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니니 벨라
안녕, 에디터H다. 오늘은 내 음주 역사를 한번 읊어볼까 한다. 갓 스무 살이 된 내게 거나하게 취하는 것처럼 근사한 비행은 없었다. 친구들과 남가좌동을 골목골목 쏘다니며 매일같이 술을 마셨다. 쓰디쓴 소주를 한 입에 털어 넣는 내 모습이 어찌나 멋있던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엔 소주 두 병은 거뜬하다며 되먹지 않은 객기까지 부렸으니까. 술잔을 부딪히면 연애가 시작되고 연애가 끝났다. 20대의 술자리는 온통 즐거운 일 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직장인이 됐다. 그때부턴 술자리가 즐겁지 않았다. 2010년이었나. 그 무렵엔 아주 작은 회사에 다녔다. 지금은 사라졌을 만큼 조그만 곳이었다. 매일 사무실을 나서며 내가 보잘 것 없는 년이라는 생각을 했다. 퇴근길엔 석촌호수를 바라보며 걸었다. 롯데월드에 놀러온 사람들은 밤에도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나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괜히 배알이 꼴리고 술이 고팠다. 그렇지만 친구들을 만날 기분은 아니었다. 그 때의 나는 술과 술자리를 분리해서 생각할 줄을 몰랐다. 혼술이라는 말도 없던 시절이다. 혼자 술을 마시는 건 어쩐지 무서웠다. 그러다 잠실 롯데마트에서 이 술을 발견했다. 버니니.
맥주병을 닮은 캐주얼한 생김새와는 달리 와인이라고 새겨져있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든 와인이라니. 생소함이 주는 감동에 부르르 떨고 한 병을 구입해 집으로 돌아왔다. 코르크 마개도 아니었고 맥주 오프너로 쉽게 열 수 있는 구조였다. 고등학생이 몰래 술을 마시듯 방 안에서 조용히 버니니를 마셨다. 에디터H 인생 최초의 혼술이었다.
아! 그때의 감동이란. 세상에 이렇게 맛있는 술이 있다니. 상큼한 과실향과 기포가 입안에 감겼다. 달콤하고 톡쏘는 맛 덕분에 술이라고 의식할 수도 없었다. 소맥만 마시던 혀가 탁 트이는 것 같았다. 괜히 우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와인일까? 혼자 감탄하며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마셨다. 이걸 10병쯤 쌓아놓고 마시면 얼마나 행복할까 생각하면서. 당시 그 작은 340ml 용량 한 병에 5,000원 쯤 했던 것 같다. 박봉인 사회초년생에겐 한없이 비싼 술이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 괜히 비참하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할 때마다 마트에 들러 버니니 두 병과 체리 한 봉지를 샀다. 기분 좋은 사치였다.
내가 여기까지 글을 쓰면서 얼마나 아득한 향수에 잠겼는지 읽는 분들은 아실까. 고작 8년 전인데 한없이 멀게 느껴진다. 지금의 나는 옛날처럼 버니니의 달콤함 맛에 열광하지도, 버니니 한 병을 사며 벌벌 떨지도 않는다. 예전보다 수입 주류의 가격이 떨어져 접근성이 좋아진 탓도 있지만 그 뒤로 수많은 와인을 마시며 더 넓은 세계가 있다는 걸 배웠으니까.
지난 주말 사이 선물 받은 두 병의 버니니를 비웠다. 한정판으로 출시된 ‘버니니 벨라 에디션’. 핑크빛 액체와 봄 향기 풍기는 패키지가 사랑스럽다. 750ml 대용량이라 감질나지 않게 마음껏 마실 수 있어 좋다.
심지어 코르크 마개다. 코르크 부분에 둘러진 플라워 패턴이 화려하다.
‘뻥’하는 소리와 함께 마개를 딴 뒤, 잔에 따르면 거품이 소복하게 부풀어 오른다. 코르크로 단단히 밀봉이 되어서인지 탄산이 훨씬 풍성하고 기포가 섬세하다.
오랜만에 마시니 맛있더라. 너무 달긴 하지만 기분 좋게 즐길 수 있는 스파클링 로제 와인이다. 잔에 따라두면 분홍빛으로 찰랑거리는 모습이 참 예쁘다.
와인을 모르는 사람도, 처음 마시는 사람도, 맥주만 마시던 사람도 누구나 가볍고 편하게 즐길 수 있는 맛이다. 대중적인 품종인 소비뇽 블랑, 피노타쥬, 쉬라즈, 모스카토를 최적의 블렌딩해서 만들었다고.
버니니 클래식과 버니니 블러쉬의 중간 정도 되는 당도라는데 내 입맛엔 조금 덜 달아도 되겠다.
주말 내 추웠다. 영하 10도를 바라보는 추위 속에도 이 와인을 마시니 봄이 다가왔음이 느껴진다. 얄팍하지만, 달고 사랑스러운 맛. 누구에게나 첫 와인으로 추천한다. 행여 가까운 곳에 핑크색 병이 눈에 띈다면 달콤한 사람에게 선물로 건네보시길. 가격은 1만 원대.
버니니 벨라
Point –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며
With – 이 자체로 완벽한 디저트
Nation – 남아프리카
Style – 스파클링와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