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도의 델리리룸 트레멘스
안녕, 무더위와 싸우고 있는 에디터B다. 오늘은 여름을 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소설 한 권과 맥주 한 병을 들고 왔다. 맞다. 잊힐 만 하면 돌아오는 맥주와 책의 만남 ‘맥북(麥book)’ 시리즈다.
나는 기대작을 좋아한다. ‘기대작’에 대한 각자만의 기준이 있을 거다. 내게 기대작이란 퀄리티와는 무관하게 도전과 새로움이 있는 작품들이다. 봉준호의 다음 영화는 내게 기대작이 아니지만, 그가 드라마를 연출하면 기대작이다. 송강호가 연기 변신을 하면 기대작이 아니지만(항상 변신하니까), 송강호가 감독으로 데뷔를 하면 기대작이 된다.
2019년 문학계의 기대작은 김애란의 첫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이다. 한국소설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아마 김애란이라는 세 글자는 크게 다가올 거다. 대중적으로는 덜 알려졌다. 소설가 김영하, 김중혁처럼 방송 활동을 해본 적도 없으니까. 그래서 김애란은 신비롭다. 그의 일상을 조금도 알 수가 없었다. 17년 만에 발간한 에세이집이 반가운 이유다.
수상 경력이 작가의 실력을 말해주는 건 아니지만 한두 번이 아니라 오랫동안 받아왔다면 말이 다르지 않을까. 한 권의 장편, 네 권의 소설집으로 이효석문학상, 신동엽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이상문학상, 동인문학상…정말 많다. 문학계의 아이유랄까.
예전에 내가 김중혁의 소설 <나는 농담이다>를 소개하면서 그의 문장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적이 있다. 나는 김중혁의 문체 못지않게 김애란의 것 역시 좋아한다. 두 사람의 글은 정말 다르지만 말이다. 내가 밑줄 그었던 것들을 소개해주고 싶어서 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뒤적거렸다.
“신기해요. 어떤 음악을 들으면, 그 곡을 제게 처음 알려준 사람이 생각나요. 그것도 번번이요. 처음 가본 길, 처음 읽은 책도 마찬가지고요. 세상에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려준 사람이 떠올라요. ‘이름을 알려준 사람의 이름’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건 사물에 영원히 달라붙어 버리는 것 같아요.”
-<너의 여름은 어떠니>中
나는 친구들에게 김애란의 문장을 ‘밑줄 치게 만드는 글’이라고 소개하곤 한다. 바람이나 쐴 겸 산책을 하는데,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계속 멈추게 되는 기분이랄까. 나무 한 그루, 꽃 한 송이를 눈에 담는 마음으로 밑줄을 긋게 된다. 특히 일상적인 단어들로 리듬감 만들어 내는 능력은 ‘와…’하고 소리 없는 감탄을 부른다.
예전에 한 인터뷰에서 읽었던 것 같다. 어떻게 글을 쓰냐는 질문에 “한 문장을 쓰면, 그다음 문장이 따라와요”라고 했는데, 그냥 천재인가 싶더라.
이쯤에서 <잊기 좋은 이름>에 대해 소개할 타이밍이지만, 나는 밀당의 귀재이기 때문에 잠시만 당신들을 밀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맥주 하나를 소개한다. 델리리움 트레멘스다. 이름이 어렵다. 잊기 좋은 이름이다. 그래서 골랐다.
농담이다. 이름이 정말 어렵긴 하다. 지금 기사를 쓰면서도 이름이 입에 붙지 않는다. ‘델리리룸 트레멘스… 델리리룸 트레멘스…’ 살면서 델리리움이라는 말도 트레멘스라는 말도 사용해본 적이 없으니까 어려울 법도 하다.
난 이 맥주를 보고 딱 두 번 놀랐다. 처음에는 핑크색 코끼리가 귀여워서, 두 번째 귀여움과는 어울리는 않는 알콜 도수를 보고. 무려 8.5도! 태국어처럼 디자인한 이름의 의미도 반전이다. 델리리룸 트레멘스는 ‘알콜중독에 의한 환각‘이라는 뜻이다. 무시무시하다.
술을 마시면 핑크 코끼리가 떠다니는 환각을 보게 된다는 속설을 차용해 핑크 코끼리를 캐릭터로 사용했다고 한다. 델리리움 녹터눔, 레드 등 다른 델리리움 시리즈에도 사용되었다.
<잊기 좋은 이름> 역시 핑크색 커버를 하고 있다. 표지를 보면 흰 커튼 휘날리는 창문이 보인다. 그렇다. 자세히 보면 핑크색은 창문이 달린 건물의 벽이다. 어떤 일러스트의 작품인지 궁금해서 앞날개를 폈다.
일러스트가 아니라 사진이더라. 포토그래퍼 Alper Yesiltas의 작품인데, 이스탄불에 사는 변호사이자 포토그래퍼였다. 여기서 더 놀라운 이야기. 그는 같은 창문을 무려 12년 동안 찍었는데, 홈페이지에 가서 보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나 건물이 무너지는 순간까지 사진을 찍었다. 궁금하다면 여기서 보자.
이 책의 편집자는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사진을 찍은 작가에게서 김애란의 태도를 봤던 것 같다. 김애란 역시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글만 써왔던 사람이니까. 그리고 저 창문 안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2006년부터 2018년까지 써놓은 산문을 보게 되는 거지.
솔직히 말하자면 처음 책을 훑어보고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신 에세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요즘 생각, 요즘 일상, 요즘 사건이 궁금했으니까. 내게 에세이집은 작가들의 SNS처럼 느껴지거든.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럴 수밖에 없겠다 싶더라. 첫 산문집이니까 당연하지 않을까. 지금까지 썼던 수필을 한군데에 모아 더 오래 기억하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썼던 산문집 <안녕의 안녕> 역시 그런 마음을 가지고 5년 동안 썼던 글을 모은 책이었다. 갑자기 책 장사 같지만 오해다. 나는 공적인 자리를 이용해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거든. 하지만 구매 링크는 여기 있다.
내가 읽어본 김애란의 작품은 데뷔작 <달려라 아비>를 포함해 <침이 고인다>, <비행운>, <바깥은 여름>이다. 정작 영화화되며 유명해진 <두근두근 내인생>은 아직도 읽지 않았고.
김애란 소설의 인물에게는 뚜렷한 특징이 있는데, 부자들이 없다는 거다. 대부분 가난하거나 서민이거나 뭔가를 상실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소설 속 사건이 권력과 싸우는 것처럼 엄청난 일이 아니라 친구끼리 다투거나 가족끼리 마음 상하는 것처럼 우리가 충분히 겪어 봤을 법한 이야기다.
내가 좋아했던 단편도 그런 줄거리였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후배와 관계가 깨지며 결국 주인공이 그 후배를 밀어내는 이야기(침이 고인다), 학원강사가 피라미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한때 자신을 따랐던 제자를 이용하는 이야기(서른). 소설은 슬프지만 긴장되는 이야기들이다.
<잊기 좋은 이름>에는 부모님이 자주 언급된다. 충남 서산에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린 시절 고스톱을 치다가 처음 만나게 되었다는 이야기(카드놀이), 어머니가 국숫집을 운영하며 자신을 꿋꿋이 키워 냈다는 이야기(나를 키운 팔 할은).
작가는 자신이 기억하고 싶은 이름을 에세이에 담았고, 그중 가장 잊고 싶지 않은 건 부모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작가가 불러주는 이름을 들으며 많은 이름을 떠올렸다.
나는 맥주의 이름을 떠올렸다. 카스, 버드와이저, 그 이름을 떠올리면 그 술을 마셨던 자리가 떠오르고, 지금은 소원해진 사람들이 떠올랐고, 결국 나의 20대를 떠오르게 했다.
라거로 시작한 스무 살의 나는 흑맥주, 바이젠을 지나 지금은 에일을 지나는 중이다. 델리리움 트레멘스 역시 벨지안 스트롱 페일 에일이다. 높은 도수에 겁먹지 말자. 향긋한 과일 향 덕분에 알콜맛은 그리 강하지 않다. 약간의 바나나향도 나고. 라거처럼 꿀떡꿀떡 마실 수 있을 정도는 아니지만. 98년도에는 시카고에서 개최한 월드 비어 챔피언십에서 세계 최고의 맥주로 선정되기도 했다고 하더라. 솔직히 세계 최고의 맥주라고 할 정도로 맛있지는 않지만, 전문가의 취향은 다른가보다 싶다.
내 인생 첫 스트롱 에일 역시 델리리룸 트레멘스였다. 작년, 광화문 탭퍼블리에 갔을 때였다. 이 맥주 저 맥주를 마시다 핑크 코끼리와 높은 도수를 보고 홀린 듯 마셔 본 거다.
솔직히 말하자면, 첫인상은 좋지 않았다. 8.5도의 맥주는 생각보다 강하게 느껴졌고, 기대했던 청량감이 없어서. 하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자 다시 한번 마셔보고 싶더라(탭퍼블릭에서 두 번 마신 맥주는 델리리움 트레멘스가 유일했다).
스트롱 에일을 한번 맛보니 다른 맥주는 심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델리리움 트레멘스는 알콜향이 강하지 않음에도 즉각적으로 취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이 맛을 알기 위해 나는 라거를 지나, 바이젠을 지나, 에일까지 도달한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매력이 아닐까 싶다. 마찬가지다. <잊기 좋은 이름>을 완전히 느끼기 위해서도 김애란의 소설들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특이하게도 이 맥주는 유리병이 아닌 도자기(ceramic)에 병입되어있기 때문에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전체는 아니고 겉만 칠해져 있다). 도자기에 보관되는 맥주의 좋은 점이란 빛을 완전히 차단시키기 때문에 변질을 방지하고 병 내에서의 2차 발효를 도와준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냥 재고가 없어서 쓴 거라고 하더라.
‘알콜중독에 의한 환각’을 마시며 읽기에 좋은 킬링 파트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부사와 인사’ 편의 한 단락이다.
“나는 부사가 걸린다. 나는 부사가 불편하다. 아무래도 나는 부사를 좋아하는 것 같다. 나는 이 말을 아주 조그맣게 한다. 글 짓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부사를 ‘꽤’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아주’ 좋아한다. 나는 부사를 ‘매우’ 좋아하며, 절대, 제일, 가장, 과연, 진짜, 왠지, 퍽,무척 좋아한다. 등단한 뒤로 이렇게 한 문장 안에 많은 부사를 써보기는 처음이다. 기분이 ‘참’ 좋다.”
이 단락에서 느껴지는 리듬감을 보라. 기분 좋은 환각이 느껴지는 것 같다. 꼭 사지 않더라도 서점에 가면 읽기를 권한다. 86페이지에 있는 글이다.
이런 식의 통통 튀는 리듬감은 김애란의 다른 소설에서는 본 적이 없어 ‘무척’ 흐뭇해 하며 읽었다. 부사를 좋아하지만 부사를 마음껏 쓰지 못한 작가가부사를 이렇게 마음껏 쓰다니. ‘참’ 좋았겠다.
그동안의 김애란 소설은 젊은 세대의 고충을 그려냈고, 그래서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면 확실히 이번 산문집은 유쾌하다.
그중에서 딱 두 편만 추천한다면 자신의 책을 소개하는 팟캐스트를 듣는 ‘한 여름밤의 라디오’, 중고책에 꽂혀있는 2개의 수강신청표를 보고 두 사람의관계를 추리해나가다 결국 전화까지 하게 되는 ‘여름의 풍속’. 작가의 행동이 엉뚱하고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했다. 아, 애란씨 재미있는 분이었네.
작가는 책의 제목을 ‘잊기 좋은 이름’이라고 했지만, 그가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잊기 좋은 이름’이란 없다는 거다. 그래서 올여름 서늘한 곳에 간다면 이 한 권을 들고 가면 좋겠다. 바쁘게 사느라 잊고 살았지만 소중했던 사람들이 떠오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