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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Drawing Hand May 04. 2021

003. 쇼핑데이

한국어 수업, 산책, 쇼핑.

요즘 내가 집 밖으로 나가는 세 가지 이유다. 한국어 수업은 4개인데 대면 수업이 있는 화요일과 수요일에만 학원에 가면 된다. 산책은 보통 수업이 없는 평일과 주말에 점심 혹은 저녁을 먹고 집에서 3분 거리의 공원을 걷는다. 요즘은 수업이 없는 평일도 할 일이 제법 있어서 산책을 나가지 못한다. 대신 주말에는 꼭 산책을 하려고 노력한다. 주말 산책에는 당근이 따라온다. 공원 반대쪽에 있는 카페에 가서 마시는 커피 한 잔. 덕분에 산책이 기다려지는 주말이다. 쇼핑은 대게 식료품을 사러 슈퍼마켓에 간다. 옷은 세일 기간에 맞춰 사기 때문에 일상에서는 일주일에 소비할 식료품만 사면 충분하다.


하지만 가끔 특별한 쇼핑이 필요한 날이 있다. 어제가 바로 그 날이었다.

한국어 온라인 수업이 있는 날이지만  한 수강생의 요청으로 이번 주 수업 시간을 갑자기 바꾸기로 했다. 정해진 일정을 바꾸는 건 달갑지 않지만 직장을 다니고 아이도 있는 나와 비슷한 또래인 그 학생의 처지는 잘 이해할 수 있기에 너그러워질 수 있다. 물론 다른 수강생의 동의를 받는 건 필수. 그렇게 갑작스레 생긴 월요일 오후의 여유가 우리에게 쇼핑데이를 허락했다.


걸어서 15분이면 도착하는 이 작은 도시의 중심, 그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설렌다.  몇 주전에 학원 원장이 단체 채팅방에 알려준 새로운 아시안 가게 'Tokyo'도 들렸다. 결론은 대실망. 나는 일본의 돈키호테급은 아니더라도 아기자기 잡화점을 기대했는데, 일본 향만 정말 아주 살짝 날 뿐이다. 다양한 아시아의 나라들이 이 곳에서는 정체성을 잃고 미지근하다.


쳇, 우리 그냥 플라잉 타이거나 가자!

'플라잉 타이거 코펜하겐'이라고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있는 덴마크 체인이다. 아기자기한 것들이 많아서 문구점 같아 보이지만 덴마크 다이소 같은 느낌이랄까? 다양한 물건이 있지만 매우 특별한 건 없다. 비토리아에도 이미 여러 군데 있는 중국 상점에 가도 비슷하게 일상에 필요한 다양한 것을 저렴하게 살 수 있다. 반면 플라잉 타이거는 물건의 수는 적지만 브랜딩과 패키지 덕분에 더 귀여운 느낌이다. 디자인이 중요해지는 대목이다. 그 앞을 지나게 되면 시간이 촉박하지 않는 한 특별히 필요한 것이 없어도 일단 들어간다. 이 도시 아니 이 스페인 전체에서 유일한 나의 쇼핑 친구는 시큰둥하지만 상관없다. 몇 달 사이에 신상이 많아졌다. 천천히 모든 상품에 눈길을 주어야 하기 때문에 주의 집중이 필요하다. 나의 쇼핑 메이트는 핸드폰을 보면서 졸졸 나의 뒤를 쫓는다. 내 손에 물건이 넘치면 자연스럽게 받아준다. 그리고 마지막 계산대에 가까워지면 나를 앞지른다. 쇼핑 봉투는 필요 없다. 쇼핑데이의 필수품인 가벼운 캔버스 가방을 하나씩 챙긴 우리다.


흡족한 쇼핑 데이의 성과. 무선 노트 2권, 그림 카드게임, 워터 브러시 1세트. (2자루가 들어있다.)


무선 노트는 이미 몇 달 전에 사서 스페인어 공부 노트로 한 권 쓰고 있는데 무선이라서 일단 좋다. 학습 필기는 유선 노트가 장점이 많지만, 무선 노트 성애자는 그냥 무선이 좋다. 드로잉북이 아닌 필기용으로 찾으려면 어쩐지 찾기가 힘들다. 문구 천국 우리나라가 그리워진다. 그래서 일단 사서 써봐야 한다. 스페인어 공부하면서 써 본 결과 종이도 비교적 도톰하고 필기하는 느낌이 좋다는 걸 확인했기에 의심 없이 2권을 미리 챙겼다. 권당 3유로니까 총 6유로.


그림 카드게임 세트는 한국어 수업할 때 자연스러운 대화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샀다. 나를 이 학원에 소개해준 친구가 수업할 때 그림카드를 활용하는 것을 보고 힌트를 얻었다. 똑같은 그림 카드는 아니지만 이미 플라잉 타이거에서 구입한 다른 그림카드도 잘 쓰고 있는 중이다. 욕심은 언어 학습용 그림 카드를 한번 만들어 보고 싶지만 제작을 생각하니 인쇄비 비싼 이 나라에서 하긴 힘들 것 같으니 일단 저렴한 것을 사서 쓴다. (하지만 언젠가는 해보고 싶다.) 카드 게임 가격 3유로.


워터 브러시는 1세트에 2유로. 한 자루에 1유로니까, 1400원 정도인가? 예전에는 워터 브러시는 미술 전문 브랜드에서만 볼 수 있었다. 몇 년 전부터 내가 즐겨 쓰는 워터 브러시만 해도 오늘 산 이 워터 브러시에 비해서 가격이 3배나 더 비싸다. 물론 그거보다도 비싼 워터 브러시는 많다. 비싼 미술 재료가 비싼 이유가 있다. 그렇지만 가격이나 품질에 상관없이 내가 쓰려는 목적에 잘 맞으면 그뿐이다. 각기 나름의 용도와 매력이 다르니까 그걸 쓰는 내가 잘 골라야 한다. 이 저렴한 워터 브러시는 실험적으로 활용해 볼 생각이다.


정말 필요한 것만 사는 것이 현명하다는 건 알지만 당장의 필요성이 아닌 활용 가능성만 고려한 쇼핑도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나요?


11유로, 만 오천 원의 행복.

쇼핑데이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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