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는 글쓰고 향 만드는 사람, 객원필자 전아론이다. 거리마다 넝쿨 장미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기 시작했다. 곧 여름이 우리의 문 앞에 당도하리라는 신호다. 붉고 희고 때로는 분홍빛인 장미들이 골목의 담장을, 학교 운동장의 울타리를, 오래된 건물의 한켠을 가득 채우는 이 시즌을 사랑한다. 사람들은 왜 벚꽃에 호들갑을 떠는 것과 달리 장미에게는 무심할까? 너무도 익숙한 꽃이라서? 1-2주일 만에 확 져버리는 게 아니라서?
나는 그 아름다움과 향기에 비해, 장미가 평가절하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복잡미묘한 매력을 점점 더 보여주는 장미는 단순한 꽃이 아니다. 특히 조향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렇다. 많은 향수들이 장미의 향에 빚지고 있다. 파우더리함을 더하느냐, 애니멀릭한 뉘앙스를 더하느냐, 혹은 어떤 과일이나 꽃을 함께 담느냐에 따라서 장미의 향은 수천 가지 다양한 향으로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장미 향수를 만든다는 건 조금 더 까다로운 일일 수 있다. 익숙한 만큼 더 많이 시도해야 하고, 가능성이 다양한 만큼 더 많이 고심해야 할 테니까. 그런데 여기 그 어려운 일을 다섯 번이나 해낸 조향사들이 있다. 바로 구딸파리의 아닉구딸과 그녀의 딸, 까밀구딸이다.
아닉구딸이 처음부터 조향사였던 건 아니다. 음악에 재능이 있어 피아니스트로 활동하던 그녀는, 자유를 찾아 런던에 머물다가 모델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던 중 프랑스 그라스 지방을 여행하며 향의 세계와 만나게 된다. 그라스 지방은 향수를 만드는 향료를 제작하는 것으로,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지역이다. 피아니스트, 모델, 조향사까지. 그녀의 예술적 영혼은 무한한 확장성을 가지고 있었나보다.
아닉구딸이 가장 사랑한 향기는 바로 장미였다. “장미는 단연코 꽃 중의 꽃, 모든 꽃들의 여왕입니다. 그리고 장미는 단연코, 그러한 여성을 위한 꽃이기도 합니다.” 이런 말을 남긴 아닉구딸은, 실제로 자신의 삶에서도 장미를 아주 가까이 두고 사랑했다고 한다. 목욕물에 장미 에센스를 섞거나, 티 타임에는 장미향의 차를 마시는 등. 조향사로써 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써 장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졌던 것이다. 그런 날들이 그녀의 일상이기 때문에 장미의 다양한 향기와 매력을 포착하고, 다양한 향수로 구현해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장미의 향은 단순하게 묘사할 수 없습니다.
사과 향이 날 수도 있고, 때로는 배나 복숭아 향이 나기도 하고, 또 가끔은 은방울꽃 향이 나기도 합니다. 따라서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 모든 뉘앙스에 익숙해져야 하죠. 하나씩 공부해야 하고, 그리고 지치지 않고 열심히 장미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로즈 압솔뤼는 ‘장미 향수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장미 생화의 향과 가장 닮아있다. 특히 첫 향에서 생화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자연 그대로가 느껴지는 냄새를 맡았을 때, ‘오, 이건 진짜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흔히 맡는 장미향은, 뭐랄까, 진짜가 아니라 장미의 예쁘장한 이미지만을 담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로즈 압솔뤼의 향기에는 자연에서 만난 장미의 느낌이 생생하다.
불가리안 로즈, 터키 로즈, 센티폴리아 로즈, 다마스크 로즈, 모로칸 로즈, 이집트 로즈. 이게 다 뭐냐고? 바로 로즈 압솔뤼에 들어간 6가지 종류의 장미다. 장미라고 다 같은 장미가 아니다. 어떤 품종인지, 어느 지역에서 자라는지 등등에 따라 각각 다른 장미향을 가지고 있다. 6가지 장미 향기들은 함께 어우러지며 각자의 단점은 보완하고 장점은 극대화 시킨다.
단일 향이지만 맡으면 맡을수록 ‘찐 장미’라는 생각이 드는 로즈 압솔뤼. 이 향수를 만들고 가장 기뻐한 사람은 다름 아닌 아닉구딸, 자기 자신이었다고 한다. 맞아. 스스로가 가장 사랑하는 향을 조향하여, 향수로 구현해내는 기쁨이야말로 조향사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지. 단일 향이지만 다양한 장미로 가득 채운 꽃다발을 안고 있는 듯한 향이기 때문에 전혀 단조롭지 않다. 로즈 압솔뤼를 뿌린 날이면 내가 마치 인간 장미가 된 듯한 그런 기분이 든달까!
쁘띠 쉐리의 첫 느낌은 달콤함과 부드러움이다. 서양배와 복숭아 뉘앙스의 달콤한 향이 어딘지 모르게 고급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장미 덕분이다. 장미도 붉은 장미가 아니라, 연분홍 빛이 감도는 그런 장미의 느낌이랄까. 아마도 아닉구딸은 장미의 향을 해치지 않으면서, 장미의 사랑스러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과일 향을 찾기 위해 수없이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그렇게 발견한 서양배의 달콤함은 그린한 느낌과 청량함을, 복숭아의 달콤함은 분홍빛의 사랑스러움을 더해준다.
사실 쁘띠 쉐리는 아닉구딸이 자신의 딸인 까밀구딸을 위해 만든 향수다. 까밀구딸의 애칭이 쁘띠 쉐리였다는데, 번역해보면 ‘작은 내 사랑’, ‘귀여운 내 사랑’ 정도일 것 같다. 딸에 대한 애정이 가득 담긴 그녀의 마음처럼 쁘띠 쉐리의 향기 또한 사랑스러움이 가득하다. 안아주고 싶은 포근한, 그런 느낌.
쁘띠 쉐리에서 전반적으로 느껴지는 ‘부드럽고 포근한 느낌’은 바로 머스크의 활약이다. 머스크에도 장미를 섞어 넣은 아닉구딸의 장미 사랑 덕분에, 향의 흐름은 자연스럽게 프루티에서 장미로 이어진다. 딸에게 “사랑을 담은 키스를 부르는 너의 핑크빛 뺨을 연상시키는” 향수라며 선물했던 아닉구딸의 말처럼, 마지막에는 코 박고 킁킁대고 싶어지는 체취로 이어지는 것 또한 쁘띠 쉐리의 숨은 장점이다.
글쓰는 일과 조향은 닮은 점이 여럿 있는데, 그 중 하나는 ‘끝이 없다’는 것이다. 수식을 풀면 정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시간이 지나면 완결되는 것도 아니다. 만드는 사람 스스로가 완성이라고 여겨야, 그제서야 끝이 난다. 그래서 때때로 하나의 소설을 쓰기 위해, 하나의 향을 만들기 위해 아주 오랜 시간을 쏟는 사람이 있다. 아닉구딸도 그런 사람이었다. 스 수와 우 자메는 그녀가 무려 16년이라는 시간 동안 공들여 만든 향수다.
아닉구딸은 어느 성직자의 정원에서 우연히 특별한 장미 향을 맡게 되었다고 한다. 기억 속의 그 향을 그대로 복원하기 위해, 그녀는 그날 이후부터 1999년 유방암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계속 조향을 거듭했다. 터키 로즈의 장미 향과 신선한 과일 향으로 시작하는 이 향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묘한 향들이 피어올라 우아하고 독특한 매력을 보여준다.
처음에는 마치 앞선 두 향수 로즈 압솔뤼와 쁘띠 쉐리를 섞어놓은 듯, 생생한 장미 생화의 향기와 신선한 과일향이 어우러진다. 그런데 곧, 스 수와 우 자메는 얼굴을 바꾼다. 조금은 쌉싸름하고 짭쪼롬하기도 한, 물냄새 같기도 하고 흙냄새 같기도 한 향들이 치고 올라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장미 향에 무게감이 더해고 숨겨진 향들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지만 끝끝내 정체를 밝히지는 않는 느낌이 든다. ‘160가지의 비밀 에센스’가 들어있다는 이 향수는 끝까지 호기심을 매혹으로 끌고 가는 마법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린한 향을 사랑하는 나의 마음에 쏙 든 로즈 스플랑디드는, 마치 장미 정원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향수다. 첫 향에서 느껴지는 페퍼(후추)의 스파이시한 뉘앙스는 장미 향과 섞여 정원의 흙냄새로 뒤바뀌며 생생함을 더한다. 뒤이은 풀냄새를 맡으니 넝쿨 장미가 가득한 장미 정원이 그려진다. 향수 하나에서 공감각까지 느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흔히 꽃향기에는 달콤함만 있다고 생각하지만, 전혀 아니다. 달콤하다 못해 미스터리한 향, 톡 쏘는 듯한 풀냄새, 자연 그대로가 느껴지는 꽃잎 표면의 향, 애니멀릭한 향, 스파이시한 향, 스모키한 향…. 특히, 수도 없이 다양한 향의 면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장미다. 로즈 스플랑디드는 그런 장미의 여러 얼굴을 보여주기 딱 적합한 향수다.
즐겁게 장미 향기를 느끼다 보면 어느새 톡톡 튀는 향들이 잦아드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마치 정원에서 빠져나온 이후에도 장미의 여운이 남는 것처럼, 은은하고 달콤한 향기가 살결에 남는다. 신선함과 가벼움 덕분에 봄이나 여름에 더더욱 잘 어울릴 것 같은 향수다.
로즈폼퐁은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구딸파리의 장미 향수다. 앞선 향수들이 장미 향에 더하는 과일 향으로 서양배와 복숭아를 주로 썼다면, 로즈폼퐁은 베리류의 과일 향을 사용함으로써 색다른 매력을 보여준다. 앞선 조합은 좀 더 여리여리하고 부드러운 뉘앙스를 주고, 로즈폼퐁의 조합은 더 생생하고 감각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로즈폼퐁에서 느껴지는 것은 베리 중에서도 라즈베리와 블랙커런트, 마치 스파클링한 로제 와인을 마시는 듯 기분 좋은 청량함과 달콤함에 취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더 짙게 장미향이 피어오르는데, 베리 과즙의 상큼한 터치가 가미되서인지 그 어떤 장미보다 싱싱한 장미 향으로 다가온다.
이어지는 잔향의 부드러움에는 바이올렛 향이 살짝 더해져서 어딘지 모르게 우아하고 어른스러운 느낌이 든다. 세련된 도시 여성의 장미 향 같달까? 이름에 깃털이나 털실로 만든 ‘방울술’을 뜻하는 폼퐁이 들어있는 것처럼 로즈폼퐁은 천 겹의 잎으로 둘러싸인 장미 품종이다. 이 때문인지 마지막에는 살짝 따뜻하면서도 폭닥폭닥한 이불 같은 향으로 변하며 반전을 보여준다. 역시 이래서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하고, 향수는 끝까지 맡아봐야 한다니까.
구딸파리의 다섯 가지 장미 향수를 접하면서 머릿속에 굳어져있던 장미에 대한 이미지들이 사르르 녹아 사라지는 걸 느꼈다. 청순했다가, 섹시했다가, 우아했다가, 사랑스러웠다가, 발랄했다가… 장미 안에는 너무도 많은 향기와 이미지가 숨어 있었다. 마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의 오래된 시 ‘꽃’ 같다. 이제 장미는 그저 길가에서 쉽게 지나치는 꽃이 아니다. 내게 어울리고 나와 꼭 맞는 장미 향을 찾아냈을 때, 그 장미는 내게 와서 나의 향이 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