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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나무 Apr 22. 2020

폐쇄병동 입원록

정신과 레지던트 시작하기

 2월 28일 저녁 11시. 정신과 레지던트에 합격한 동기 2명과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폐쇄병동 문 앞에 서 있었다. 두툼한 철문은 웅장한 크기만큼이나 삭막한 기운을 풍긴다. 각자 손에는 옷이 가득 든 캐리어와 두툼한 이불이 들려있다. 아직 정신과 업무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없는 신병에게 주어진 첫 임무는 폐쇄병동 내부 의사당직실에 잠입하는 것이었다. 잠입인 이유는, 환자들이 우리가 들어가는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의학드라마에서 스파이 액션으로 장르가 변한 영화에 적응하지 못한 배우처럼, 우리는 잔뜩 긴장한 상태였다. 


 인턴 생활을 처음 할 때도 비슷한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 피는 제대로 뽑을 수 있을까 긴장하며 시작했던 인턴. 인턴이 끝나가는 2월 28일 오전까지는 달리는 말 위에서 주사기를 던져도 피를 뽑아낸다는 말턴(끝 말, 인턴 턴)으로서 사뭇 거만해져 있었는데. 3월 1일 시작하는 레지던트 1년차로서의 삶은, 지금까지 했던 것은 아무 도움이 안 되고 새로 모두 배워내야 한다. 환자와 면담하고 심리를 다루는데 지금까지 배운 채혈 기술, 심폐소생술, 인공호흡법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괜히 인턴 때 일 열심히 했나. 차라리 책이라도 더 볼걸. 얌체처럼 일 미루던 인턴 동기가 떠올랐다. 그 아이가 똑똑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에 맴돈다. 


 폐쇄병동에서 저녁 11시가 되면 환자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가서 취침을 해야 한다. 잠이 오지 않더라도, 본인에게 배정된 침대에 누워있어야 한다. 잠은 정신질환에 중요한 요소이지만 환자들은 자려고 하지 않으므로, 11시에 누워있기는 폐쇄병동에서 지켜야 할 중요한 규칙 중 하나이다. 나와 동기들은 선배들이 만들어준 만능열쇠로 철문을 따고 도둑고양이처럼 들어갔다. 스파이 액션은 성공적이었고, 스테이션을 지키는 간호사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우리를 본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이런 성공을 자축할 분위기는 아니었기에 우리는 서둘러 각자 배정받은 침대에 이불을 펴고 잘 준비를 했다. 환자들과 반대로, 우리는 어떻게든 잠들어야 했다.


 3월 1일 0시가 넘어갈 때쯤. 이제 막 1년차가 되어버린 우리 당직실 문을 누군가 다급히 두드린다. "환자 쓰러졌어요!" 우리는 밖으로 뛰어나갔고,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널브러져 있는 환자가 보였다. 딱 보기에도 상황은 좋지 않았다. 인턴 생활 내내 배웠던 심폐소생술 상황이었다. 정확히는 맥박이 있었으므로 직전에 가까웠다. "여기서는 CPR 못 해요! 중환자실로 내려야 해요!" 자다 일어난 우리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몸이 움직였다. 한 명은 들것을, 한 명은 산소통을, 한 명은 침대를 끌고 뛰어왔다. 중환자실에 바삐 전화하는 간호사 선생님을 뒤로하고 우리는 침대를 끌고 중환자실로 달렸다. 정확한 기억은 나지 않는다. 중환자실에서 채혈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심전도를 찍었던 것 같기도 하다. 급한 마음에 당직 내과 선생님이 시키던, 인턴이 하던 일을 했던 것은 확실하다. 


 이미 4년 전 기억이다. 이제 막 전문의가 된 지금, 나는 다시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긴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폐쇄병동 문 앞에서 덜덜 떨던 이전과는 다르게, 열심히 살았던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직장 들어가면 대학교 때 배운 것 아무 쓸모없다는 시쳇말과 같은, 과거를 부정하는 말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심지어는,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냐고 왜 목숨 거냐고 타박하는 사람들이 안타깝다. 지금 하는 일이, 조금 있다가 다가올 새로운 시작에 쓰일 재료라는 사실을 몸으로 배웠다. 인턴 때 배웠던 것이 아무 쓸모없다고 생각하던 그 순간, 그 기억과 기술이 위기를 넘기게 도와줬다. 그래서 나는 이 새로운 시작이 기대된다. 이 일을 해서, 나는 또 몇 년 후에 뭔가를 시작할 거다. 그 시작이 더욱 재밌어지도록, 나는 이번에도 있는 힘껏 발버둥 치고, 적응해보려고 한다. 


사진 출처 : Jukan Tateisi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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