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대도시의 사랑법>이라니. 책 제목 참 대담하기도 하지. 대도시에서 하루하루 피곤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법’을 이야기하는 책이라면 누구나 홀린 듯 첫 페이지를 펼치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읽기도 전에 주변에서 이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수없이 들었다. (내 주변은 다들 나처럼 사랑꾼이거든) 영화를 보기 전 스포 당하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나는 그때마다 두 귀를 막은 채 안 들으려 애써보거나 “아직 안 읽었으니까 너무 많이 얘기하진 마”라며 정색을 해야 했다.
<대도시의 사랑법>은 네 개의 단편 소설을 묶은 책이지만 주인공이 한 명이고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에 ‘연작소설’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재미있는 점은 1인칭 시점으로 쓰여있는 데다 주인공 이름이 작가와 똑같기 때문에 소설인지 아닌지 헷갈릴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첫 장을 펼치자마자 이 글들을 순식간에 읽게 될 것이라 직감했다. 어차피 대도시의 사랑은 진짜 같기도 가짜 같기도 한 법이니까.
이 책에 어울릴 술을 고를 때는 큰 망설임 없이 사워 에일을 선택했다. 새콤한 첫 맛이 입안 가득 침을 확- 고이게 만들도록 자극적이라는 점, 예쁘장하고 팬시한 과일향이 퐁퐁 솟아나며 사랑스러운 기분이 된다는 점이 마치 누군가에게 한눈에 반해 끌리는 기분과 닮았다고 생각하거든. 복숭아? 열대 과일? 어떤 프루티함이 어울릴까 고르다 보니 자연스럽게 베리 느낌 가득한 구스 아일랜드의 질리안을 집어 들게 됐다.
곳곳에 매장도 생기고 이제는 편의점에도 판매되기 시작하면서 ‘구스 아일랜드’라는 브랜드는 꽤나 친숙해졌지만, 사실 구스 아일랜드는 고가의(2만 원 내외) 잘 만든 맥주들을 다양하게 보유하고 있다. 와인병처럼 큼지막한 720ml 사이즈에 복잡다단한 맛을 가진 맥주들이다. 오, 그렇다면 한 단편에 반 잔씩, 4번에 걸쳐 나눠 마시면 되겠군. 그렇게 생각하며 책을 펼치고 맥주병을 땄다.
첫 잔. 사워 에일은 역시나 첫 잔이 가장 강렬하다. 머리는 새콤함을 예상하고 준비하지만 침샘은 그렇지 못하니까. 하지만 첫 단편 [재희]에서 “정조 관념이 희박하고, 아니 희박하다 못해 아예 없는 편이며 그런 방면에서는 각자의 세계에서 좀 유명하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재희와 ‘나’의 이야기가 워낙 혼을 쏙 빼놔서 샤워 에일의 자극적인 맛을 잊게 만들 정도였다.
사랑 이야기라더니, 게이인 ‘나’가 여자인 재희와 동거!? 어쩌면 대도시에서 사랑밭(?)에 구르기에 가장 필요한 것은 친구와의 끈끈한 애정이겠구나. 그리고 그런 애정도 연애처럼 한시절이 지나면 흩어지거나 멀어지기 마련이고.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의 끈끈한 친구들을 떠올렸다. 아, 벌써 센치해지네.
두 번째 잔. 새콤하다 못해 시큼한 사워 에일의 맛에 혀가 좀 적응이 되면 그때부터 풍부한 과일의 향이 느껴진다. ‘질리안’은 딸기를 넣어 발효했기 때문에 딸기와 베리류의 향이 압도적이다. 킁킁. 냄새를 맡으면 새콤달콤하고 사랑스러운데 한 모금 마시면 산미가 확 느껴져서 속았다! 싶은 기분이 들 정도다. 두 번째 단편 [우럭 한 점 우주의 맛]도 그렇게 알면서 속아주는, 아니 알면서 속아버리는 사랑 이야기다.
“내가 아닌 존재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순식간에 그라는 세상의 일부가 되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 “우리가 무슨 관계인 것 같아요?” “사랑, 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죠?” 주인공인 영이가 사랑하는 형에게 그 말을 듣는 순간, 질리안의 시큼한 맛이 혀뿌리를 덮쳐서 나까지 이를 꽉 깨물게 되었다.
세 번째 잔. 이 책이 제목이기도 한 단편 [대도시의 사랑법]을 읽으면서 익숙해진 신맛 사이사이로 피어오르는 꿀의 달콤함을 느꼈다. 부드러운 바닐라의 향도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오, 이 맥주에 이런 면도 있네. 그런 마음과 비슷하게 규호와 연애하는 영을 보면서 혼잣말을 하는 것이다. 오, 얘가 이런 사랑도 할 줄 아네?
하긴, 한 사람이 하는 사랑의 방식이 얼마나 다양할 수 있는지 알지. 알고 말고. 달짝지근한 것 같으면서도 뭔가 새콤시큼한,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우습고 애틋한, 그래서 더 특별한 둘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책장을 넘기는 손이 자꾸 멈췄다. 문장에 번번이 걸려 넘어졌다. 내게도 생각나는 장면들이, 추억들이 있어서. 뭐야, 취하려나봐. 이제 마지막 잔인데.
네 번째 잔. 달콤함 뒤로 구수함과 뭔가 알 수 없는 곡물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올라온다. 병에 술이 남아 있어서 자꾸자꾸 따르고 싶어진다. 아직 미련이 남은 한 자꾸자꾸 떠올리게 되는 옛 애인처럼. 마지막 단편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헤어진 이후 영과 규호의 가장 아름다웠던 한때를 회상하는 이야기다.
사랑은 다 끝나고 나서 돌아보면 과연 뭐가 진짜인지,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지, 취한 사람처럼 혼란스러워지니 마련이지. 책을 덮고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아니다. 지금 내 머릿속이 복잡한 건 8.6도의 720ml짜리 맥주 한 병을 혼자 다 비워서 그런 거다. 근데 좀 아쉽네. 딱 한 잔만 더 마실 순 없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