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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Aug 23. 2018

서울 속 파리지엔이 머무는 곳

레스케이프 호텔

지난 주말엔 레스케이프 호텔에 다녀왔다. 요즘 가장 핫한 그곳말이다.


나에게 주어진 휴일은 주말을 낀 꽉찬 삼 일. 호캉스는 꽉 막힌 도로를 마주하거나, 지루하고 답답한 비행을 견딜 필요 없이 가장 손쉽게 일상에서 도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최근 재미있는 부티크 호텔이 많이 생기고 있다. 몇몇은 꽤 좋아하지만, 솔직히 실망스러운 적도 있었다. 힙과 조악함은 종이 한 끝 차이다.멋진 이미지에 현혹되어 적지 않은 돈을 내고 가도, 이 정도면 과연 잘 만든 모텔과 얼마나 다른 건가 싶어 쓴 입맛을 다시게 되는 경우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레스케이프는 적어도 이런 걱정에서만은 자유롭다. 어반 프렌치 부티크 호텔. 잔뜩 멋을 부린 말이다.  쉽게 말해 파리의 감성을 서울, 그것도 서울의 금싸라기 땅에 옮겨 왔다는 소리다. 실제로 다녀와보니 작은 것 하나에도 세심하게 공을 들이 티가 역력하더라.



회현동, 일단 위치가 정말 좋다. 고개만 돌리면 남산이, 약간의 의지와 날씨 운만 따라주면 명동부터 시청 광화문까지 어디든 설렁설렁 걸어서 갈 수 있다. 바로 근처 신세계 백화점 본점과 남대문 시장의 대비도 흥미롭다. 이 지역이 외국 관광객과 직장인들이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는 곳이라 이방인의 기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것도 재미있는 포인트다.



룸을 예약하는 데 고민을 많이 했다. 생긴 지 이제 막 한 달이 된 호텔이니 아직 후기가 그리 많지 않았고, 웹사이트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굉장히 제한적이더라. 나에게 달장 한 장의 룸 이미지만 허락했고, 룸에 대한 설명도 잡지 화보의 캡션처럼 추상적이고 모호하다.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룸은 크게 디럭스와 스위트로 나뉜다. 총 204개 객실중에 80여개가 스위트룸일만큼 비중이 높다.



사실 정말 궁금했던 건 룸 컨디션보다 이 호텔이 담고 있는 콘텐츠였다. 미쉐린 스타 쉐프부터 보광동의 작은 헬카페까지 럭셔리와 힙을 넘나드는 다양한 콘텐츠를 가득 담아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그중에서 가장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건 팔레드 신. 요즘 홍콩에서 가장 잘나가는 레스토랑인 모트32(Mott32)와 협업한 메뉴를 맛보고 싶었다. 때마침 ‘Taste of L’Escape’라는 7월 부터 8월 말까지만 만나 볼 수 있는 패키지가 있길래 얼른 신청했다. 디럭스 룸 중에서 시크릿룸을 예약했는데, 당일 아틀리에로 업그레이드가 되었다. 럭키.


아쉽게도 팔레드 신의 사진은 없다. 휴가로 작정하고 갔는데 큰 카메라를 들고 레스토랑까지 가고 싶지 않아서다. 소룡포와 냉채, 산라탕과 생선과 고기, 마파두부 그리고 디저트까지 나오는 꽤 괜찮은 구성이었다는 것만 여기 기록해 둔다. 막상 호텔은 한산했는데 레스토랑은 사람들로 붐볐다. 다들 멋지게 차려입고 즐거운 저녁을 즐기고 있더라. 만약 하룻밤을 묵지 않아도 레스토랑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사진은 없지만 로비는 생각보다 아담하고 소박하다. 하긴 로비가 얼마나 중요할까. 체크인을 하는데 작은 해프닝이 있었다. 보증금이 무려 50만 원이더라. 물론 불상사(?)만 없다면 당연히 환불이 되긴 하지만 솔직히 조금 놀랐다. 여러분은 나처럼 당황하지 마시길.



방은 15층이다. 룸키도 카드 형태가 아니라, 열쇠 모양이다. 카드처럼 지갑에 넣고 다니긴 힘들겠지만 감성은 있다.



호텔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레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면 벽돌색에 가깝다. 혹시 MLBB라고 아시는지. ‘My Lips But Better’의 약자로 입술에 발랐을 때 자연스러운 붉은 빛을 내는 립스틱 컬러를 말한다. 말린 장미 색부터 벽돌색까지 굉장히 다양한 톤을 품고 있는데, 어떤 조명을 받느냐에 따라 굉장히 달라 보이는 그런 오묘한 색이다.이 묘한 컬러가 호텔을 지배하고 있다. 입술에 바를 땐 그리 어려운 색은 아니지만, 이걸 호텔의 시그니처 컬러로 선택한다? 쉽지 않은 결정이다.



하지만 이 컬러는 제법 근사하게 호텔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곳곳에 녹아들어 있더라.



방은 꽤 넓은 편이다. 그리고 전반적으로 굉장히 어둡다. 기본적으로 호텔의 조명이 밝지 않은 편임을 감안하더라도 굉장히 어두운 편이다. 어두운 레드와 그린 그리고 벨벳과 카펫 등 빛을 먹는 소재들이 쓰여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침구 상태는 당연히 좋다.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호텔의 매력이다. 딱 좋은 정도의 부드러움과 까슬거림. 단단함과 푹신함. 새하얀 순면 시트에 멋진 자수 로고가 새겨져 있다. 머리를 대면 땅속까지 빨려들어가는 기분이다.



곳곳에서 사치스러운 취향이 엿보인다. 침대 상단의 캐노피 장식이 보이시는지. 심지어 베드의 헤드는 벨벳 천으로 마무리했다. 고급스럽지만 관리가 어렵지 않을까란 우려가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이런 장식적인 요소들이 호텔 전체를 관통하며 호화로운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팻투바하라는 닉네임을 쓰는 파워 블로거이자, 레스케이프 호텔의 지배인인 김범수 상무는 언론을 통해 호텔 자체가 콘텐츠의 플랫폼이 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비전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방 한켠의 검은 장이라고 생각한다. 장의 열면 다른 편집샵으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할로겐 조명이 반짝이는 이 장은 전반적으로 조도가 어두운 곳에서 가장 환하게 빛나는 곳이기도 하다.



단순한 미니바 수준이 아니라 일종의 편집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기사에서 프리미엄진으로 소개한 적 있었던 핸드릭스부터, 싱글몰트 위스키, 귀마개, 휴지 호루라기까지.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하단에 깔린 종이엔 가격과 제품의 특징이 ‘영어’로 적혀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한다. 함부로 건드리면 당신의 지갑 사정에 좋을리 없다.



방안의 조도를 조절할 수 있는 다이얼은 손으로 돌려서 사용하도록 되어 있다. 열쇠 모양의 카드키부터 조그 다이얼까지 곳곳에 아날로그 감성이 묻어있다.



흥미로운 건 19세기 감성을 지향하는 호텔이지만, 내부의 편의 시설 조작은 KT의 인공지능 서비스인 지니(genie)를 통해 가능하다는 거다. 커튼을 열고 닫거나, 혹은 룸서비스 등 기본적인 건 물론 음성으로 가능하다. 하지만 어쩐지 이곳에서 “지니야”라고 부르려니 조금 멋쩍어 선뜻 쓰지 못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야심한 밤 장난삼아 “지니야 비틀즈 음악 틀어줘”라고 했더니, 비틀즈의 주옥같은 명반이 일렬 종대로 내 선택을 기다리고 있더라. 이날 우리의 테마곡은 ‘Hey Jude’.



아 그리고 TV의 위치가 독특하다. 처음엔 침대에선 TV를 볼 수 없는 구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각도 조절이 되더라. 크기는 크지 않지만 보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지니가 있는 베드 사이드 테이블에는 HDMI 케이블과 휴대폰 충전을 할 수 있는 독이 있다.



침대에 누워 고개를 돌리면 내가 이 방에서 가장 사랑했던 공간인 욕실이 보인다. 침실과 연결되고 화장실과 샤워부스와는 독립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체스판을 닮은 대리석 타일 위로 멋진 욕조와 멋진 그림이 놓여있다. 많은 상상을 하게 되는 그런 곳이다. 룸에서 상당히 많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지만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 



어메니티는 아틀리에 코롱이다. 샤워를 할 때 아뜰리에 코롱이 가장 잘 뽑아내는 기분좋은 상큼한 자몽향이 은은하게 풍긴다.



서랍을 열면 보이는 여타 다른 어메니티도 꽤 괜찮다. 칫솔과 치약 모두 반트 제품을 쓰더라.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있다.



도톰하고 부드러웠던 샤워가운. 길이가 꽤 긴편이다. 지금은 한 풀 꺾인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시점이라, 방의 온도를 한껏 낮추고 몸에 착 감기는 샤워가운을 입고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침실과 욕실은 멋진 중문으로 나뉘는데, 거기에도 이렇게 사치스러운 실크 자수가 놓인 장식이 있다.



침대 헤드의 장신 쇼파 아랫단, 결국 이런 디테일들이 사용자에게 입체감을 불어 넣는다. 사람의 기억과 인상은 작은 기억의 조각모음에 가깝다. 이미지로는 미처 다 담을 수 없는 이런 작은 디테일이 모여 공간에 대한 인상을 만든다. 그런 점에서 레스케이프 호텔은 근사한 경험이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자세히 보아야 찾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디테일을 하나하나 발견할 때마다 감탄하며 즐거워 했으니까.



머무는 동안 어두운 조명과 장식적인 요소 때문인지 바깥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서울 속 파리라는 컨셉에 충실한 곳이다. 체크 아웃을 하고 나오는 데 마치 테마파크에서 1박 2일의 환상특급 열차를 타고 나온 것처럼 기분이 묘하다. 짧은 일탈을 꿈꾸는 호캉스에 아마 이보다 더 적합한 호텔은 어쩌면 당분간 찾기 어려울 지도 모르겠다.



얼마전 오픈한 B급 감성 삐에로 쇼핑부터 도심 속 파리를 지향하는 레스케이프까지. 이것이 우리를 대상으로 하는 실험이든 혹은 잠깐 스치는 변덕이든 난 그 간극을 충분히 즐겨 보기로했다. 어찌되었건 누군가의 취향을 훔쳐보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일단 마음도 지갑도 활짝 열어 둬야지. 에디터M의 사치스런 하룻밤 이야기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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