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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희 Mar 08. 2017

카메라를 통해 이야기를 담는, 김지윤

2016년 10월 16일의 기록

아무것도 모르던 어릴 적, 별 이유 없이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로망. 다들 그런 것 하나쯤은 있었을 거다. 나에게도 그런 로망이 하나 있었다. 미국에서 사는 것. 어차피 로망인 거 좀 더 꿈같은 소리를 해보자면, 미국에서 영상을 찍으며 살아보고 싶었다. 

요즘도 가끔, 닥친 일들을 잊고 싶을 땐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곤 한다. 가령 미국에서 영상을 찍으며 사는 것?ㅋㅋ PD 일을 하며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게 됐음에도, 왠지 모르게 '미국에서 영상을 찍으며 사는 모습'은 아직도 멋져 보인다. 철이 없는 건지 아님 이런 로망 하나쯤은 마음속에 남겨두고 싶은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런 점에서 내가 오늘의 인터뷰이를 궁금해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가장 최근 지윤이를 만난 건 2년 전 뉴욕에서였다. 그때 지윤이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필름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2년이 지난 지금은 LA에서 영화 촬영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 2년간 그녀는 어떤 경험을 해왔을까. 그리고 그동안 어떤 선택을 하며 살아온 걸까. 한국에 잠깐 놀러 온 지윤이에게 출국 며칠 전 급하게 인터뷰를 요청했다.



 

Q. 가족들은 중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한국엔 무슨 일로 온 거야? 
 
대학교를 한국에서 다녀서, 아는 사람이 한국에 더 많거든. 이번엔 일할 겸, 친구들 볼 겸 들어왔어. 엄마도 지금은 한국에 계시고. 
 
Q. <사소한 인터뷰>의 공식 질문으로 시작해볼게. 자기 자신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나는 ‘이야기를 담는 사람’. 지금 촬영 쪽 일을 하고 있는데, 촬영이라는 게 예쁘게만 보이도록 하는 게 아니라 결국엔 이야기를 담는 거거든.  

그리고 사실 내 최종 꿈은 연출이야. 아직도 그곳을 향해 달리고 있는데, 어느날 문득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물론 더 넓게는 정치나 사회 이야기일 수 있겠지.) 주변 일들에 좀 더 귀를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게 중요한 것 같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야기가 궁한 사람’이기도 해.

 


PART 1. 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

 
Q. 중국에서 되게 오래 살았던 것 같은데, 중국에서 태어난 거야? 
 
아니. 우선 부모님께선 홍콩에서 만나셨어. 두 분 다 마침 홍콩에서 일하고 계셨거든. 지금 보면 로맨틱할 수 있는데.. 내가 봤을 때 그렇게 로맨틱한 것 같진 않아.(웃음) 아무튼 그래서 농담으로 난 Made in Hongkong이라고 많이 해.  
 
Q. 아버님은 어떻게 홍콩으로 가시게 된 거야? 
 
그때 아빠가 지금 내 나이쯤이셨던 것 같아. 20대 후반. 그때 한국에 들어올까 말까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아. 그래서 한국에 잠깐 들어왔는데 역시나 아니었나 봐. 마침 아빠가 다니시던 회사에서 ‘네가 경험도 있으니 주재원 기회가 있을 때 다시 가는 게 어떠냐’고 물어봐 주셨대. 그래서 다시 가게 된 거지. 그래서 난 태어나기만 한국에서 태어나고 몇 개월 후에 바로 홍콩으로 다시 가게 된 거야. 
 
- 태어난 건 한국이라고?  

응! Made in Hongkong, Born in Korea.(웃음)  
 
- 아.. made in이 그런 의미였어?(웃음) 

응ㅎㅎ 그래서 홍콩 사람 만나면 가끔 농담해. 나도 이 계열 사람이라고.(웃음) 
 
Q. 그럼 중국이 아니라 홍콩에서 살았던 거야? 
 
정확히 이야기하면 홍콩에 잠깐 있다가, 북경 5년, 상해 1년, 그 외에는 심천에서 쭉 살았어. 지금은 심천이 많이 유명해져서 심천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예전엔 사람들이 심천이 어딘지 잘 몰라서 그냥 홍콩에 살았다고 했었어. 왜냐면 홍콩이랑 심천이 진짜 가깝거든. 
 
Q. 부모님은 어떤 스타일이셔? 널 어떻게 키우신 것 같아? 
 
자유롭게 키우되 큰 틀은 있으셨던 것 같아. 이를테면 부모님께 조언은 구하지만 결정은 내 몫이야. 물론 조언을 구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다’는 의견 정도는 말씀해주시지. 그럼 난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를 꼭 여쭤봐. 서로 대화를 정말 많이 하는 것 같아.  
 
Q. 물론 같은 시기는 아니지만 중국(초/중/고), 한국(대학교), 미국(뉴욕 필름 아카데미) 교육 시스템을 다 겪어봤잖아. 어떤 차이가 있는 것 같아? 
 
중국 친구들은 편견이 별로 없었던 것 같아. '공부 잘하고 말고'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고 해야 하나. 그리고 내가 나온 학교는 3년 내내 반이 바뀌지 않고 쭉 갔어. 담임 선생님도 같았고. 그래서 반에 대한 애정이 되게 강했던 것 같아.  
 
Q. 뉴욕 필름 아카데미는 어떤 분위기였어? 
 
한국 대학은 출석에서 학점이 되게 많이 갈리잖아. 근데 미국은 그런 게 별로 없었어. ‘안 오면 네 손해지 내 손해냐.’ 약간 이런 느낌. 그냥 알아서 나가떨어지는 시스템이라고 해야 할까. 우리 촬영과 학생이 처음에 22명이었는데 졸업할 땐 11명이었어. 
 
- 좀 냉정한 시스템이네.
 
음 꼭 그렇진 않아. 기회는 항상 줘. 중간에 그만둔 학생들은 정말 적성이랑 안 맞거나 하는 이유로 그만둔 거야. 난 도리어 한국이 좀 답답했어.  
 
Q. 어떤 점이 답답했어? 
 

형식적으로 해야 하는 것들이 많았던 것 같아. 예를 들면 뒤풀이를 꼭 가야 한다든지, 출석체크를 엄청 칼같이 한다든지, 조모임을 반드시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들. 그리고 한국 교수님들은 피드백을 바로 주시지 않고 주로 학점으로 이야기하시는 편이잖아.(웃음)

근데 미국 교수님들에게는 피드백이 진짜 중요하기 때문에, 거의 의무적으로 피드백을 주시는 것 같아. 그러니 커뮤니케이션도 정말 잘되고. 학생이 잘못하기 전에 미리 말씀을 해주셔. 교수님뿐만 아니라 친구들도 그래. 그래서 어느 순간 내 화법도 조금 직설적으로 바뀐 것 같아. 영어 자체가 straight forward 한 언어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미국 교육 시스템은 모든 학생들에게 공평한 기회를 주려고 노력하는 것 같아. 촬영 수업 때도 “너에게만 특혜를 줄 수 없다.”라는 말을 굉장히 많이 하셨어. 
 
Q. 한국은 어땠어? 
 
한국은 떠먹여주는 시스템인 것 같아. <수학의 정석> 스타일로 설명도 잘 되어 있고 뭘 해도 족보도 많고. 모험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것 같아. 그래도 내가 나온 대학에선 모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좋았어. 
 

인터뷰 도중 찍은 사진, 웃는 모습이 참 이뿌당


Q. 중국어를 할 수 있어서, 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어서 좋다고 했잖아. 
 
응. 그뿐만 아니라 일할 때도 좋아. 중국이 요즘 미국이랑 일을 많이 하거든. 내가 미국에서도 특별한 사람이긴 해. 왜냐면 한국, 중국과 연관이 되어 있으면서도 미국 시스템을 알고 있으니까. 그래서 처음엔 항상 통역을 시키는데, 내가 하고 싶은 걸 적극적으로 어필하면 그쪽으로 빠질 수 있더라고. 한 번은 통역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3-4일 후에는 로케이션 매니저가 되어있고, 일주일 후엔 프로덕션 매니저가 되어있던 경우도 있었어. 
 
- 언어가 되니까 좋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구나.
 
그런 것도 있지만, 그 분야에서 일을 잘하는 사람은 어쨌거나 알아봐 주는 것 같아. 왜 이렇게 생각하게 됐냐면, 작년 12월에 중국에서 유명했던 한 영화에 참여했었는데 거기 조감독이 두 분이 계셨어. 한 분은 영어를 잘해서 오신 분이었고, 한 분은 영어 한 마디도 못하지만 실력 있는 분이었어. 근데 실력 있는 분은 눈치껏 상황 봐서 이렇게 하면 된다고 이야기하시더라고. 그때 영어를 잘하는 것보다 카리스마와 실력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사람이 없었으면 절대 일이 진행되지 못 했을 거야. 일 잘하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 어떻게든 잘 하는 것 같아. 
 
Q. 만약 너에게 태어나 자랄 수 있는 나라를 선택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어느 나라를 선택할 거야? 
 
아.. 너무 어렵다.. 난 그래도 중국일 것 같아. 의외로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 같아. 내가 그냥 운이 좋은 걸 수도 있지만. 
 
Q. 중국에 살면서 중간중간 한국에 들어왔었어? 
 
방학 때마다 왔으니까 진짜 많이 올 때는 1년에 세 번 정도 왔었어. 그래서 ‘중국에서 살았는데 한국어 잘 한다. 한국 문화에 뒤처지지 않는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어. 이건 다 사촌 언니랑 사촌 오빠 덕분인 것 같아. 나랑 진짜 많이 놀아줬거든. 언니, 오빠에게 고마워 진짜.



PART 2. 그녀의 바탕이 되는 사람들

 
Q. 한국이 항상 그리웠다고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 
 
아무래도 내가 한국인이다 보니 한국과 관련된 게 있으면 친구들이 나한테 물어보거든. 그럴 때마다 내가 제대로 대답해주지 못한 적이 많았어. 다 관심의 표현인데, 생각이 깊어지다 보면 ‘과연 내가 정말 알고 대답하는 걸까’ 싶고 한국에 대해 잘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리고 한국이라는 곳이 중국에 있던 나에겐 항상 휴양지 같은 곳이었어. 친척들이 거의 다 한국에 계셔서 자주 놀러 왔었거든. 그래서 미국에 갔을 때 내가 예전에 가지고 있던 한국의 느낌, 휴양지 같은 느낌이 느낌이 다시 들었어. 왜냐면 한국에서 살 땐 한국이 해야 할 게 많은, 현실이었거든. 물론 그때의 한국도 좋았지만. 
 
Q.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은 어땠어? 
 
내 꿈이 뭔지 확정 지을 여유가 있었던 때가 한국 대학 생활이었어.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해볼 수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서 정말 많은 걸 경험해봤거든. 
 
그 시기가 지금 나의 활력소이자, 버팀목이기도 해. 하고 싶은 걸 끊임없이 마음껏 할 수 있었던 시기. 지금 일하는 게 힘들어도 그 시기만 생각하면 힘이 난다고 해야 하나. 지금도 가끔 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한국에서 보낸 시간이 너무 좋아서.  
 
Q. 어떤 사람들을 만났길래. 사람이 되게 중요하잖아. 
 
음.. 동아리 사람들. 힝 나 눈물 날 것 같아ㅠㅠ 
 
- 많이 보고 싶구나. 
 
아니 많이 봤어. 어제도 봤고, 이따가도 보는데. 


Throw back 그리운 동방 prometheus - 인터뷰이 페이스북 글 中


Q. 어떤 동아리인지 먼저 설명해줄 수 있어? 
 
프로메테우스라는 영화 동아리고. 주기적으로 영화를 같이 보기도 하고, 영화를 각자 보고 와서 이야기하기도 해. 근데 꼭 영화 이야기만 하는 게 아니라, 이야기가 산으로 갈 때도 많았어.(웃음) 보통 과에서 만난 사람들이랑은 ‘무슨 수업 들어. 자소서 어디 넣을 거야. 앞으로 뭐 할 거야.’ 이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 근데 여기선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다 보니까 다들 자연스럽게 친해진 것 같아. 그리고 여유로웠어. 프렌즈에 나오는 카페처럼. 
 
그리고 동아리 분위기 자체가 각자의 개성을 굉장히 존중해주고. 존중을 넘어서 개성 있는 걸 더 좋게 봐줬던 것 같아. 동아리 출신 감독님 중에 <만추> 찍으신 김태용 감독님도 계시고, <최종병기 활> 찍으신 김한민 감독님도 계시고, <시라노 연애조작단> 찍으신 김현석 감독님도 계신데, 보면 그분들도 다 개성이 강하시잖아.  
 
Q. 아까 이야기하다 잠깐 끊긴 질문, 동아리에서 어떤 사람들을 만났어? 
 
난 동아리에서 만난 사람들이 평생 갈지 몰랐어. 평생 보물 1호인 것 같아. 이 사람들이 없었더라면... 몰랐는데 평생 그런 친구 못 만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근데 난 이 친구들 덕분에 심리적으로 바탕이 너무 잘 된 것 같아.  
- 심리적 바탕이라니.. 
 
내가 인복이 참 많은 것 같아. 뉴욕에서 진짜 힘들 때, 동아리에서 만난 동생이 그냥 생일 축하해주러 뉴욕에 왔어. 그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나. 내가 너무 힘들어 보여서 그냥 오고 싶었다고. 근데 동생이 오면서 본인이랑 친하지 않은 사람들의 편지, 선물까지 다 챙겨온 거야. 그때 그 동생이 엄청 큰 힘이 됐어. (이건 여담이지만 그 동생 지금 되게 유명해졌다?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라는 페미니즘 관련 책을 썼거든.)  
 
또 동아리에서 만나게 된 친구 중에 한 명은 동네 친구인데, 만나면 같이 양재천을 걸어. 우리가 느끼기엔 5분이었는데 막 5시간이 흘러가있고 그런 친구도 있어. 
 
Q. 친구들 때문에라도 한국에 더 있고 싶지 않았어? 
 

처음에는 그런 생각조차 안 했던 것 같아. 그 사람들이랑 너무 가까워져서 불안감도 없었어. 내가 대학교를 5년 다녔는데 동아리를 4년 반 했거든.
 
그리고 한국은 졸업할 때쯤 너무 답답했어. 한국에 있고 싶지 않다는 느낌은 아니었고, 틀 안에서 안전하게 가려는 나를 발견했다고 해야 하나. 실패하고 싶지 않고.  
 
Q. 한국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은 없어? 
 
있어있어. 항상 있어. 그리고 예전에 영화 일을 해보기도 했어. 인디포럼 영화제에서 촬영팀 일도 했었고, 최시형 감독님의 <서울 연애>라는 옴니버스 영화 중에 단편 <영시> 조연출도 했었어. 필름포럼에서 인턴 생활도 했었고.. 여기저기서 일 많이 했었어. 
 
한국에서 영화 찍어보고 싶지. 한국에서 정착할지는 모르겠지만 내년에 한국 들어올 수도 있어. 그리고 이젠 그럴 수 있는 시대가 왔다고 생각해. 내가 하는 일도 그렇고, 우리가 사는 시대도 그렇고. 영상, 촬영, 영화 쪽은 항상 협업하는 경우도 많고, 감독들께서 외국 가서 찍으시는 경우도 많고 하니까. 



PART 3. BEGIN AGAIN
 


Q. 왜 ‘미국’ 영화학교였어? 
 
영화학교를 가려고 할 때 한국이나 중국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야. 근데 왜 미국이었냐면, 어쨌거나 중국은 중국 사람에게 더 잘해주는 분위기가 있는 것 같았어. 진짜 좋은 학교를 가더라도! 심지어 진짜 좋은 학교는 1년에 12명밖에 안 뽑아서 내가 어떻게 거기를 들어가나 하는 생각도 있었어. 한국은 약간 학부부터 시작해야 하는 분위기가 있었고.  
 
개인적으로 아는 영화감독님들도 많이 뵙고 많은 이야기를 나눴었어. 그때마다 다들 ‘미국 갈 돈으로 영화 찍지.’라고 하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말이 맞아. 근데 그때는 막연히 그 말도 맞지만 난 배경도 너무 다르고 각자의 길이 있지 않나 싶었어. 그리고 다른 나라에 갈 수 있다면 미국에서 정통적인 방식으로 배우는 게 나을 것 같았어.

Q. 뉴욕 필름 아카데미를 선택한 이유는? 

아빠랑 가기 전에 약속했던 게 반드시 1년만 공부하고 오겠다는 거였거든. 그래서 영화학교도 1년만 다닐 수 있는 곳을 찾은 거야. 그게 뉴욕 필름 아카데미였어. 사실 LA까지 갈 줄 미리 알았더라면 다른 학교를 선택할 수도 있었을 것 같아. LA에 유명한 영화 학교가 더 많거든. 
 


Q. 아하. 거기서 시네마토그래피/촬영을 전공했다고 들었어.
 
응. 사실 연출 전공한 사람들이 졸업을 하면 바로 본인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게 아니야. 왜냐면 돈이 없거든. 근데 촬영은 돈 받으면서 연출 일을 공부할 수 있어. 촬영 일을 하다 보면 연출에게 조언을 줄 기회가 많아. 이야기에 직접적으로 관여할 수도 있고. 물론 최종 결정은 감독이 하지만, 그게 참 좋은 것 같아. 
 
Q. 처음부터 촬영과에 들어갔던 거야? 
 
아니. 원래는 연출과였어. 근데 연출과에 들어가고 나서 든 생각이, 연출은 누가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는 것. 그리고 첫 6일이 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과 너무 다른 거야. 난 우리 아빠랑 약속한 게 있는데, 1년밖에 못 있는데, 1년 동안 깨알같이 잘 배우고 와야 하는데. 1년을 이렇게 허비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오피스에 찾아가서 물어봤지. 촬영과 커리큘럼 볼 수 있는지, 전과할 수 있는지. 보니까 촬영과는 시스템도 더 잘 갖춰져 있는 것 같고 커리큘럼도 더 좋아 보였어. 더 많은 걸 배울 수 있겠다 싶었지.  
 
Q. 전과하니까 실제로 더 좋았어? 
  
응. 재밌는 수업이 진짜 많았어. 이를테면 뉴욕이 어쨌든 영화를 많이 찍었던 역사적인 도시니까, 첫 주에 로케이션을 쫙 주고 팀을 나눠줬어. 그다음에 “우리 5시쯤에 어느 바에서 보자. 로케이션 사진을 가장 많이 찍어온 사람에게 술을 쏘자.” 이런 식의 수업이 굉장히 많았어. 
 
그리고 촬영과 온 친구들이 다 자기만의 이야기가 있더라고. 정말 다양한 사람이 많았어. 그러니까 영화를 찍어도 결과물이 좋고 팀워크도 장난 아니었어. 과를 바꾸길 잘한 것 같아.


뉴욕에서 LA로 먼저 가는 친구들 쫑파티! 예히!
뉴욕에서 만나게 된 일본 친구가 LA에 놀러왔을 때


Q. 여태까지 찍었던 작품 중 애정 가는 작품 몇 개만 소개해줘. 
 
내가 직접 찍었던 것 중에는 <peephole>이란 작품. 되게 짧은 단편인데 아직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야. 내 인생 감독을 만났던 작품이었어. 그 친구와 작업할 땐 일하는 느낌보다 친구 같은 느낌이 들었어. 같이 영화도 보러 가고 ‘이건 어때?’ 하면서 서로 아이디어를 계속 생각해오고. 되게 열정적이었어. 프로젝트로 찍은 영화 중 하나였는데 정말 영화를 찍는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그리고 내 아이디어를 많이 반영해준 작품이었어. 
 
또 하나는 내가 참여한 작품은 아닌데, 감독이 나에게 해줬던 질문 때문에 기억에 남는 영화가 있어. 보통 사람들이 ‘넌 중국어 어떻게 할 줄 알아?’ ‘어떤 언어가 편해?’ 이런 질문을 많이 해. 근데 이 감독은 본인도 어릴 때부터 미국과 대만을 오갔거든. 그래서인지 ‘do you feel home?’ ‘do you feel lonely?’ ‘Where do you feel home?’ 이라고 물어보더라고. 지금 사는 뉴욕이 ‘home’이라고 느껴지는지 물어보는 건 처음이었어. 그 질문 덕분에 깊은 대화를 정말 많이 나눴어. 개인적으로 ‘이 사람은 그런 감성을 잘 담아낼 수 있는 감독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 친구가 찍은 영화 제목은 <Fukai Mori>고, 영화 좋아하는 친구들에게 많이 추천해줘. 
 
- 친해지는 사람들이 대충 어떤 스타일인지 알 것 같기도 해. 
 
난 항상 스스로에 대한 고민을 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친구들과 가까워질 수밖에 없는 것 같아. 그리고 다들 참 잘 들어줘. 사실 내가, 들어주지 못하는 사람과 오래 있지 못하거든. 너무 많이 차있는 사람은 스스로에게도 그런 여유를 주지 못하는 것 같아서.


LA 출장 중 찍은 사진들


포커스풀러가 필요해서 뉴욕에 있던 인터뷰이를 불러줬다고 한다. :)


Q. 지금 있는 LA는 뉴욕과 분위기가 많이 달라? 
 
아무래도 뉴욕은 누가 떠나고 오는 게 굉장히 간편한 곳이야. 사람들이 많이 바뀌지. 근데 LA는 그렇지 않아. 오래 거주할 수 있는 곳이야. 근데 이게 장점이자 단점이라고 할 수 있어. 정착할 수 있는 곳이라 좋지만 또 이미 정착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60-70대 유명한 촬영 감독들 사이에서 어떻게 또 경쟁을 할까 싶어. 은근, 아니 많이 고독한 것 같아. 사람들이 LA에 정착하려면 길게는 10년, 적어도 5년 걸린다고 하더라고. 장난 아니지. 아직 난 거기에 입만 댔어. 
 
그리고 공기도 좀 달라. 뉴욕은 ‘빨리빨리’, LA는 ‘쉴 땐 쉬지만 일할 땐 일하자’는 분위기야. 뉴욕은 회오리바람 같다면 LA는 큰 태풍 같아.  
 
- 그래도 자신감 있어 보여. 
 
 자신감을 되찾은지 얼마 안 됐어.(웃음) LA에 딱 도착하고 나서의 1년은 진짜 정신없었던 것 같아. 뉴욕은 빨리 적응할 수 있었거든. 도시이기도 했고 내 나이 또래 사람들이 으쌰으쌰하는 분위기가 있어서. 근데 LA는 ‘와- 내가 저기까지 어떻게 가지?’하는 느낌이었어.


*인터뷰이의 포트폴리오가 궁금하다면? >> http://www.jjkyoon.com/


Q. 나중에 어떤 작품을 찍고 싶어? 
 
나 같은 영화를 찍고 싶어. 인터뷰하면서 네가 나보고 다이나믹하게 살았다고 했잖아. 근데 사실 그렇지도 않아. 의외로 나 같은 사람들 되게 많아. ‘달라 보이지만 결국엔 다 사람이었구나.’하는 공감을 일으킬 수 있는 영화를 찍고 싶어.
 
Q. 그럼 어떤 감독이 되고 싶어? 
 
‘이 사람 하면 이 영화.’ 하는 감독이 되고 싶진 않아. 그냥 ‘이 영화 참 좋았는데 감독이 누구더라?’ 정도면 좋겠어. 그래도 내가 찍은 영화로 인생에 위로를 받을 수 있었으면, 동네 친구처럼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었으면 좋겠어.



 
Q. 지금 어떤 이야기가 제일 궁해?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이겠지 아무래도. 그게 뭐든. 그냥 궁금한 게 참 많아. 이 세상에,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예전에는 어떻게든 질문해보고 그랬는데 지금은 기다림의 상태인 것 같아. 자연스레 기회가 오면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어보는 거지. 
 
Q. 이전 인터뷰이가 남긴 릴레이 질문이 하나 있어. 너에게 사랑이란 뭐야?

엄청 심오하다.. 사랑이란.. 질문을 받는 순간 말이 없어지는 것!(웃음)

Q. 이번엔 네가 다음 인터뷰이에게 릴레이 질문을 하나 남긴다면? 
 

스스로를 사랑하냐고 물어보고 싶어. 
 
- 그에 대한 너의 대답은? 
 
노력 중. 스스로를 잘 챙겨주세요.(웃음) 
 
Q. 죽고 난 후에 사람들이 널 어떻게 기억했으면 좋겠어? 
 
날 굳이 기억 안 해도 되는데. 기억하고 싶은 사람은 기억할 거고. 특별히 내가 원하는 모습은 없어. 그 사람들 의견을 존중해주고 싶어. 
 
- 묘비명은 남길 거야? 
 
묘비명을 남길지는 잘 모르겠어. 나이가 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그때 가서 생각할래. 

지윤이가 직접 찍어준 인터뷰 장소(가로수길, 레이브릭스)


결국은 태도다. 그녀에게도 영상 쪽 일은 처음이었고, 미국 생활은 처음이었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차근차근 잘 해낼 수 있는 것은 언어를 잘 해서도, 부모님께서 뒷받침을 해주셔서도 아니고, 결국 그녀의 태도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터뷰를 하는 내내 그녀에게서는 왠지 모를 에너지가 느껴졌다.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느낌, 왠지 잘 될 것만 같은 느낌, 나아가 본인이 알지 못하는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 넘친다는 느낌. 이런 좋은 느낌들이 그녀 주위로 '좋은 기회들'과 '좋은 사람들'을 모아준 게 아닐까. 

사실 한 번의 인터뷰로 그녀가 어떤 사람이라고 정의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인터뷰 내내 그녀에게서 밝은 에너지가 느껴졌다는 것이다. 그녀를 응원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한 사람으로서, 그 밝은 느낌만은 잃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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