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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May 18. 2018

집안일 판타지아



포르투 이층집에서의 생활은 일종의 판타지다. 끼니마다 무얼 해 먹어야 하나 고민하고, 손끝에서 마늘 냄새가 가실 날이 없다고 투덜대지만 영 싫지 않다. 질 좋은 식재료를 지지고 볶아 한끼 식사를 준비하는 건 마치 소꿉놀이 같다. 해가 좋은 날에는 테라스에 빨래를 널어야 한다. 빨래감은 단출하다. 그날 입은 속옷과 운동복 정도. 물기가 남아있는 팬티를 탁탁 털어내고 노오란 빨래 집게에 매달아 둔다. 고단하지 않을 정도의 집안일이 평화롭게 반복된다.



막내가 햇볕이 좋다며 수건을 널러 나왔다. 제 몸집만 한 수건을 야무지게 줄 세워 널다가 옆집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며 방긋 웃는다. Hola! 어색한 포르투갈어 인사도 건네보고. 설거지하는 M은 유행 지난 노래의 멜로디를 콧소리로 흥얼댄다.



식사를 준비하고, 집안을 정리하고, 그릇을 씻는 과정엔 어떤 갈등도 고민도 없다. 한 번도 가사노동에 시달려본 적 없는 이들의 비일상적인 판타지인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의 손은 여전히 두부처럼 부드럽다.



포르투갈은 모든 식재료가 싸고 맛있다. 감자만 구워도 입안에 쩍쩍 붙는 고소한 맛이 난다. 집 근처 시장에서 이름 모를 조개를 봉지 가득 담아 왔다. 고작 3유로. 뽀얀 국물이 우러나올 때까지 끓인다. 청양고추 대신 페페론치노를 넣었더니 국물이 제법 칼칼하다. 허기진 수저가 조개 껍데기와 부딪힌다. 달그락, 달그락. 살아있는 소리다.



남은 조개로는 다음날 점심에 봉골레 파스타를 만들었다.



우리 세 사람의 합숙은 그럭저럭 합이 잘 맞는 편이다. 입맛은 조금 다른 것 같지만 말이다. 해산물보다 고기를 좋아하는 막내가 연이은 조개 반찬에 시무룩한 것 같다. 마침 옆건물 1층이 정육점이다. 구글 번역기에서 포르투갈어 검색으로 ‘안심’을 검색했다. Alívio. 알리비우. 입으로 몇 번 되뇌며 연습한다. 발음이 참 우아하다. 이렇게 우아한 단어가 소의 맛있는 부위를 뜻하는 게 맞을까? 포르투갈어 사전에 다시 검색해보니 ‘정신적 부담을 덜어준다’는 뜻의 안심(安心)이었다. 아, 하마터면 정육점 아저씨에게 안심하라고 말할 뻔했다.



정육점 주인은 친절했다. 사진 촬영에도 흔쾌히 응해주셨는데, 고기를 자르는 모습이 이렇게 멋질 수가. 다만 우리 사이에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는 게 큰 문제였지만. 손짓 발짓과 의성어까지 동원해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샀다. 세 가지 부위를 골랐는데 사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먹고난 지금도 잘 모르겠다. 심지어 하나는 굽고 보니 돼지고기였다. 돼지로 돌변한 스테이크를 보며 셋이 나이프를 들고 자지러지게 웃었다.



해외에서 한식 못 먹는다고 앓아 눕는 타입은 아닌데, 이번엔 오래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작정하고 고춧가루와 멸치액젓까지 챙겨갔다. 엄마, 김치는 어떻게 만드는 거야? 이 배추를 살까? 이 양상추를 살까? 파가 너무 커. 8시간의 시차를 뚫고 김치 카톡이 계속됐다. 나는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열무(로 추측되는)와 작은 배추를 사서 김치를 담그기에 들어갔다. 테라스에 자리깔고 거창하게 앉았는데 역시 인생은 실전이었다. 고무장갑도 없이 배추를 절였더니 손바닥이 따갑고, 얼마나 숨이 죽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열무에선 쓴맛이 났다. 모든 게 엉망이었지만 놀랍게도 김치는 맛있었다.



그날 첫 라면을 끓였다. 우리는 어느 때보다 잘 먹고 있었다.



먹고 사는 행위에는 나도 모르게 열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기름이 지글지글 끓는 소리를 들으면 잡념이 날아간다. 솔직히 말하자면 어설픈 주방장 노릇이 너무 재밌어서 모든 걸 등지고 있었다. 그저 뭐 먹을지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는 게 그렇게 좋더라. 한국에서 쏟아지는 메일과 문자, 전화로부터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저번 주까지 살던 도시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 기묘한 거리감이다. 그렇다고 포르투에 완벽히 발붙이고 살아가는 것도 아니다. 공중에 붕 뜬 일상이다. 많이 웃고, 많이 먹고 있다. 그렇지만 정신차려야지. 일하러 왔으니까. 일단은 열무김치에 참기름 넣고 비빔밥만 해 먹고 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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