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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May 23. 2018

뒤틀린 동화 속의 세상 같다.

1:87의 작은 친구 프레이져

안녕, 에디터H다. 뜬금없는 자기 고백으로 오늘 리뷰를 시작해보자. 나는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아주 그릇이 아주 작은 사람이라는걸. 숲을 보지 못해 나무를 보는 정도라면 오히려 낫겠다. 나무 밑동에 자란 작은 잡초를 보느라 계절이 바뀌는 것을 모를 만큼 시야가 좁다.



사진을 찍을 때도 아주 작은 귀퉁이를 들여다보는 걸 좋아한다. 오죽하면 처음 구입한 렌즈가 50mm 매크로일까. 제품 모서리의 접합부나 버튼, USB 단자 등에 또렷하게 초점을 맞춰 촬영할 때 큰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러다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서 아주 멋진 계정을 발견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에 손톱보다 작은 피규어를 매치해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는 사람이었다. ‘미니어처 아트’라고 칭하더라.






소름 돋을 만큼 멋진 아이디어가 즐비하다. 계정을 직접 방문해보시길. 정신없이 구경하다 나도 당장 찍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은 미니어처 세상의 리뷰! 딱딱한 느낌의 제품 사진에 이 귀여운 피규어를 곁들인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생각만 해도 너무 귀여웠다.


[사실 직접 채색하는 DIY 버전도 실수로 같이 샀다…]


당장에 손가락 한 마디보다 더 작다는 피규어 ‘프레이저’를 여섯 세트나 주문했다. 프레이저는 초소형 피규어를 제작하는 독일 브랜드다. 장난감처럼 보이지만 주로 건축 모형에 사용하기 때문에 디테일이 끝내주는 편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 스키 타는 사람, 피크닉 중인 사람, 시장의 상인… 피규어 종류도 놀라울 정도로 많다. 국내 쇼핑몰엔 내가 원하는 시리즈가 없어서 아마존 직구까지 했다. 두근두근. 포르투까지 야무지게 들고 와서 집앞 공원의 잔디밭 앞에 풀어놓은 프레이저는 생각하던 것보다 더 작았다. 내가 구입한 건 1:87 비율인데, 눈으로 보고 즐기기도 어려울 만큼 작다.


[상상하던 그림이 아님, 공포 그 자체]


일단 조심스럽게 우아한 두 여자의 티타임을 연출해봤다. 이 과정에서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이 피규어가 너무 작아서 잔디밭이 두 사람을 덮칠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 우아한 정원이 아니라 정글 속의 티타임처럼 공포스러웠다. 게다가 초점 맞추는 게 쉽지 않다. 나의 자부심(?)인 매크로 렌즈까지 꺼내들었지만 피규어 얼굴에 완벽하게 초점이 맞은 사진을 건지기가 어렵더라. 이대로 촬영하다가는 잔디밭에 엎드리게 될 것 같다.


[초점 대체 어디로…]

촬영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려고 조심스럽게 피규어를 들어 올렸는데…! 앗, 이쑤시개보다 더 가느다란 플라스틱 의자 다리가 몽땅 부러졌다. 한순간의 힘 조절 실패로 흰 모자를 쓴 귀부인 피규어는 저세상으로 가버렸다. 잔디밭에 떨어진 의자 다리를 바라보는 마음이 황망하기 그지 없다. 저쪽에서 에디터M이 작은 눈으로 흘겨본다. 사달라고 유난을 떨어서 결제해줬더니 개봉 5분 만에 망가트린 나를 힐난하는 게 틀림없다.


게다가 너무 작아서 의자에 앉아있는 피규어가 아니고서는 스스로 서 있질 못한다. 엉엉. 애꿎은 피규어 밑에 침을 발라 새워보지만 소용없다. 역시 미니어처 아트의 세계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접사 전문 포토그래퍼(?)임으로 결국 해냈다. 리뷰 제품들과 매치해서 멋진 컷을 남겼다. 크으.


[친구를 잃고 혼자 티타임]


귀부인은 혼자가 되었다. 피규어 밑에 있는 초록병은 소주가 아니다. 요즘 포르투갈에서 즐겨 마시고 있는 슈퍼복 레몬 맥주. 2% 정도의 도수와 저렴한 가격 덕분에 물 대신 마신다.



엄청 확대해보면 표정이나 옷의 주름 같은 디테일이 모두 표현된 걸 확인할 수 있다. 육안으로는 이런 디테일을 확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피규어다.



이 초록병은 사그레스의 래들러다. 이 역시 레몬 맥주.



이건 G7 씽큐의 라즈베리 로즈 컬러의 측면. 핑크 셔츠를 입은 피규어와 매치했다.



소니의 블루투스 스피커와 풍선 파는 아저씨. 빛이 기가 막히게 잘 들어왔다.



애지중지 새 카메라 A7M3. 저 피규어가 우리 대신 사진도 찍고 영상도 찍어줬으면.



그리고 이건 요즘 푹 빠져있는 드론. 포토그래퍼 피규어를 매치해봤다. 잘 어울린다.


사실 스피커 외에는 한 손에 잡히는 사이즈의 제품들인데, 기묘하게 커 보이는 느낌이 좋다. 뒤틀린 동화 속의 세상 같다. 색다른 촬영 소품을 얻은 것 같아 기쁘다. 어쩐지 포르투에서 절반쯤 부러트리거나 잃어버릴 것 같은 불길함이 들지만, 앞으로 디에디트 리뷰에서 종종 이 작은 친구들이 숨어있는 모습을 찾아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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