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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May 13. 2020

어떤 서점에서도 팔지 않는 소설

7년 만에 출시한 김영하 장편소설 <작별인사>

안녕, INTJ형 인간 에디터B다. 최근에 모바일로 MBTI 검사를 했다. 테스트 결과에 따르면, 나란 사람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결단력이 있으며 야망이 있지만 굳이 표현하지 않는 인간이라 한다. 이 결과표를 대학로에 사는 친구S에게 보여주니 의외의 결과라며 아직 “내가 너에 대해 잘 모르나 보다”라고 말했다. 나는 그 친구에게 긴말 없이 김국환의 ‘타타타’ 가사를 읊었다. ‘네가 나를 모르는데/난들 너를 알겠느냐’ 아무리 친해도 모르는 관계, 그게 인간 관계다.


오늘따라 인간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유는 그럴 만한 소설을 읽었기 때문이다. 바로 김영하의 장편소설 <작별인사>.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7년 만에 출간하는 장편소설이라 장바구니에 담을 때부터 기대를 퍽 많이 했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른 채 냉큼 주문했다. 정말이다. SF소설인지도 모르고 김영하가 멋있게 다리를 꼬고 있길래 결제부터했으니까. 첫 장을 폈을 때 로봇 얘기가 나오길래 ‘아…이거 SF였어…?’하며 꽤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책을 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사는 것이 첫 번째,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하는 게 두 번째. <작별인사>를 사는 방식은 어느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서점에서는 팔지 않는 책이기 때문이다. 손에 넣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독서 앱 ‘밀리의 서재’를 구독해야 한다. <작별인사>는 밀리의 서재 오리지널 시리즈로 나온 책인데, 넷플릭스를 결제해야 <킹덤>을 볼 수 있듯 밀리의 서재를 구독해야 <작별인사>를 받아볼 수 있는 시스템이다. 다른 방법은 없다.

나는 전자책을 거의 읽지 않는다. 집에 리디페이퍼가 있지만 사용 횟수는 고작 일 년에 두 번 정도에 불과하다. 설에 한 번, 추석에 한 번. 먼 길을 떠날 때가 아니면 쓰지 않는 셈이다.


종이를 넘기며 읽는 방식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페이지를 넘기며 읽을 땐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13페이지와 130페이지는 같은 화면에 숫자만 달라지는 게 아니라 117페이지의 쪽수를 넘겨야 한다.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길 때마다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전자책에서는 어쩐지 계속 제자리에 머무는 기분이다. 그런 사람이 왜 밀리의 서재를 구독했냐고? 그야 김영하의 신작을 보기 위해서지. 다른 이유는 없다. 리디북스도 하루빨리 리디셀렉트 오리지널 시리즈를 만들어주길 강력하게 촉구한다.

표지가 화려하다. 조명 때문에 더 화려하게 보이지만, 원래 색감도 못지 않다. 표지 일러스트가 누구의 작품인가 보니 테이프 아티스트 조윤진의 작업물이었다. 테이프를 붙여 그림을 만드는 아티스트인데, 여러 색의 테이프를 겹쳐 쓰기 때문에 컬러풀한 비주얼로 나타나는 거다. 작업물이 궁금하다면 여기서 구경을 하자.

<작별인사>는 작가의 말 포함 173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다. 장편소설 치고는 짧은 편이다. 덕분에 금새 읽는다. 장편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면 다 읽었다는 뿌듯함과 뒷이야기가 궁금한 마음이 공존하는데, <작별인사>는 후자가 확실히 강했다. 대서사시의 비긴즈 혹은 프리퀄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SF 장르란 흥미로운 카테고리다. 영화에서는 우주선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제작비를 투입해야 하지만, 소설에서는 작가가 이렇게 쓰면 된다. “우주선이 있다.” 우리 머릿 속엔 각자의 우주선이 뿅 하고 나타난다.


우주선 100대가 뒤엉키는 전투? 그것도 쉽다. “100대의 우주선이 서로 폭격하기 시작했다.”라고 쓰면 된다. 소설에서는 상상력을 구현하는 데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사이즈의 한계가 없다. 그러니 소설 속 우주의 사이즈는 온전히 작가의 역량에 달려있는 셈이다.

제목을 읽은 분들은 알겠지만 오늘 시리즈는 맥북(麥book)이다. 맥주와 책을 쌍으로 연결하여 소개하는 디에디트의 유서 깊은 시리즈. 일단은 책 얘기부터 시작할까? 참고로 후반부의 결정적인 스포일러는 자제하겠지만 중반부터 드러나는 작은 스포일러도 용납할 수 없다면 이쯤에서 뒤로가기를 누르는 편을 권장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배경은 미래의 서울. 주인공의 이름은 철이라는 소년. 철이의 아버지는 휴먼매터스 랩이라는 일류 로봇 연구소에서 일하는 학자인데, 두 사람은 어머니 없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정체를 알 수 없는 휴머노이드에게 소년은 납치되고 아버지에게 돌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그 과정에서 철이는 자신이 인간이 아니라 로봇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어떻게든 아버지에게 돌아가려 하는데…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우연히 사건에 휘말린 뒤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한 소년의 모험담’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귀환 장르가 그렇듯 주인공은 그 과정에서 자신이 모르던 세계를 알게 되고 혼란스러워하다가 마침내 정신적으로 성숙한다. <겨울왕국2>도 비슷한 구성이다.


철이는 납치되고 이상한 시설에 갇히는데 그곳에는 팔 없는 로봇, 깡패 같은 로봇, 사기꾼 같은 로봇도 있다. 온실 속에 살던 화초같은 꼬마가 강제로 군에 입대한 느낌이다. 불쌍한 철이. 다음 문단에는 스포일러가 있으니 주의 바란다.

철이는 사실 로봇이 맞다. 인간이 느끼는 오감과 감정, 인의예지 같은 것들을 그대로 구현해낸 최첨단 로봇이다. 하지만 철이는 자신을 만들어준 박사를 아버지라 믿으며 살아왔던 것이다.(아버지가 왜 거짓말했는지는 소설을 참고하길) 그러니까 <작별인사>라고 제목을 지은 의도를 유추하자면 내가 몸담고 있던 익숙한 세계와 작별을 의미하는 셈이다.


이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에 독자는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될 거다. 인간다움이라 심오하고도 철학적인 질문이다. 인간과 생김새도 완전히 똑같고 감정도 느끼는 로봇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일까 로봇일까? 인간다움이란 무엇이고, 인간이 아닌 존재가 인간다움을 얻었을 때는 인간으로 봐야 하는가? 뭐, 대학교 교양 수업 때 들었을 법한 그런 질문들 있지 않나.

그리 유쾌한 소설은 아니다. 철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따라가다보면 괜히 마음만 씁쓸해 뿐이다. 이때쯤 씁쓸해진 속마음을 중화시키기 위해 맥주 한 잔을 마시자.

오늘 마실 맥주는 남산 에일이다. 남산 에일은 GS25에서 선보이는 다섯 번째 랜드마크 시리즈다. 지역의 랜드마크 이름을 따서 짓는 게 이 시리즈의 특징인데, 이전 제품으로는 경복궁, 광화문, 백록담, 성산일출봉 등이 있었다.

GS25에서는 기획과 유통을 맡고 국내 브루어리가 양조를 맡았다. 백록담과 성산일출봉은 제주맥주와 협업을 했고, 광화문은 아크비어, 경복궁과 남산 에일은 카브루와 손을 잡은 제품이다. 최근에 출시된 남산 에일뿐만 아니라 다른 랜드마크 시리즈도 다 마셔봤는데 모두 만족스러웠다.


서울과 제주의 랜드마크만 골랐다는 지역편중이 아쉬울 뿐, 맛에서는 불만을 찾기 어려웠다. 세련된 일러스트에 준수한 맛까지, 구매를 자극하는 포인트가 많은 맥주 시리즈다. 편의점 맥주 냉장고 앞에서 “오늘은 뭘 마셔야 잘 마셨다고 소문이 날까…” 혼잣말하는 사람들에게는 디자인과 네이밍으로 픽미를 외치는 맥주라 할 수 있다.

힙한 척하기 위해 랜드마크 이름만 갖다붙인 건 아니다. 남산 에일에는 시트라홉과 모자익홉이 들어가고 진달래꽃을 첨가했는데 남산 시점에서 내려다본 한국의 희로애락을 홉으로 표현했다고 하더라. 한 모금 마시고 ‘아! 희로애락이 느껴져!’ 이런 건 아니지만 시트라홉을 사용해 과일향이 은은하게 난다.

탄산감도 적당히 있어서 라거만 마시던 사람도 즐길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쓰디쓴 에일만 좋아하는 순수에일파들의 입맛은 사로잡지 못할 것 같다. 그런 분들은 경복궁IPA를 마시면 된다. 쓴맛부터 과일맛까지 취향다양한 맥주러버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랜드마크 시리즈를 보니 이거 왠지 김영하와 닮은 것 같지 않나?(좋아 자연스러운 흐름이야)

아마 당신은 김영하를 알 거다. 책을 읽어 보진 못했어도 이름은 들어 봤을 거다. 김영하는 유명한 편이니까. 김영하 정도면 독자와 평단에게 동시에 인정받는 몇 없는 작가 아닌가. 영화 감독에 비유하자면 봉준호에 빗댈 수 있겠다. 작품성과 대중성이라…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일은 말처럼 쉽지 않다. 한 명의 사냥꾼이 두 마리 토끼를 어떻게 잡을 수 있을까 상상해보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 수 있다. 두 마리 토끼가 비슷한 경로로 뛰어가거나 토끼가 발이 느리거나 사냥꾼이 미리 덫을 설치해놓았거나 쌍권총을 쏘는 게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니 <알쓸신잡>같은 예능프로그램에도 나와서 사람들을 웃기기도 하고, 문학계의 그랜드슬램이라 불리는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황순원문학상까지 받은 건 박수칠 만한 일이 맞다.


소설 얘기는 안하고 작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이유는 줄거리를 어느정도 말해서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작별인사>에서 말하는 메시지와 작가의 태도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문학은 우리가 모두 다르다는 걸 알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글을 읽고도 나와 친구가 다른 의견을 낼 수 있다.
그때 나는 ‘친구가 내가 알던 아이와 다르구나’하는 느낌이 드는데 그게 정상이다.”


<알쓸신잡>에서 했던 말이다. 김영하는 천 명이 소설을 읽으면 천 개의 감상이 나온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정된 생각을 경계하는 작가다. 이것을 편견 없이 세상을 보는 태도라고 이해할 수도 있겠다. 이 말이 어떤 점에서 소설과 비슷하냐고? 후반부를 보면 로봇과 인간이 대립하는 상황이 생기는데, 그 파트의 인간은 참 오만하다. 인간은 짱이고,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고 그렇단다. 그 파트를 읽으면 ‘인간은 육체보다는 정신이 먼저 퇴화해서 멸종하겠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우물 안에 갇혀서 자기만 옳다고 믿는 그런 류의 사람들이 떠오른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꼰대라고 부르곤 한다.


소설을 읽고나면 마음이 착 가라앉는다. 영화나 드라마와는 다른 독서의 매력이다. 들떠서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것보다 혼자 맥주나 마시고 싶어진다. 다음에는 또 어떤 책을 읽으며 술을 마셔볼까. 글쎄. 왠지 다음번에도 밀리의 서재 오리지널을 읽어보고 싶다. 다음 소설은 김훈의 무협소설 <달 너머로 달리는 달>이라고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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