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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Apr 08. 2019

반지끼는 남자

또 반지를 샀다. 이태원과 경리단을 잇는 작은 액세서리 가게에 들어갔다가 홀연히 반지를 샀다. 새끼 손가락에 맞는 반지를 마침내 찾아낸 덕이다. 가게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다른 손가락에 줄줄이 끼워져있는 반지들과 딱 맞는 반지였다. 은으로 된 작은 반지다. 새끼 손가락을 드는 순간 반짝반짝 빛이 났다. 나는 기분이 쾌활해졌다. 왜냐면 새끼 손가락에 맞는 반지란 건 도무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회사에 갔다. 한 후배가 물었다. “손가락 전체에 반지를 끼면 타이핑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나는 대답했다. “아니, 오히려 타이핑 치는 손가락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데?”



직장에 출근하기 직전에 치루는 하나의 의식이 있다. 보석함에 있는 반지와 팔찌 중 무엇을 찰까,하는 의식이다. 그건 꽤나 고민이 되는 의식 중 하나다. 그날 기분에 맞는 것을 찾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반지와 팔찌가 아주 많은 것은 아니다. 보석함 하나에 가득찰 정도로만 가지고 있다. 이 정도의 액세서리만해도 보통의 남성에게는 꽤 많을 것이다. 게다가 보석함이라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남자에게 대체 무슨 보석함이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만, 그렇지 않다. 남자에게도 보석함이 필요하다. 남자에게도 액세서리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남자들은 액세서리를 해서는 안된다는 암묵적인 규칙 같은 것이 존재한다. 반지는 결혼반지나 커플링이면 족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런 편견에 암묵적으로 반대한다.



뭔 액세서리 이야기를 하면서 남성성을 이야기하느냐고 누구는 물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남성성이라는 존재는 남성을 옭아맨다. 우리는 남성은 이래야하고 여성은 이래야한다고 배우면서 자란다. 파란색은 남성의 것이며 분홍색은 여성의 것이라고 배우며 자란다. 나는 경상남도에서 자랐다. 이 경상도라는 동네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한 남성성이 존재하는 동네로서, 남성이라면 온당 ‘싸나이’가 되어야 한다는 어떤 암묵적인 의무가 있다. 나는 그런 동네에서 아마도 가장 여성스러운 남성으로 자랐을 것이다. 어린 시절 나는 아파트 공터에서 야구를 하기보다는 여자 친구들과 하는 고무줄 놀이나 공기 놀이가 더 좋았다. 아버지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디서 머시마가 가시나들이랑 노노. 나가서 머시마들이랑 놀아라”고 했다. 그리고는 난닝구와 빤스만 입힌 채 바깥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머시마라면 그 따위는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나는 나무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오돌오돌 떨며 누가 보지 않을까를 두려워했다.


아버지의 훈육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성성을 지닌 남성으로 자랐다. 때로는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남자 중학교와 남자 고등학교라는 곳은 일종의 정글이다. 남성성이 강한 자가 군림하는 야수의 세계다. 거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나는 남성성을 억지로 몸에 입어야 했다. 일부러 강한 사투리를 쓰기도 했다. 일부러 강한 아이들과 어울리기도 했다. 그건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한 재주였을 것이다. 재주는 금방 들통난다. 나는 종종 여성적인 별명을 얻었다. 가시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건 숨기려해도 도무지 숨겨지지 않는 내 안의 성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상처가 됐냐고 묻는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말하겠다. 상처를 입기에는 나는 에고가 지나치게 강한 타입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어른이 됐다. 나는 강박적으로 액세서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마치 그것이 나의 정체성을 발산하는 근사한 도구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나는 내가 반지를 좋아하는 이유에 이렇게까지 거창한 의도를 달게 될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좋아하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하다. 이유를 찾기 위해서는 심리학이 필요하다. 그걸 들고 파다보면 결국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파고들게 되기 마련이다. ‘당신이 무슨 프로이트냐!’고 누군가는 호통을 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야 사실 이 글은 한 마디로 정리할 수도 있다. 액세서리를 하는 이유는 그저 예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액세서리는 특히 여름에 빛을 발한다. 하얀 면티를 입으면 손과 팔이 허전하다. 그때 은으로 된 반지와 팔찌는 스타일에 화룡점정을 찍어준다. 누구는 남자들의 장신구는 좋은 시계라고 말을 한다. 좋은 시계를 사는 데는 큰 돈이 든다. 하지만 반지와 팔찌는 그리 큰 돈이 들어가는 물건은 아니다. 내가 모은 것들을 몇 가지 보여드리고 싶다. 



내가 가장 아끼는 팔찌는 일본 브랜드 언더커버의 것이다. 면도날 여러개를 이어붙인 이 팔찌를 차고 나가면 사람들이 꿈쩍꿈쩍 놀라곤 한다. 다행히도 진짜 면도날은 아니므로 다칠 염려는 없다.



일본 브랜드 앰부시의 이 팔찌는 거의 차는 것이 불가능하다. 상어 아가리를 형상화한 이 팔찌는 무겁고 괴이쩍다. 하지만 차지 못하는 팔찌를 나는 오늘도 부지런히 모은다. 그저, 예쁘기 때문이다.



메종 마틴 마르지엘라의 팔찌다. 은이 아니어서 가볍고, 그 브랜드 특유의 쇠된 유머 감각이 있다. 여름이면 가장 자주 착용하는 팔찌다.



가로수길에 있는, 지금은 없어진 편집샵 아울렛에서 구입한 이탈리아 브랜드의 반지다. 너무 대담해서 자주 끼지 못할 것 같지만 의외로 단정한 맛이 있어서 종종 착용한다.



역시 아끼는 브랜드 언더커버의 팔찌다. 쇠로 된 철망을 그대로 뜯어내서 구부린 듯한 디자인이다. 날카로워서 차지 못할 것 같지만 마감이 매우 부드럽다. 이걸 끼면 ‘고스족’이 된 기분이 든다.



뮌헨의 한 편집샵에서 구입한 팔찌다. 이음새가 전혀 없이 뒤틀려 있는 모양새가 독특하다. 이걸 어떻게 만든건지 물어봐도 돌아오는 답변은 독일어 밖에 없었다.


당신은 그저 명동과 가로수길과 경리단 길을 걷다가 작은 액세서리 가게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과감하게 용기를 내어 들어가보라. 당신의 손가락과 팔에 딱 맞는 반지와 팔찌를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설레기 시작한다면 당신 역시 나와 같은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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