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 출판계의 대선배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특별한 이유는 없이 혼자서 예술가의 초상이라는 이름으로 주간 프로젝트를 하고 있다. 엄밀하게 말해서 격주에 하나씩 하고 있으니 주간이라는 단어는 슬쩍 지워야 할 것 같다. 변명을 조금 하자면 일주일에 한 장, 좋아하는 혹은 관심 가는 예술가를 선택하고 그 초상화를 매번 비슷한 형식으로 그리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간단한 영상으로 만들고 그것에 대한 글까지 쓰려고 하다 보니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다. 특히 '흥미로운' 영상으로 만드는 것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영상을 만지는 시간이 꽤 길다.
* 그리는 과정 영상 https://youtu.be/N2Bg_JuyMS8
*유튜브를 시작하고 고전 분투하고 있는 이야기는 https://brunch.co.kr/magazine/subscribeme에 아주 천천히 올리고 있다.
나름의 기준으로 한 예술가를 선택해서 공부하고 그릴 지 고민하는 시간도 일단 필요하다. 사실 이 프로젝트는 나의 학습과정을 기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저 유명한 작품, 몇 장의 그림으로만 알고 있던 작가 이름, 그 그 명성 뒤의 삶과 작품관 등을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려고 하는 노력의 일부이다.
그래서 이번 초상화의 주인공은 베아트릭스 포터로 결정했다.
진짜 유명한 영국 작가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베스트셀러 작가. 생전에 이미 본인의 책으로 큰 성공을 거둔 작가라, 보통의 많은 작가가 겪었을 경제적 어려움 없이 창작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저 부럽기만 했다. 인상 깊은 파란 재킷을 입은 피터 래빗을 그렸고, 지금도 여전히 세계적으로 두터운 팬덤을 갖고 있는 작가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다 몇 년 전 '미스 포터'라는 제목으로 베아트릭스의 삶이 영화화되었을 때, 그 영화를 보고 작가에 대해서 더 큰 관심을 갖게 되었다.
어쨌든 나는 베아트릭스 포터가 성공한 베스트셀러 작가라서 이번 예술가의 초상 시리즈에 포함시킨 것은 아니다. 혼자만의 프로젝트지만, 나름의 기준이 있다.
셀프 퍼블리싱 (Self-publishing)
셀프 퍼블리싱, 보통 우리에게는 독립출판이라는 말로 더욱 친근한 개념이다. 최근 글, 그림, 사진 등 다양한 창작 활동을 하는 개인들이 부쩍 관심을 갖고 있는 분야. 나 역시 독립출판에 대해서 몇 년 전 처음 접한 뒤에 나의 그림으로 진(zine) 형태의 책을 만들었고 그 뒤로는 글과 드로잉을 엮어서 시리즈로 드로잉북을 만들고 있다. 물론 마지막 4번째 책을 2년 전에 만들었으니 새 책을 준비할 시기가 오긴 했다. 놀랍게도 베아트릭스는 독립 출판계의 대선배였다. 여러 출판사로부터 거절당한 베아트릭스는 결국 자신의 첫 책을 자가로 출판한 것이다.
베스트셀러 작가의 시작이 독립출판이었다니!
아, 베아트릭스는 우리 중에 한 명. 대선배님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환경에 관심이 많았던 베아트릭스는 식물과 동물을 가까이서 관찰했고 그 과정에서 그리는 것도 자연스럽게 시작했다. 덕분에 자연과학에도 관심이 많아서 실제로 학술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고 한다. 섬세한 일러스트와 함께 정리된 논문은 꽤 흥미로웠지만 당시 남성 중심의 사회였기에 여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논문을 들고 직접 발표할 수 없었다. 꽤 풍족한 집안에서 태어난 베아트릭스였지만, 19세기 남성 중심 사회가 지닌 벽에 부딪힌 것이다. 부모가 바라는 상류 계급의 여자로 그저 교양을 쌓고 적당한 가문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믿는 시대에 살았다.
시대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베아트릭스는 정말 남다른 사람이었다. 자연 과학계로 입문을 하는 것은 실패했지만, 탁월한 스토리텔러였던 베아트릭스는 자신이 창조한 아니 (자신이 만나) 동물들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로 그림책을 만들기로 했다. 줄줄이 많은 출판사에게 거절을 당했던 베아트릭스는 결국 자신의 힘으로 첫 책을 만들어 버린다. 심지어 이 작가는 자신의 책의 사이즈와 인쇄 방식도 뚜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작가가 적극적으로 독자를 고려하여 책의 사이즈와 인쇄 방식까지 생각하는 것, 정말 독립 출판계의 대선배님답다. 게다가 베아트릭스는 캐릭터를 상품화하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다. 자신의 동물 캐릭터들을 인형으로 만들고 다양한 생활 소품뿐만 아니라 보드 게임까지 만들었다. 단순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캐릭터와 이야기가 가진 확장성을 꿰뚫어 보고 실제로 직접 적극적으로 굿즈 사업에 뛰어들었다니, 아마 베아트릭스가 오늘날 작가 생활을 하고 있다면 어느 북페어나 마켓에서 셀러로 만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베아트릭스가 어쩐지 가깝게 느껴졌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고 다양한 방식으로 그 이야기를 전달하려고 했던 베아트릭스. 그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자신의 부모도 그 길에 대해서 응원해주지 않았지만, 참 독립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계속해나갔고 마침내 경제적으로도 성공한 작가였다.
아, 선배님 존경합니다.
나는 존경의 마음을 담아서 그림을 그렸다.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베아트릭스 포터의 박물관과 작가의 집이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 가보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쉽다. 유학 당시에는 생활비도 넉넉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언제가 나는 베아트릭스 선배가 사랑했던 그 자연을 직접 보러 가고 싶다. 자연스레 약간의 질투심이 유발되긴 하지만, 나도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 더 싶이 고민하고 꾸준히 하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하는 희망이 살짝 보이는 것 같다.
** 핸드폰 배경화면을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느릿느릿 다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
유튜브 : http://youtube.com/thedrawingh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