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을지로를 잘 모른다. 어떤 식당의 꼬치구이가 제일 맛있는지, 어느 바의 하이볼이 최고인지 물으면 대답하기 힘들다. 을지로에는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훨씬 많으며, 언제 그곳을 가게 될지 생각하면 아득하다.
다만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이거다. ‘그래, 내가 이 맛에 돈 벌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괜찮은 집을 소개해주는 거다. 멋진 분위기와 평균 이상의 맛을 가진 곳들. 오늘 소개할 세 곳이 그런 곳이다. 서서 먹는 스탠딩바, 청계천이 내려다보이는 바 그리고 세운상가 3층에 있는 야장이다. 준비가 되었다면 나를 따라오라.
이곳의 이름은 전기다. 처음 여기를 알게 된 건 가오픈 가게를 잘 찾는 한 분의 인스타그램 타임라인 덕분이었다. 하지만 몇 장의 사진만으로 알 수 있는 정보는 많지 않았다. 가오픈 중이며 다국적 요리를 취급하고 서서 먹는 술집이라는 점 빼고는 말이다. 서서 먹는 술집이라니. 나는 이른 시일 내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는 길이 왠지 낯익다 싶더니 내가 예전에 소개했던 애프터 저크 오프 바로 옆이었다. 이미 많이 알려진 십분의 일도 바로 그 골목에 있으니, 만약 전기가 만석이라면 몇 걸음만 옮겨도 다른 곳을 찾을 수 있겠다.
문을 열고 들어가 처음 마주하는 건 ‘ㄷ’자 테이블이다. 정말로 의자는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이 ‘레알’ 선술집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선술집의 원래 의미는 서서 마시는 술집에서 유래했다. 가방은 테이블 밑에 있는 고리에 걸면 된다.
1910년대 한국에서 이런 형태의 선술집이 처음 등장해 꽤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저렴하게 후딱 술 한잔할 수 있는 곳이어서 한국인, 일본인 모두 좋아했다고. 일본 사람들은 선술집을 다치노미라고 불렀는데 이 또한 ‘서서 마신다’라는 뜻이다. 다치노미는 1990년대 말 일본 경제의 버블이 붕괴되며 장기 불황이 지속되자 유행했다. 앉아서 먹는 곳보다 저렴하니까.
전기의 사장님은 한때 금융기관에서 일을 하다가 자유로운 삶을 살고 싶어서 퇴사를 했다고 한다. 그 후로는 세계 각지의 술집을 다녔는데, 그중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에서 경험한 서서 마시는 술집의 분위기가 좋아서 이렇게 한국에서도 열게 된 것이다.
공간이 넓지는 않았지만 거울을 사방에 붙여 넓어 보이는 효과를 냈다. 바 테이블 특성상 여럿이 술을 마시는 건 어렵지만, 위 사진처럼 주방과 붙어있지 않는 별도의 테이블을 마련해놨다. 물론 여기도 의자는 없다.
나는 멘보샤(7,000원)와 생맥주를 한 잔 시켰다. 멘보샤는 하루 여덟 세트만 파는 한정 메뉴니 가능하다면 꼭 먹어보면 좋겠다. 빵 사이에 있는 새우살의 두께가 아주 실하고, 느끼한 맛도 없다. 토마토 케첩을 베이스로 매콤한 맛을 내는 소스에 찍어 먹으면 하루의 노곤함이 풀릴 거다. 이 분위기에서는 당연히 맥주도 빠질 수 없지. 생맥주는 맥스가 제공된다.
전에 왔을 때는 스지된장조림 도테야끼, 감자 사라다와 함께 마르스 하이볼을 마셨는데, 바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 일식뿐만 아니라 볼로네제파스타, 이탈리아풍 곱창요리 등 다국적 요리를 취급한다.
기본 안주로는 일본에서 많이 먹는 구운 풋콩(에다마메)이 제공되는데, 이것 또한 고소해서 계속 손이 가더라. 그 위에 올라간 건 그라나파다노 치즈다. 함께 먹으면 별미. 예전에 함께 갔던 친구는 주문한 안주가 나왔는데도 계속 콩을 까먹었었다.
서울 중구 수표로 42-19
화-토 18:00 – 24:00 / 월요일, 일요일 휴무
을지로에는 유독 높은 층에 위치한 공간이 많다. 3층, 4층 그리고 5층에 위치한 곳도 있다. 더군다나 연식이 되는 건물에 엘리베이터를 기대하는 것도 무리. 그러니 올라갔다가 헛걸음하지 말고 꼭 자리가 있는지 전화로 확인하도록 하자. 몸이 힘들면 마음이 힘들고 마음이 힘들면 입맛이 없는 법이다.
향연은 6층에 있다. 여기에 정말 바가 있어? 라는 생각이 들 때쯤 분위기 있는 공간이 하나 나오는데, 그곳은 향연이 아니니 한 층 더 올라가도록 하자. 우리 아버지가 그런 말을 했었다. 노력은 쓰고, 열매는 달다고. 힘들게 향연에 도착했으면 이제 경치를 즐길 시간이다. 을지로에서 이 정도로 높이 있는 공간은 찾기란 힘들거든.
향연은 패션 회사의 동료였던 세 사람이 함께 만든 곳이다. 내가 방문한 날은 두 분이 가게에 나와 있었다. 헥헥거리며 자리에 앉은 나는 목이 마른 와중에도 왜 향연이라고 지었는지가 궁금했다. 남자분이 생수 한 컵을 주며 설명했다.
“향연의 어원에는 함께 술을 마신다는 의미가 있거든요. 그리고 플라톤의 책 <향연>에 술 마시며 대화하는 분위기가 나오는데 이곳을 그렇게 연출하고 싶었어요.”
<향연>은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이 쓴 대화체의 책이다. 책을 보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술 마시면서 무엇이 사랑인지에 대해서 대화를 하는데, 잘 생각해보면 우리도 매일 하는 거다. “야, 걔랑 걔랑 사귄다는데 너무 안 어울리지 않냐? 둘이 성격도 너무 다르잖아.” “뭐 어때, 결혼한 선배가 그랬는데 남는 건 얼굴이라던데?”
가운데 자리를 차지한 큰 테이블은 그런 컨셉에 딱 맞지 않나 싶다. 테이블을 가득 채워 넣은 촛불들까지도. 이곳이 6층인 이유 역시 외부와 단절된 느낌을 주고 싶어서라고 하니 여기는 오직 손님들의 대화를 위한 공간인 셈이다.
얼린 청포도와 산딸기가 나왔다. 기본으로 제공되는 안주는 아니고 가끔 준비될 때만 서비스로 주는데 내가 운이 좋았다. 청포도를 얼려먹은 건 처음이었는데, 한 입 베어 먹으니 입안에 청포도향이 사르르 퍼졌다. 청포도맛 슬러시를 먹는 것처럼 시원했다.
해가 길어진 탓에 저녁 늦게까지 노을이 보이지 않았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지만 남자분은 조금만 더 있기를 권했다. 해가 떨어지면 더 멋있어질 거라고 하며. 사실 향연을 추천한 사람은 에디터H였는데, H도 해 질 녘 풍경을 꼭 보고 오라고 했으니 더 있어야겠다 싶었다.
기다리는 동안 ‘김부각과 명란마요’을 먹었다. 이 명란마요는 매일 직접 만드는 건데, 향연의 창업자 중 한 명의 할머니가 젓갈로 유명한 강경에서 보내준 백명란으로 만든다고 한다. 짜지 않고 자극적이지 않은 맛이었다.
혼자 온 탓에 대화할 사람이 없었고, 그 대신 김부각을 와구와구 먹었다. 그러는 사이 창 밖에는 해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혼자 와인을 홀짝이는 시간도 좋았지만, 친구와 와인을 마시며 ‘사랑이 뭐냐’에 대해 얘기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가도 좋은 곳은 함께 가기에도 좋은 곳이니까.
“이제 퇴근하시겠네요?” 취재 차 왔다는 걸 아는 남자 주인분이 물었다. 나는 아직 한 군데가 남았다고 말했다. 바로 다전식당이다. “거기 지금 가면 자리 없을 걸요? 여기서 웨이팅이 얼마나 남았는지 보이는데, 잠시만요. 지금 두 분 있는 거 같아요.” 친절하게도 다전식당을 못 갈 경우를 대비해 백만불식품이라는 식당도 추천해줬다. 나는 일단은 다전식당으로 가보기로 했다.
서울 중구 청계천로 166-1 6층
화-금 18:00 – 23:00 / 토요일 17:00 – 23:00
청계상가 밑을 지나가면 머리 위에서 빗소리가 들린다. 고기가 구워지는 소리다. 고기 냄새는 그 일대에 진하게 퍼져있다.
다전식당은 청계상가 3층에 있다. 세운상가와 청계상가를 이어놓은 다리 끝에 위치하고 있어서 찾아가기 어렵지 않다.
이곳의 야장을 보면 신세계다. 주변은 휑한데 다전식당의 손님들은 열심히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다. 멀리서 보면 그 분위기가 이질적이고, 신기하다. 한국의 옥토버페스트라고 하는 만선호프를 봤을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여긴 또 다른 느낌이다.
맛을 논하는 게 큰 의미가 있을까 싶다. 이곳은 분위기가 메인 디쉬다. 나는 고추장 철판을 2인분 주문했는데, 혼자 왔다고 하니 굉장히 놀라던 아주머니의 표정이 글을 쓰는 지금도 생생하다. “혼자 왔다고? 조금 뒤에 일행 안 오고?” 나는 혼자 갔지만, 여러분은 부디 여럿이 가길 바란다.
고추장 철판은 제육 요리이고, 오징어 볶음도 있는데 둘 중 하나를 고를 수 없다면 섞어 철판을 주문하면 된다. 이곳은 주문하는 것만 제외하면 모든 것이 셀프 시스템이다. 상추, 김치, 고추장아찌 등 다양한 사이드 메뉴는 무한 리필이지만 이것 또한 철저한 셀프. 술도 스스로 냉장고에서 꺼내와야 하며, 제육도 직접 볶아야 한다.
상상하는 고추장 제육의 맛이었다. 여긴 맛 때문이 아니라 분위기 때문에 유명해졌으니까.
혼자 제육을 볶았을 걸 생각하면 외로웠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다른 테이블의 분위기를 관찰했는 게 꽤 재미있었다. 그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을지로의 매력에 대해 생각했다.
을지로는 모두가 좋아하는 곳은 아니다. 낡은 건물을 선호하지 않는 사람도 당연히 있을 수 있고, 노포보다는 쾌적한 식당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그래서인지 을지로는 정말 마음 맞는 편한 사람들끼리 오게 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서먹한 분위기의 테이블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친해지지 못한 커플이나 어색한 회식자리는 없었다.
이 곳의 분위기가 궁금하다면 많은 사람들이 인증한 사진을 인스타그램을 통해 참고하길 바란다.
배불리 먹고 을지로3가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항연에서 추천받은 백만불식품이 생각났다. 아직 9시 밖에 되지 않았고, 근처라고 했으니 구경이라도 해보자 싶어 찾아갔다.
허름한 골목 끝에 백만불식품이 있었다. 백만불이라는 이름부터 간판의 폰트까지 을지로스럽달까. 이곳이 로컬들이 추천하는 맛집이라니, 들어가고 싶었지만 다음을 위해 미루기로 했다. 다음에는 꼭 이곳이 아니더라도 종로구의 노포를 소개해야겠다.
서울 중구 청계천로 160 청계상가 바 301
매일 09:00 – 21:00 / 일요일 휴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