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의 화이트 스니커즈 5종
교복 입던 시절, 모르는 문제가 나오면 일단 3번으로 찍고 봤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가장 정답 확률이 높다는 속설이 있었으니까. 일단 OMR 카드 3번 칸에 검은 사인펜으로 예쁘게 칠을 하고 나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아마 맞을 거야…’
패션에도 오지선다형의 3번 같은 존재가 있다. 바로 화이트 스니커즈다. 외출 준비를 마치고 신발장 앞에서 무엇을 신어야 할지 망설여진다면, 일단 화이트 스니커즈를 꺼내 발을 끼워 넣는다. 정답이다.
내가 이런 확신을 갖게 된 건, 내게 비와 바람만 안겨준 야속한 섬 제주도에서다. 우리에게 잠잘 곳을 마련해 주신 귀한 분의 패션을 보고 무릎을 쳤다. 그래, 저거다. 위 사진 속 패션을 누가 50대의 그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과한 멋 같은 건 부리지도 않았다. 그저 통이 적당한 바지를 무심하게 툭툭 접어올리고 화이트 스니커즈를 신었을 뿐이다. 이 스타일의 일등 공신은 누가 뭐래도 바로 화이트 스니커즈. 나중에 여쭤보니 비슷한 종류의 스니커즈만 꽤 여러 개 가지고 있다고 하시더라.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짐했다. 제주도에서 얻은 이 깨달음을 서울로 전달하리라. 내 기필코 화이트 스니커즈 전도 기사를 쓰겠노라고. 그리하여 이 기사는 어떤 비장한 사명감을 안고 시작됐다.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이상한 신발 대신 화이트 스니커즈를 신을 때까지 쫓아다니면서 전도하고 다녀야지.
이렇게 말해도, 막상 뭘 사야 할지 모르겠다고? 내가 또 그렇게 경우 없는 애는 아니다. 정말 클래식하고, 누가 봐도 알아줄 만한 화이트 스니커즈 5족을 모았다. 모두 세월의 모진 풍파를 견디고 의연하게 운동화의 왕좌를 지키고 있는 마스터 피스이니 어떤 것을 골라도 후회는 없다. 이제 당신에겐 패션 전진만이 있을 뿐. 그러니까 오빠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에요. 화이트 스니커즈 좀 신어줘요 제발.
슈퍼스타를 신은 남자는 저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둔한 듯 보이면서도 얄쌍하게 빠진 저 라인을 그냥 지나치긴 힘들지 암. 마치 조개껍데기를 닮은 앞코는 귀여운 맛이 있고, 아킬레스건을 보호해주는 패드는 어쩐지 든든하다. 이 신발이 출시된 이후, 1970년대 농구판은 그야말로 슈퍼스타판이었다. 당시 농구 선수들의 70% 이상이 슈퍼스타를 신고 뜨거운 코트를 가르고 있었다. 이후 약간 시들해진 인기는 2015년 슈퍼스타 80s 디럭스란 새로운 이름으로 제2의 전성기를 맞는다. 청바지와의 찰떡궁합은 물론이고, 심지어 정장에 매칭해도 시크함을 뽐낼 수 있다지. 나도 이 모델을 소장하고 있는데 스커트와 신어도 예쁘다.
덜어내는 것이 미덕인 시대다. 그런 의미에서 아디다스 스탠스미스는 이 시대에 가장 잘 부합하는 신발이다. 모든 디테일을 다 버리고도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아디다스의 삼선 디테일조차 펀칭으로 보일 듯 말 듯 감춰버렸다. 출시 당시엔 ‘올 레더’였는데(스탠스미스는 아디다스 최초의 올 레더 테니스 슈즈다) 이후 테니스의 전설 스탠스미스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지금까지 무려 4천만 켤레가 넘게 팔린 존재 자체가 전설인 운동화.
아기자기한 맛이 있는 신발이다. 컨버스 잭퍼셀의 앞쪽 고무 코엔 검은 줄이 있는데 꼭 맞은편 사람을 향해 빙긋 웃고 있는 모양이다. 그래서 ‘스마일 슈즈’라는 귀여운 별명도 있다. 실내 코트용 슈즈로 시작했지만, 아시다시피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노지에서 신고 다닌다. ‘중도 포기란 없다’라는 모토처럼 정말 죽지도 않고 끊임없이 만들어지고, 미친 듯이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 아이템이다. 발이 커 보이지 않고 무게도 가벼워 키가 작은 남자에게 강력 추천.
케즈는 스니커즈계의 단군할아버지 같은 존재다. 왜냐고? 스니커즈란 말이 케즈 때문에 시작되었거든. 100년 전, 케즈가 최초로 고무 밑창의 신발을 만들었을 때, 사람들은 이걸 신은 사람의 발걸음이 너무 조용해서 ‘살금살금 기어간다’라는 뜻의 ’Sneak’란 단어에 ‘er’을 붙여 스니커즈란 말을 쓰기 시작했다. 케즈가 아니었다면 우린 지금 무엇을 신고 다녔을까? 아찔하다.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디자인은 거의 변하지 않았다.
케이스위스가 1966년에 선보인 클래식 오리지널은 가죽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테니스화다. 당시 캔버스나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테니스화 사이에서 가죽으로 만들어 고급스럽고 편하기까지 한 이 신발은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겠지. 신발 구멍 하나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는다. 갑피에 구멍을 뚫어 신발 끈을 넣는 방식이 아니라, D링으로 멋을 냈다. 덕분에 케이스위스를 상징하는 5개의 줄과 운동화 끈이 마치 하나로 연결되는 듯 보인다. 이 신발의 미학인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