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The Drawing Hand May 06. 2021

005. 전용 머그컵

아침부터 설거지를 했다. 집안일 대부분이 그렇듯 설거지는 꼭 해야 하는 일이지만 하면서 즐기기는 어렵다. 더욱이 우리 집 설거지 담당은 엄연히 식기 세척기와 남편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한 건 아니다. 우리 엄마가 대주주인 친정 주방에는 예전에도 지금도 식기 세척기가 없다. 스페인에 와서 평생 처음으로 내 지분이 가장 높은 주방을 갖게 되었지만 주방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 엄마와 닮았다. 처음에는 식기 세척기가 못 미더웠다. 제대로 씻기는 건지, 전기며 세척기용 세제며 돈만 더 드는 건 아닌지. 잘 모르니까 괜한 걱정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걱정은 식기 세척기와 함께 설거지를 담당하는 남편에게 오롯이 맡기기로 했다. 이제 1년 반쯤 같이 살면서 자연스럽게 이뤄진 역할 분담이다. 의심 많은 나와는 달리 남편은 식기 세척기를 믿고 잘 활용한다. 설거지가 남편의 몫이 된 이유다. 식기 세척기도 힘껏 돕기는 하지만 언제나 남편의 손을 거쳐야 하루의 설거지가 끝난다. 모든 식기가 세척기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깨지기 쉬운 그릇도 있고 양식용 식기 통에 넣었다가는 쏙 빠져나가는 젓가락도 있다. 특히 매일 점심 커피를 담당하는 모카 포트는 흐르는 물에 손으로 잘 씻어서 건조대에 잘 놓아야 한다. 어젯밤에도 평소처럼 남편이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미 침실로 들어온 나는 듀오링고(어학공부용 앱)로 스페인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곧이어 들어온 남편이 말했다.


네가 좋아하지 않을 일이 생겼어.
무슨 소리야?
설거지를 덜 했어.


무슨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는 모습이 좀 귀엽지만 이럴 때는 연기가 조금 필요하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알고 보니 범인은 축구. 챔피언스리그, 첼시와 레알 마드리드가 문제다. 늦게까지 챔피언스리그 준결승 경기를 보고 나서 설거지를 시작했지만 뒷마무리를 덜 한 모양이다. 짐짓 실망한 내색을 하니, 아침에 일어나서 하겠다며 알람을 30분이나 앞당겨서 6시에 맞춘다.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렸지만 듣지 않는다. 오늘 아침 6시에 울리는 알람을 곧바로 끄더니 그대로 다시 잠든 당신. 예상된 결말, 괜찮다. 어젯밤 잠들기 전에 이미 내가 아침에 설거지를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솔직히 어제 설거지를 오늘 저녁까지 미뤄도 큰 상관은 없다. 어차피 집안일은 누구의 몫이 아니라 나눠서 하는 것. 서로의 담당 영역에는 굳이 마음 상할 부정적 피드백을 하기보다는 서로에 대한 고마움만 표현하면 충분히 평화롭다고 생각한다. 점심 담당인 내가 요리 준비를 하려면 깨끗한 주방이 좋긴 하지만 하루 정도는 한쪽에 밀어 둬도 괜찮다. 4주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4주 전, Ama가 우리 집에 오셨다. 항암치료도 시작하셨다. 바스크어로 엄마를 Ama라고 하는데, 덩달아 나도 시어머니를 Ama라고 부른다. Ama가 항암치료를 받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우리 집에서는 셋이서 함께 산다. 같이 살지만 아침은 제각각이다. 7시 30분 전에 출근하는 남편은 남편대로, 7시 전에 작업실에서 하루를 시작하는 나는 나대로의 아침이 있다. 우리 집 뉴 멤버, Ama는 보통 8시 전후에 일어나시는데 아침 식사로 보통 바나나 하나, 키위 하나, 사과 하나, 커피 대용 곡물차 에코 한 잔을 천천히 드신다. 복용해야 하는 약이 많아 Ama에게는 식사도 중요하다. 처음에는 내가 챙겨드려야 하나 싶었지만 본인이 직접 하시는 걸 원하시기에 그냥 두기로 했다. 아침이라고 며느리라고 내가 해야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특별히 없다.


오늘 아침 작업실에서 30분 정도 아침 일기를 쓰고 부리나케 주방에 가서 남은 설거지를 했다. 어젯밤 남편이 남긴 설거지 거리 중에 Ama의 머그컵이 있기 때문이다. Ama의 머그컵은 이니셜인 'A'(Ama의 이름은 'Ange')와 잔잔한 풀꽃이 그려져 있다. 우리 집에 있는 머그컵 7개 중에서 가장 새 것이다. 지난 일요일 어머니의 날을 맞아 우리가 Ama에게 선물했다. Ama의 전용 머그컵부터 씻어서 싱크대 바로 옆 건조대에 얹어 두고 과일을 담을 작을 접시도 높은 찬장에서 하나 꺼내 머그컵 가까이 두었다. 마음이 한결 편하다. 


잠시 머무는 손님에게는 전용 머그컵이 필요 없지만, 같은 집에서 일상을 보내는 가족에게는 각각 전용 머그컵이 있어야 한다. 나와 남편에게는 이미 1년 넘게 쓰고 있는 전용 머그컵이 있다. 누군가는 수많은 머그컵 중에서 무엇을 고를까 고민하는 순간을 즐길 수도 있겠지만, 나는 아침에 쓰는 머그컵만큼은 생각이 다르다. 그 날 처음으로 마시는 따뜻함을 아무 머그컵에 담는다는 건 어쩐지 슬프다. 어떤 공간이든 정말 '우리 집'처럼 느껴지려면 소소하더라도 무엇이든 내 것이 곳곳에 있어야 한다. 호텔방이 편하고 좋아도 우리 집은 될 수 없다. 아무리 넓고 깨끗한 숙소라도 내 짐이 들어 있는 여행 가방만 제외하면 온전한 내 것이 아니다. 임시 거처. 잠시 머무는 공간과 그곳에 놓인 모든 사물에게서 진한 낯섦을 느낀다. 낯섦은 매력적이다. 그래서 우린 매번 여행을 떠난다. 특히 요즘처럼 여행을 갈 수 없는 상황에는 더욱 간절하게 낯섦이 그립다. 하지만 여행이 아닌 일상은 좀 다르다. 낯섦과는 다르다. 매일 비슷한 일상에서는 하나의 머그컵이라도 온전한 내 것으로 시작하는 하루가 좋다. 삶을 항상 내 것으로만 내가 바라는 것으로만 채울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아침을 시작하는 머그컵은 내 전용이다. 이케아에서 사 온 특별한 그림이 하나 없는 연핑크 머그컵도 내 전용이 된 순간부터 나의 하루를 함께 시작하고 있다. 커피, 홍차, 녹차의 흔적으로 그때마다 다른 선택으로 색은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지금도 이 글을 쓰는 내 곁에서 오늘의 두 번째 연한 커피를 품고 있다. 


굿모닝!

Ama의 인기척과 함께 들리는 아침 인사. 

우리 세 사람의 오늘 하루도 각자의 전용 머그컵과 함께 순탄하게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004. 어린이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