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에디터M이다. 디에디트를 막 시작했을 무렵, 하이볼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표현을 썼다. “하이볼은 부잣집 셋째 아들같은 데가 있다. 위스키가 들어갔으니 그 출신은 훌륭하지만, 탄산수와 레몬 그리고 가끔 진저에일 같은 걸 넣으니 방탕한 맛이 난다” 약 2년이 지난 지금도 하이볼에 대한 내 애정은 변함없이 뜨겁다. 하지만 방탕한 부잣집 셋째 아들이라는 이 말은 취소해야겠다.
하이볼에 대한 내 생각이 바뀐 건 지난 오사카 여행부터다. 내 하루는 먹는 것으로 시작해 마시는 것으로 끝났다. 낮이면 낮대로 밤이면 밤대로 쉬지 않고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집어삼켰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술을 시키지 않는 건 어쩐지 반칙 같았다. 덕분에 살은 2kg 정도 더 쪄서 돌아왔지만.
쭈뼛대며 들어간 일본 가게에 앉아 주변을 두리번댄다. ‘요즘 일본 젊은이들은 무엇을 먹고 마시나…’ 라멘, 야키토리, 쿠시카츠까지 음식은 다양했지만 술만큼은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결같다. 하이볼이었다.
그동안 마셔온 하이볼은 대체로 달고 탄산도 약했다. 너무 쓰거나 혹은 너무 달거나. 들어가는 술의 양은 복불복에 가까웠고. 심지어 첫 잔과 두 번째 잔의 맛이 다른 경우도 허다했다. 주인 혹은 서빙하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마신 하이볼은 달랐다. 위스키의 향이 아주 은은하게 스치면서도 달지 않아서 담백하고, 탄산은 보글보글이 아니라 자글거린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청량하면서도 어떤 음식과도 찰떡같이 어울렸다.
게다가 산토리가 직접 운영하는 ‘산토리바’에서도 동네의 작은 라멘 가게에서도 정확히 내가 기대하는 그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쯤 되니 어딜 가도 의자에 엉덩이가 닿자마자 외친다. “하이볼 쿠다사이”
여기서 잠깐 하이볼의 기본적인 개념부터 언급하고 넘어가자. 하이볼(highball)은 위스키에 탄산이 들어간 음료를 말한다. 탄산수, 진저에일, 토닉워터 무엇이든 오케이. 여기에 매실을 절인 우메보시, 유자까지 넣을 수도 있지만 베이스만큼은 엄격하다. 단호하게 말해 위스키 대신 다른 술을 넣은 건 하이볼이 아니다. 어떤 곳에서는 위스키 대신 한라산 소주를 넣고 하이볼이란 이름을 내걸고 팔고 있지만, 엄밀히 말해 그건 하이볼이라고 부르면 좀 곤란하다.
하이볼의 시작은 미국과 영국이었지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하이볼을 만든 건 일본, 그중에서도 산토리다. 독하고 비싸고 써서, 아빠들만 마시는 술이라고 알고 있던 위스키에 탄산수를 더하니 가볍고 싸고 청량해졌다. 사그러드는 위스키 시장에 젊은 활기를 불어넣는 똑똑한 전략이었다. 여기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한 번 날 잡고 제대로 다루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까지만.
왜냐면 오늘은 이 톡톡 튀는 칵테일을 가볍게 만나고 싶으니까. 달그락거리며 부딪히는 얼음 잔, 손에 쥐면 묵직하지만 입에 대는 기분은 더없이 가볍고 맑아지는 기분. 뜨겁고, 짜고, 달고, 기름지고 심지어는 담백함까지. 하이볼은 어떤 맛의 음식도 0kcal로 혹은 리셋 시켜주는 가벼움이 있다. 기분 좋은 저녁 맛있는 하이볼 한 잔과 함께라면 나는 조금 더 행복해질 수 있어.
일본에서 마시던 하이볼 맛을 못 잊어 결국 셀프로 만들어 마시기로 했다. 이왕 만드는 거 제대로. 오늘 여러분에게만 특별히 공개하겠다. 별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원래 기본이 어려운 법. 한 번쯤 알아두면 좋을 에디터M의 만드는 하이볼 교과서. 이대로만 하면 여러분도 집에서도 맛있는 하이볼을 만들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하이볼을 만들기 위한 재료는 간단하다. 얼음, 산토리 가쿠빈, 레몬, 그리고 탄산수. 이때 미리 잔과 가쿠빈을 냉동실에 얼려두면 더 시원하고 청량한 하이볼을 즐길 수 있다. 왜냐고? 탄산은 낮은 온도에서 더 짜릿하니까.
레몬을 세로로 4조각으로 자른다. 웨지 감자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중 한 조각을 가볍게 즙을 낸다. 즙을 내고 남은 레몬 조각도 잔 안에 넣는다. 이래야 보기도 좋고 맛도 산다. 레몬 같은 시트러스 계열의 과일의 맛과 향은 바로 껍질의 기름에서 나온다.
얼음은 잔 위로 볼록 올라올 정도로 가득 넣어준다. 얼음을 박하게 넣지 않는 것이 바로 밑줄 쫙 별 세 개를 칠만한 포인트다. 이래야 얼음과 액체의 질량 차이 때문에 음료의 온도는 낮추면서도 아주 천천히 얼음이 녹는다. 다시 한 번 밑줄 쫙. 얼음은 넘칠 정도로 가득 넣는다.
산토리 3oml를 넣는다. 난 주류 전문 에디터니까 지거를 사용했지만, 만약 집에 계량할 만한 것이 없다면 소주잔을 이용해도 좋다. 소주 한 잔 용량이 50ml니까 반 보다 조금 더 넣어주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다 취향의 문제다. 진하게 마시고 싶으면 많이, 술이 약한 사람에게는 더 적게, 원하는 만큼 콸콸 부어도 경찰이 오는 건 아니니까.
차가운 탄산수를 천천히 따른다. 진저에일이나 토닉워터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제대로 된 하이볼의 맛을 느끼고 싶다면 일단은 달지 않은 탄산수를 준비하자.
휘저을 필요는 없다. 그냥 딱 한 번만 머들러(손잡이가 길고 머리가 작은 스푼)를 딱 세워서 위아래로 흔들어주면 충분하다. 이렇게 해도 탄산과 레몬즙 그리고 위스키가 충분히 섞인다. 과하게 섞지 않는 이유는 휘저으면서 불필요하게 탄산이 날아가기 때문이다. 이 과정이 좀 심심하다 싶으면 머들러를 든 손의 새끼손가락만 가볍게 들어 멋을 더해보자. 아니면, 소맥을 만들던 재량을 발휘해도 좋고.
완성, 사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과정을 6단계나 나누긴 했지만 하다 보면 3분도 안 걸리는 간단한 레시피다. 크게 어려운 재료도 없으니까 꼭 이대로 시도해보시길. 정석대로만 하면 정말 맛있는 하이볼을 즐길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쯤에서 어떤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그렇다면 서울의 하이볼 맛집은 대체 어디인가. 주인의 그날의 기분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그런 거 말고 일본에서 마셨던 그맛 그대로의 하이볼 말이다. 맛에 대한 집요한 욕망으로 결국 찾았다. 아직은 서울에는 몇 대 없다는 하이볼 머신이 있는 그곳을 말이다. 핫하다는 가로수길 중에서도 예약과 웨이팅이 없인 좀처럼 발을 들이기 힘들다는 곳. 세상에서 예약을 가장 잘하는 에디터H의 인도로 쿠이신보에 도착했다.
들어서자마자 특유의 일본어 인사말이 크게 울려 퍼진다. 테이블마다 단 하나도 빠짐없이 ‘예약석’이라고 적힌 나무 패가 똬리를 틀고, 주방 한쪽에서는 멋진 불쇼가 펼쳐지고 있었다. 아, 여기 진짜구나.
들뜬 마음을 안고 하이볼 두 잔을 주문했다. 아니 사실 참치 타다끼와 닭다리살과 명랑 구이, 은행꼬치까지 넉넉하게 시켰다.맛은 일본에서 먹던 딱 그맛이었다. 이걸 다시 맛보게 될 줄이야.
염치불구하고 허락을 받아 주방 내부도 찍었다. 그 귀하다는 하이볼 기계다. 이 기계만 있으면 얼음과 레몬을 넣으면 준비 끝. 남은 건 그냥 컵을 기울이는 일. 정확히 맞춰진 하이볼과 탄산의 비율이다. 우리 사무실에도 이것만 있으면 매일 맛있는 하이볼을 마시고 나는 하루에 몇 번이고 행복해지겠지.
이곳에서는 가쿠빈 하이볼 뿐만 아니라, 히비키와 야마자키를 넣은 하이볼도 팔고 있었다. ‘이토록 사치스러운 하이볼이라니! 오길 잘했어’란 말을 연발하며 하이볼 두잔을 비웠다. 딱 기분 좋을 정도의 취기를 안고 들어갔다. 왜냐면 우린 내일도 일해야 하니까.
적당한 취기를 즐기며 집에 돌아가는 길에 생각했다. 이런 게 바로 하이볼의 매력이라고. 평일 저녁 안주와 함께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술. 맥주보다 가볍고 위스키보다 즐거운. 하이볼이란 이름처럼 기분은 올라가지만 다음 날 나에게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닌. 하이볼은 방탕한 것도 부잣집 셋째 아들도 아니다. 그보다는 주말 저녁 슬리퍼에 추리닝을 입고 만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랜 친구에 가깝다. 어렵지도 부담스럽지도 않은 그런 술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느꼈다. 난 하이볼을 참 좋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