세월호가 완전히 가라앉은 다음에야 부스스한 얼굴로 안전행정부를 방문, 뜬금없이 학생들이 모두 구명조끼를 입었는데 그렇게 찾기가 어렵냐고 물어 전 국민을 경악시켰던 그녀의 부스스한 얼굴을 기억하는 국민이라면 지난 정부의 적폐를 상징하는 핵심이 세월호였음을 결코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노자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疎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너무 크고 커서, 성긴 듯 보이지만 결코 빠뜨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살다 보면 정말로 악행을 많이 저지르는 사람인데 천벌은커녕 부귀영화를 누리며 천수를 다하고 가는 것처럼 보이는 이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착각일 뿐입니다. 언젠가는 꼬리를 잡히고 죄과를 받게 됩니다. 이승이 아니라면 저승에 가서라도 벌을 받습니다. 아주 운이 좋아 이번 생에서는 피할 수도 있겠지만 다음 생에는 어림없는 말입니다. 자손이 대신 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야 할 것입니다. 분명 그럴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방파제를 떠나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으로 향했습니다. 조금 전 방파제로 오는 동안 그랬던 것처럼 주차장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 억센 바람과 추위가 기승을 부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도 힘들지 않았습니다. 희생자들과 유족들에게 미안했지만 어느 정도 홀가분한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차가운 바람에 벌겋게 뺨이 달아오른 일행을 태운 버스는 식당을 찾아 진도읍내로 향했습니다.


추신 또는 사족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진도는 대다수의 국민들로부터 잊고 싶은 섬이 되고 말았습니다. 너무 가슴이 아프고 미안해 일부러 외면한 것도 있지만 그토록 큰 슬픔을 당한 곳에 가서 놀고먹는 게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진도도 건강한 일상으로 복귀해야 합니다. 우리가 진도대교를 건너지 않는 것이 조의를 표하는 거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도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고 기피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참사 이후 누구보다 깊은 상처를 입은 섬이 진도이고 진도 주민들입니다. 반 토막 난 관광수입으로 지역경제가 바닥을 헤매고 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찾아가 아름다운 진도를 즐겨야 할 것입니다.”

  한 종편 프로그램을 통해 유시민 작가가 한 말입니다. 유시민 작가의 말은 방송을 탄 후 많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진도군민의 고통에 조금이라도 동참하고 싶다면 진도를 많이 찾아가 그 매력을 세상에 널리 알리자는 호소에 동참하는 발길도 늘고 있다고 합니다. 

  진도를 찾은 발길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은 아마도 팽목항이 아닐까 합니다. 이후 취향이나 관심사에 따라 진도 곳곳에 자리 잡은 명소들을 찾아보겠지만 결코 빼놓아선 안 될 곳들이 적지 않습니다. 섬을 육지와 연결해주는 진도대교는 진도 여행의 관문이며 최고의 관광지입니다. 진도대교 입구에 마련된 승전광장(진도타워)은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을 계승하고자 만든 상징물로 진도 일대를 조망하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현대판 모세의 기적을 체험할 수 있는 비의 바닷길도 발길을 잡아채지만 매년 4월 말에야 고군면 회동리와 의신면 모도 사이 약 2.8km의 바닷길이 조수간만의 차이로 열리는 기적을 연출, 다른 계절에는 볼 수 없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그 아쉬움을 풀 곳으로는 조선시대 남화의 대가인 소치 허련 선생이 여생을 보낸 화실 운림산방이 적격입니다. 연못과 정원의 조화가 빼어나 영화 <스캔들, 조선남녀상열지사>를 촬영하기도 했습니다. 고려시대에 쌓았으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남도석성과 신라시대 도선국사가 창건한 쌍계사도 반드시 찾아가 볼 만한 곳입니다. 


  *** 2017년 3월 10일 박근혜 전 대통령이 파면되었습니다. 12일 후인 3월 22일 세월호 인양작업이 시작되어 참사 1,091일 만인 4월 11일 세월호 육상 거치 작업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이후 3차례에 걸친 수색 작업을 통해 당시 미수습자로 남았던 9명 가운데 4명의 유해를 수습해 가족 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작업자 안전을 위해 세월호를 똑바로 세우는 직립에 성공한 이후 미수습자 5명에 대한 수색에 전념했지만 끝내 찾지 못하고 유족들의 의견에 따라 2018년 10월 19일 수색작업을 종료했습니다. 한편 2020년 7월 10일 서울고법 형사 6부(재판장 오석준)는 국정농단 사건과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상납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총 징역 20년을 선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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