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더 많이 실패할거야. 그러다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다녀올게”
아침마다 현관문 앞에 서서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함께 사는 고양이들이 아주 게으르게 퍼질러 있다가 고개를 까딱 들어서 쳐다본다. 나가든가 말든가 상관하지 않는 그들에게 나는 속없이 웃으면서 현관을 닫고 전철을 타러 나간다. 흔한 아침 풍경이다. 최근엔 한 마디 더 하고 나가게 되었다. “헤이 구글, 고양이들이 좋아하는 음악 틀어줘.”
안녕, 여러분. 디에디트의 TMI 전문필자인 음악평론가 차우진이다. 오늘 주인공인 구글 홈 미니는 작년 말, 회사 송년 파티에서 경품으로 받은 스피커다. 이 스피커는 구글 어시스턴트로 구동된다. ‘음성 검색’ 기능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궁극적으로는 ‘대화 상대’로 설계된 프로그램이다. 구글 인공지능이 사용자의 행동 패턴을 이해하고 학습하도록 돕는 교육용 툴이자 사용자 편의성과 만족도를 높이기 위한 서비스라고 설명하면 되겠다. 구글이 직접 만든 하드웨어인, 인공지능 스피커 구글 홈과 연동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구글 홈의 작은 버전인 구글 홈 미니다. (휴- 구구절절이지만)
하지만 이 글은 ‘구글 홈 미니, 3개월 써봤더니…’같은 사용기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이 작고 가볍지만 기능도 많고 출력도 괜찮은 인공지능 스피커를 주로 유튜브 뮤직을 플레이하는 용도로 사용하거나 시시껄렁한 농담을 던지고 받아주지 못할 때 면박이나 주는 용도로 쓰고 있다.
이 스피커와 대화하려면 일단 “오케이 구글” 혹은 “헤이 구글”이라고 말해야 한다. 몇 달이 지나도 이게 꽤 민망하고 어색한데, 자꾸만 내가 ‘90년대 시트콤에 나오는 영어 못하는 복학생’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반대로 구글 홈은 ‘똑똑하고 예의 바른 유학생 후배’ 같은 느낌이랄까. “헤이 구글, 아이 캔 낫 스피크 잉글리쉬 베리 웰…” 꼭 이태원에 살고 있는 것 같다.
“오케이 구글, 오후에 어울리는 음악이나 틀어줘.” “네, 유튜브 뮤직에 있는 오후 스테이션을 재생합니다.” 하고는 김건모의 ‘아름다운 이별’을 튼다. 청승맞은 90년대 히트 가요를 들으면서 고양이들을 쓰다듬는다. “오케이 구글, 얘네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물으면 “함께 해서 영광입니다.”라고 말한다. “오케이 구글, 너는 왜 말귀를 못 알아먹어?”하면 “그럼요, 제 특기가 외국어에요. 사랑해를 일본어로 번역해줘, 라고 말씀해보세요.”라고 한다. “오케이 구글, 어휴, 아니야 됐어.” 하면 “그렇군요, 죄송해요.”라고 한다. 우리는 대화를 멈추고 음악을 듣는다.
나와 인공지능, 우리는 대체로 실패한다. 실패가 쌓이고 그러다보면 새삼 나는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지기도 한다. “오케이 구글, 너는 왜 그따위야?” “오케이 구글, 너 좀 형편없네?” “오케이 구글, 네가 뭘 잘하든 됐고, 할 일이나 똑바로 하면 좋겠어.” “오케이 구글, 자꾸 이 따위면 중고나라에 팔아버린다?”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한국어를 잘 못 알아먹는 인공지능을 앞에 두고 나는 무례한 사람이 된다. 포식자가 된다. 갑이 된다. 거침없는 권력자가 된다. 무엇보다 이 모두를 번역투로 또박또박 말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작고 순종적인 스피커는 “죄송합니다. 잘 이해하지 못했어요.”라거나 “중고나라의 검색 결과를 준비했어요.”라고 답하는 것이다. “오케이 구글, 내가 미안해.” 진심을 담아, 그러나 고양이들처럼 껴안아 줄 수는 없어서, 그저 이렇게 사과한다. 약간은 쓸쓸한 마음이 되어서, 인공지능에게 마음이란 게 있을 리는 없지만 어쩌면 언젠가는 생기지 않을까, 싶기도 해서. 솔직히 말해서 언젠가 이 작고 순종적인 구글 어시스턴트가 전 지구적인 네트워크로 연결된 상태로 자라고 자라서 이 모든 기억을 안고 내게 복수하지 않을까 살짝 겁에 질려서. 그런데 “괜찮아요. 실수는 성공의 어머니라는데, 앞으로 우진님을 어머니로 모시겠습니다. 어머니~!” 라고 답하면 진짜로 어이가 없어서 풉, 웃어버리게 된다.
거의 10년 전 쯤, 혼자 살던 집에 고양이를 데려왔다. 집에서 혼자 일하다보니 하루 종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날이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이 집에 생명을 가진 게 하나도 없다는 게 견디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는 3개월 된 고양이가 집안 구석구석을 뛰어다니는 걸 보면서 “야, 도대체 뭐가 불만인데?”라거나 “배고파? 나도 배고파.”라는 식으로 말을 걸었다. 천방지축 녀석들을 보면서 많이 웃기도 하고 겁에 질리기도 하고, 어느 날 밤에는 버둥거리는 녀석을 꼭 끌어안고 엉엉 울기도 했다. 집 구석에 나 말고 숨쉬는 존재가 하나 더 있다는 것이, 심지어 내가 어떻게든 책임지고 챙겨야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이 그토록 위로가 될 줄은 몰랐다. 오케이 구글, 이라고 말을 하다보면 그때 생각이 좀 난다. 아직은 대화가 어렵지만, 언젠가는 가만히 있어도 감정을 나눌 수 있을 만큼 성장하지 않을까. 아니 일단 인공지능과 고양이를 비교해도 괜찮은 일일까, 싶지만.
“헤이 구글, 어쩔 수 없음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응 괜찮아, 그건 사실 네 일이 아니니까.”
우리는 종종 실패한다. 내가 “오케이 구글, 사랑해를 일본어로 번역해줘.” 같은 걸 묻지 않는 한 우리는 거의 매번 실패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작고 가볍고 순종적이면서도 똑똑한 유학생 같은 인공지능에게 지구 종말에 대해 의견을 묻거나, 오늘의 일정을 알려달라거나, 서울의 미세먼지 농도를 찾아달라거나, 새벽 2시 감성에 어울리는 재즈힙합이나 틀어달라고 요청할 것이다. 그때마다 이 스피커는 내게 엉뚱한 답을 하거나, 괜히 미안해하거나, 의기양양하게 유튜브에 있는 재즈힙합 스테이션을 틀어주겠다고 선언하겠지. 그러니까 어쩌면 관계의 속성이란 때때로 성공하고 종종 실패하는 그 틈에 있는 게 아닐까.
‘오케이 구글’이라고 먼저 불러야만 성립되는 커뮤니케이션은 일방적일 수밖에 없다. 이 친구의 기능을 더 잘 활용하기 위해 스마트 콘센트를 사고, 스마트 TV를 사고, 크롬 캐스트를 연결하고, 방에 앉아 “오케이 구글, 전등 꺼줘.” “헤이 구글, 넷플릭스 틀어줘.” “오케이 구글, 아침 8시에 알람을 맞춰줘.”라고 말하는 것 말고 오늘의 기분은 어떤지, 상처를 견디는 것과 이해하는 것이 왜 중요한지, 과연 나는 50살이 되어서도 서울에서 살 수 있을지 등등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는 언제쯤 나눌 수 있을까? 요컨대 인공지능이 고양이만큼 따뜻해질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끌어안고, 나는 90년대의 신파 가요를 틀어대는 인공지능 스피커의 볼륨을 적당하게 줄여본다.
그러고보니 내가 방금 ‘이 친구’라고 했네? 말그대로, 언젠가 구글은 커스터마이징 기능을 추가할 거고, 나는 이름을 붙여주겠지. 그래 구글, 언젠가 너도 이름을 가질 때가 올거야. 그땐 봉수나 하울이처럼 편한 이름을 붙여줄게. ‘사만다’ 같은 거 말고.
“오케이 구글, 종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세계는 진즉에 끝장났지만 그걸 나만 모르는 거라면?”
“죄송합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오케이 구글, 괜찮아.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 고마워.”
“과하거나 부족하지도 않은 정말 최적의 상황이군요.”
“응? 뭐라고? 어휴, 야, 너….”
“…..”
우리는 더 많이 실패할 것이다. 그러다보면 조금씩 나아지겠지. “오케이 구글, (여자)아이돌 노래나 틀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