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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에디트 Jun 11. 2020

술 마셔라 술 마셔라, 유혹하는 시집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를 읽으면 그랑 마니에르가 당긴다 

안녕. 글 쓰고 향 만드는 주정뱅이…가 아니고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햇살은 따끈하고 바람은 선선하고, 어쩔 수 없이 ‘여행하기 참 좋은 날씨네’ 하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안 그래도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택 근무 등등으로 활동 범위까지 좁아져 버렸으니. 마음은 자꾸 여기가 아닌 어딘가를 꿈꾸게 된다. 그래서인지 주변에 국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비행기를 타고 갈 수 있는 유일한 섬(!)인 제주의 인기는 인스타그램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주말이면 최소 2명 이상의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제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뭐야, 뭐야. 나만 제주 항공권 없어….

대신 여행가는 기분으로 이원하 시인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집어 들었다. 201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던 등단작의 시 제목을 그대로 첫 시집 제목으로 가져와서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그때 시 제목을 보고 웃었다가 시 내용을 보고 머리가 띵-해졌던 기억이 있거든. 좋아서.

시를 읽어내려가면서 깨달았다. 아니, 이 사람 제목 천재였구나…? 등단작 제목만 유별나게 좋은 게 아니라 모든 제목이 다 좋아서 시인이 특출나단 걸 깨달았다. 에디터 생활을 근 10년 하면서 나에 대해 깨달은 여러 슬픈 사실 중 하나가 ‘나는 제목 바보’라는 거였다. 그래서 그런지 이원하 시인처럼 제목 천재를 만나면 막무가내로 부러운 마음이 치솟는 것이다.


풀밭에 서면 마치 내게 밑줄이 그어진 것 같죠

마음에 없는 말을 찾으려고 허리까지 다녀왔다

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그늘을 벗어나도 그게 비밀이라면

꿈결에 기초를 둔 물결은 나를 대신해서 웃는다


시의 첫 줄을 읽기도 전에 제목에서부터 시가 좋아지는 경험을, 나는 이 시집을 통해 처음 경험했고 여러 번 경험했다.


코스모스는 매년 귀밑에서 펴요

귀밑에서 만사에 휘둘려요
한두 송이가 아니라서
휘둘리지 않을 만도 한데 휘둘려요

어쩌겠어요

먹고살자고 뿌리에 집중하다보니
하늘하늘거리는 걸 텐데
어쩌겠어요

_코스모스가 회복을 위해 손을 터는 가을 中

시집 속에는 수국, 귤, 동백, 오름처럼 제주가 떠오르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아예 ‘세화’라는 제주의 지명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시집을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몸은 육지에 있지만 마음은 저 멀리 섬으로 조금씩 다가가는 느낌이 들었다. 바다, 파도, 바람, 눈, 물결, 노을… 시인이 적어둔 단어들 안에서 어떤 풍경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제주가 해내는 일 같기도 했다.

그래서 이 시에 곁들일 술을 고르는 일이 어려웠다. ‘제주’라는 이름이 들어간 맥주들이 여럿 있으니, 그중 하나를 매치하면 되지 않을까? 쉬운 마음으로 후보들(!)을 마셔보았지만 대부분 상큼한 시트러스 향이 어우러지는 청량감 있는 맥주들이었다. 어, 이게 아닌데. 향긋하지만 가볍지 않고, 들이킬 땐 달큰한데 뭔가 쌉쌀씁쓸한 여운이 남고, 마시고 나면 괜히 마음 복잡하게 하는 그런 면이 있는 술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이 시집이 그런 것처럼.


밤이 뛰어오죠
이제는 헤어질 시간이죠
노을 가까이에 다가갈 방법을 알지만
오늘은 날이 아니란 것도 알죠

그는 노을과 함께 곧 이 섬을 떠나죠
그뿐이고 그러니 오늘뿐이고
모든 것들은 원래 다 그렇죠

봄날의 꽃처럼
한철 잠깐이라고 생각하면 편하죠

올해는 오늘까지만 아름답다,

이렇게요

_노을 말고, 노을 같은 거 中

결국 이번에도 또 술 찬장에서(!) 술병을 하나 꺼냈다. 그랑 마니에르. 이 술이면 좋을 것 같아서. 꼬냑에 오렌지 향을 더한 그랑 마니에르는 일종의 리큐어다. 칵테일뿐 아니라 제과 제빵에서 오렌지 향을 내기 위해 많이 쓰이는데, 그만큼 향이 풍부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이 난다. 시집에 등장하는 귤이나 한라봉은 아니지만 오렌지면 친척급이잖아?

오렌지 리큐어라니 달달한 술이라고 상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랑 마니에르의 도수는 무려 40도라고. 종종 핫케이크에 그랑 마니에르로 플람베(센 불 위에서 조리 중인 요리에 주류를 더하여, 단시간에 알콜을 날리는 요리법)를 해서 먹는데, 그럴 때면 술안주가 술보다 더 독해지는(!) 이상한 상황이 된다. 하지만 달콤하면서 동시에 독한 오렌지의 향이 달콤하게 퍼지는 그 찰나는 정말 좋거든.


한라봉 입술엔 쌓인 것들이 많다
나도 그 위에 함께 쌓여 있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렇게 쌓여 있을 것이다
겹쳐 있는 게 좋아서가 아니라
한동안, 이라는 기간이 좋은 것이니까”

_ 환기를 시킬수록 쌓이는 것들에 대하여 中


오렌지 리큐어가 들어가는 칵테일이라면 어디든 그랑 마니에르를 쓸 수 있다. 단숨에 칵테일을 ‘고급’으로 올려놓는 치트키 역할도 한다. 하지만 단독으로 마실 때만 느낄 수 있는 매력도 있다. 그랑 마니에르의 베이스(?)는 꼬냑인 셈인데, 꼬냑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도 그랑 마니에르만은 좋아한다. 뭐랄까. 어딘지 모르게 중간에 걸쳐있는 듯한 독특함이 있다. 예를 들어, 어른스럽지만 완전한 어른은 아닌듯한 느낌. 웃고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 발랄함 속에 숨겨진 담담함, 침착함 속에 숨겨진 서툰 질투 같은.

온더락으로 마시기엔 다소 무리가 있는 독한 술인데도 향이 좋아서 자꾸 홀짝이게 된다. 그러면서 시를 읽다 보니 하나둘 생각나는 얼굴들이 있어서 메시지를 보냈다. “네가 생각나는 시가 있어.” 받는 이들은 스물의 끝과 서른의 중반 사이, 섬처럼 혼자 살기에도 험한 세상에 사랑 좀 해보겠다고 분투하는 친구들이다.


수국의 성대를 잡고 꺾으면
수국이 울고
우는 수국으로
꽃병을 찌르면 그가 좋아해요

꽃병을 찌르다가 수국 대신
내가 울고 싶은데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내일모레와 동시에 그가 왔고
준비한 수국을 꺼내려 하는데
그의 팔꿈치에 이미 수국이 펴 있어요

_ 나를 받아줄 품은 내 품뿐이라 울기에 시시해요 中


친구들과 메시지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투덜거림과 한풀이의 중간쯤에 머물게 된다. 정말이지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여행 떠나는 것도 어렵고, 사회적 거리두기도 어렵고, 주머니 사정도 어렵다. 마음 주는 일도 어렵고, 솔직해지는 것도 어렵다.

함께가 되는 일이 이토록 어렵고, 그렇다고 혼자로 완연하게 피는 일은 더더욱 어렵지. 그래도 용감하게 사랑하려 하는, 사랑하고 있는 친구들을 응원한다. 나를 응원한다. 기어이 혼자인 이 삶에서, 울면서 웃기도 하는 그 모습이 참 사랑스럽다고.


혼자 살면서 나를 빼곡히 알게 되었어요
화가의 기질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매일 큰 그림을 그리거든요
그래서 애인이 없나봐요

나의 정체는 끝이 없어요

제주에 온 많은 여행자들을 볼 때면
내 뒤에 놓인 물그릇이 자꾸 쏟아져요
이게 다 등껍질이 얇고 연약해서 그래요
그들이 상처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앞으로 사랑같은거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중략)

나는 제주에 사는 웃기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남을 웃기기도 하고 혼자서 웃기도 많이 웃죠
제주에는 웃을 일이 참 많아요
현상 수배범이라면 살기 힘든 곳이죠
웃음소리 때문에 바로 눈에 뜨일 테니까요

_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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