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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May 21. 2018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따갑게 내리쬐던 해는 건물 사이로 숨었고, 머리 위에 있는 파라솔은 거슬리지 않을 정도로만 펄럭인다. 알아들을 수 없는 포르투갈어가 마치 허밍처럼 들려오는 이곳. 이층집 테라스에 앉아 글을 쓰고 있는 에디터M이다. 우리는 지금 포르투에서 한 달 살기에 도전 중이다. 일을 하고, 글을 쓰며.



이곳에서의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간다. 손님이 자리에 앉아도 주문을 받을 생각이 없는 웨이터와 점심 시간이 지나면 잠시 문을 닫는 집앞 마트, 느지막이 출근했다가 4시면 칼퇴하는 우리집 맞은편 사무실 아저씨(우리끼리는 그를 휴 그랜트라 부른다). 뭐든 빠르게 처리되는 서울의 시간에 익숙했던 우리 세 명은 이제야 조금 포르투의 시계와 맞춰가는 중이다.


한 달. 이방인으로서는 길고, 사는 사람으로서는 짧은 시간이다. 검은 머리의 동양인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서 우리를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이곳 포르투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여유롭다. 내 눈길이 닿는 사람마다 누군가와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거나, 미소를 짓고 있다. 놀랍게도 카메라를 들이대도 별로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덕분에 카메라 앞의 우리 표정도 많이 여유로워진 것 같은데. 아닌가? 아무래도 이건 후발대로 도착한 우리 촬영 감독한테 다시 물어봐야겠다.



오늘은 짬짬이 모아둔 포르투의 얼굴들을 모아볼까 한다. 이 사람들의 여유가 여러분에게도 전달되었으면 해서.


우리 집 앞에는 정말 멋진 공원이 있다. 규모로 보면 학교 운동장 정도로 아담하지만 한가운데에는 분수가, 그 주변엔 잔디와 벤치가, 그리고 족히 100년은 넘었을 것 같은 아름드리 나무가 있는 멋진 곳이다.



이 공원의 주인은 바로 할아버지들이다. 어느 시간대에 가도 불법 도박 현장을 마주칠 수 있다. 플레이어는 물론 모여든 구경꾼의 표정도 사뭇 진지하다. 우리 귀여운 막내는 언젠가 저판에 껴보고 싶다고 하던데, 분위기를 보아 막내의 뽀얗고 가는 손목 정도는 걸어야 끼워주실 게 분명하다. 어쩐지 꽤 진중한 자리임에 분명해서 차마 말을 걸진 못하고 근처를 얼쩡대며 구경만 했다. 마치 대부의 한장면처럼 멋진 사진이다.



방금 이 공원을 돈이 오가는 불법 도박 현장처럼 설명하긴 했지만 사실 굉장히 평화로운 곳이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파고다나 탑골 공원 정도일까? 벤치에 앉아 따사로운 햇살을 즐기는 사람들과 책을 읽는 사람들로 넘쳐난다. 시간도, 바람도 심지어는 따가운 햇살도 잠시 머물다 가는 것 같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검은 망토를 걸친 무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상한 사람들은 아니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좀 소란스럽고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일 뿐이다. 검은 망토는 포르투갈 대학의 교복이다. 이 도시는 조앤 롤링이 <해리포터>를 집필했던 도시로도 유명하다. 호그와트의 귀여운 망토도 바로 이 포르투갈의 교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소란스러운 젊은이들의 정체가 궁금해서 찾아보니 프라세(Praxe)라고 불리는 포르투갈의 대학교 관례 중 하나로, 대학의 첫 번째 학기가 끝나면 치르는 일종의 신고식이다. 때마침 지금이 한창 그 시즌이더라. 교복과 우스꽝스러운 모자를 쓰고 기이한 행동으로 자신의 무지함을 알리는 게 목적이라고. 우리나라의 대학 신입생 신고식과 비슷하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젊은이들이란! 늙은 나는 보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진다.



이 도시에서 마주친 친절함 대해 이야기해볼까. 사진 속 남자는 촬영 중 잠시 숨을 돌리기 위해 앉았던 카페의 웨이터다. 카메라를 두 대나 들고 요란을 떨던 우리가 신기했던지 주문을 받다가 포르투에 얼마나 머물 거냐고 묻더라. 이미 소매치기로 고된 신고식을 치른 나는 온몸의 털을 곤두세우고 눈을 부릅뜨며 한 달이라고 답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다. 자기도 사진 찍는 사람이라며 영수증을 꺼내 1유로짜리 샹그리아를 파는 가게와, 죽이는 일몰을 촬영할 수 있는 호텔 레스토랑, 신선한 해산물을 먹을 수 있는 레스토랑 리스트를 상세히 적어줬다. 물론 마지막에 자신의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홍보하는 센스도 잊지 않았다. 그는 분명 이 글을 읽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하며 그의 인스타그램 아이디를 첨부한다. 오브리가도(Obrigado)!



이 날도 역시 촬영날이었다. 맑았던 하늘이 거짓말처럼 꾸물거리기 시작하더니 한순간 폭우을 뱉어냈다. 행여나 가지고 간 카메라가 젖을까봐 전전긍긍하던 우리와 달리 포르투 사람들은 소나기에도 의연하더라.



그리고 이건 그 순간에 찍은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진이다. 고백한다. 이건 동행했던 촬영 감독이 포착한 순간이다(아, 정말 내가 찍었다고 말하고 싶다). 작은 우산 하나를 나눠쓰고 빗길을 걷는 정다운 부부의 모습. 남자의 허리를 살짝 쥐고 있는 아내와 한쪽 어깨를 기꺼이 비에 내준 남편의 모습이 너무 로맨틱하다. 



세로로 긴 모양을 한 포르투갈은 기차가 굉장히 발달되어 있다. 영화 <리스본의 야간열차>가 괜히 나온게 아니라니까. 아줄레주 장식이 아름다운 상 벤투(SÃO BENTO)역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커플의 모습. 이 사진을 찍자마자 열차가 플랫폼에 도착했고 남녀는 열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어디로 갔을까? 



이 사진을 찍고 세 여자는 모두 입을 모아 외쳤다. “역시 유럽 간지!” 맨날 사무실에서 노트북 화면만 보는게 지겨워진 우리는 집 근처 카페를 찾았다. 아, 혹시 내가 우리집 근처가 서울의 성수동처럼 힙하다고 말했던가? 그저 지루하고 조용하기만 한 줄 알았던 거리를 약간의 모험심을 갖고살펴보니(우리가 이 모험심을 갖는덴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포르투의 모든 힙스터와 젊은이들이 집앞 골목에 포진해 있었다. 나중에 소개할 일이 있겠지만 이 카페는 포르투가 아닌 브루클린을 고대로  옮겨둔 것 같은 힙이 넘쳐 흐른다. 자전거를 끌고 들어가는 멋진 남자는 이 카페의 사장님이다. 나중에 커피 문화에 대해 진득하게 대화할 일이 있었는데, 스페셜티 커피에 대해 굉장히 멋진 철학과 뚜렷한 주관을 가진 진정한 힙스터였다. 



포르투의 인적 드문 뒷골목에서 무언가 열심히 타이핑하고 있던 힙스터. 인적도 드물지만, 굉장히 지저분한 골목이었는데 의연하게 노트북 화면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포르투 시내의 기념품 가게에서 우연히 걸린 사진. 남자의 시선 끝에는 자동차 피규어가 있었다. 골똑히 고민하는 그의 모습. 결국 샀을까 안 샀을까?



유럽인들의 패션 센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 할아버지를 보자. 머스터드와 물 빠진 청록색이라니 정말 세련된 컬러 매치다. 거기에 멋스러운 파나마 햇과 무심한 듯 기른 수염까지. 크으. 너무 멋지다.



날이 찢어지게 좋았던 어느 날, 광장 벤치에 앉아있던 할아버지. 새하얀 재킷과 모자 그리고 백발이 멋스럽다.



포르투에 대한 인상 중 하나는 거리마다 아티스트가 넘쳐난다는 거다. 골목마다 그래피티가 가득하고, 히베이라의 경우 거짓말 안 보태고 10m마다 다른 거리의 악사를 만날 수 있다. 거리를 걷다보면 골목마다 한 곡이 페이드아웃 되고 다시 또 다른 음악이 재생되는 기묘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나의 메말랐던 예술 감수성이 촉촉해지는 느낌이다.



사진을 불러오면서 셔터를 눌렀던 순간을 찬찬히 곱씹는다. 언젠가 외국인들에 눈에 비친 서울의 모습이 궁금했던 적이 있다. 그들의 눈엔 이 도시가 어떻게 비춰지고 있을까? 써놓고 보니 남의 눈을 의식하기 좋아하는 지극히 서울러다운 생각이긴 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끝나고 서울로 돌아갔을 때, 지금의 나와 같은 이방인의 눈에 비친 내 모습도 이렇게 여유로워 보일 수 있었으면. 이 멋진 사진들처럼 나도 피하지 않고 방긋 웃어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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