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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흔, 나의 글쓰기, 나의 박완서

양혜원 에세이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by The Emilia Moment


이번 여행길엔 소박하고? 야심 차게! 두 권의 얇은 책을 챙겼다. 아무렴 이 정도 분량은 읽고도 남을 것이라는 허세 가득한 마음으로.

결과는? 늘 그렇듯 두 권의 책 모두 첫 장은 펼치지도 못한 채 짐 덩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동할 때마다 내가 왜 또 읽지도 않을 책을 바리바리 싸 들고 왔을까 자책하며.

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테지만, 여행 짐을 살 때마다 빠지는 딜레마: 책을 가져갈 것인가 말 것인가. 읽지 못할 걸 알면서도 끝내 챙기고야 마는 건 책에 대한 갈망일까, 나 자신에 대한 무지일까. 그도 아니면 허영심일까(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 것만)


그나마 이번엔 얇은 책을 고른 것이 나름의 발전이라면 발전인데, 여행이라는 일상 탈출을 기회로 간절히 읽고 싶은 책, 내 마음이 향하는 곳을 발견하는 좋은 기회로 생각한다면 조금은 근사한 변명이 되려나?​​


아무튼 그리하여 결국,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밀린 숙제 해치우듯 책을 겨우 펼쳤다. 그리고 깨닫고야 만다. 지금 이 책을 만나기 위해 긴 여행과 기다림의 시간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고.


이번 여행길에 고른 두 권의 책은 내 스무 살 대학 시절 등대 같은 존재였던 헤르만 헤세와 박완서의 책이다. 박완서의 책은 정확히는 박완서의 책과 글쓰기에 대해 다룬 양혜원의 에세이집,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책표지에 에세이집이라고 쓰여있지만 박완서 연구자인 저자의 박사 논문을 바탕으로 한 만큼 그 깊이에 있어서는 박완서 연구서 혹은 평론집이라 해도 무방하다. 거기에, 오히려 이 부분이 나를 더욱 사로잡은 부분인데, 양혜원의 개인적인 경험과 생각 그리고 박완서를 향한 애정이 담뿍 담겨있어 쉬이 읽힌다. 그렇다고 내용이 쉽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쉽게 읽히지만 깊은 사유의 시간을 요하기에 이 책을 다 읽어내는 데는 무려 삼일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앉은자리에서 1시간이면 읽고도 남을 분량의 책을 장장 삼일에 걸쳐 읽은 건 한 문장 한 문장이 귀해서다. 새벽 시간에 조금씩 야금야금 아껴 읽다 아쉽게 마지막 장을 덮었다. 그러고는 이내 첫 장을 다시 넘기는 나를 발견한다. 이 책은 아무래도 한 번 더, 어쩌면 그 이상, 읽게 될 듯하다.


그건 작가 양혜원의 힘이다. 작가 박완서를 다시 찾게 된 것만큼이나 작가 양혜원을 알게 된 건 크나큰 발견인데 작가로서의 존경심이 들 뿐만 아니라 마치 내가 쓴 듯한 착각이 들 만큼 내 마음을 누군가의 글에서 발견할 때의 벅참을 느낀다.


서로 매우 다른 인생 경로를 거쳤지만, 모두에게 마흔이라는 나이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 양혜원, <박완서 마흔에 시작한 글쓰기> 중에서


스무 살에 바라본 박완서는 그녀의 세대, 그녀의 나이대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세련됨이라고 해야 할까. 푸근함보다는 약간의 서늘함이 묻어나는 그녀만의 문체와 문장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정작 내가 매료된 건 그녀의 개인적 인생 여정이었다.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던 이가 마흔이 되어서 어느 날 갑자기 글쓰기를 시작했다는 했다는 것이 그녀의 소설보다 흥미로웠다. 당시의 내겐 하나의 희망이기도 했다.


문학의 세계에서 직업의 세계로 나아갈 결심을 하는 데에는 그녀의 이러한 여정이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나도 언젠가 그녀의 나이쯤 다시 이 세계로 돌아올 수 있으리란 기대, 그녀의 나이쯤 되면 경험과 연륜으로 위대한 저자들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고 어쩌면 나도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같은 것.

내가 왜, 어찌하여, 결국 마흔이란 나이에 글쓰기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양혜원의 책을 읽으며 다시금 확인한다. 내 생각을 누군가의 글로 읽을 때의 벅참 같은 것을 느끼며.

박완서의 마흔, 양혜원의 마흔. 그리고 나의 마흔. 우리 각자의 인생 경로는 다르지만 마흔이란 분기점에서 우린 이렇게 글로 연결됐다.


아. 다시 박완서를 읽어야겠다. 스무 살 시절, 도서관 한편에 앉아 박완서의 책을 모두 읽어버리고야 말겠다 결심했던 순간을 기억하며. 마흔에 만날 그의 글 속 세상은 어떻게 다가올지 궁금하다.

인생의 등대 같은 이가 있다는 것. 책을 통해 그의 세상을 계속해서 만날 수 있다는 것. 너무도 멋지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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