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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빠나무 Dec 09. 2020

당신 주치의가 친절하지 않음에 대한 변명

허지웅 작가가 쓴 책을 읽었다. 살고 싶다는 농담.


암투병 과정에서 겪은 생각과 삶의 변화가 드러나는 책이다. 


그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겪은 작가가 풀어내는 생생한 이야기에는 진실성이 묻어난다. 




하나의 에피소드에 세상에서 가장 주사를 못 놓는 인턴이 등장한다. 


그 인턴은 작가의 팔에 6개의 시퍼런 멍을 만들고, 사타구니의 두껍디 두꺼운 동맥에서도 혈액을 채취하지 못하여 반대쪽을 한 번 더 찌른 초짜 의사다.


8번을 주삿바늘에 찔리면 아마 부처님도 뺨 싸대기를 날릴 텐데, 작가는 이내 지친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그 이후 고통의 시간을 견뎌낸다. 




내가 의사라서일까.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엑스트라 등장인물의 이야기에 여러 가지 생각이 든다. 


이 인턴은 어떻게 찌를 때마다 고통스러워하는 작가를 8번이나 찔러댔을까.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라서? 환자의 고통을 몰라서?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의사는 실수하고 싶지 않고, 혼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한 번에 실보다 가느다란 혈관에서도 혈액을 뽑아내는 슈퍼 인턴이 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현실은 손을 벌벌 떠는 초보인 것을. 


결국 실수한다. 환자의 눈총이 따갑다. 아니, 따갑게 느껴진다. 


책에서 작가는 인턴에게 어떠한 분노도 표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인턴은 8번을 찌르는 동안 작가의 분노와 체념, 고통과 설움, 눈물까지 느꼈을 것이다. 


정확하게는, 상상했을 것이다. 그 상상이 너무나 리얼하니까 실제처럼 느껴질 정도로. 


식은땀이 뻘뻘나고, 안 그래도 떨렸던 손이 수전증 환자보다 더 떨었겠지. 




그런 긴장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혈액을 채취하기 위해, 그 의사는 환자의 고통을 잊어야 한다. 


아무도 그 의사를 대신해주지 않는다. 


물론 환자가 엄청나게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피우면 가끔 대신해주는 사람이 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결국 그 의사는 또 다른 사람을 찌를 것이다. 


그 의사는 계속 찔러야 한다. 찌르고 찌르고 찌른다.


실수하고 긴장하고 성공하고 안도하고 혼나고 쫄았다가를 반복한다. 


그리고 깨닫는다. '아, 환자의 고통을 모를수록 내가 실수를 덜하구나.'




많은 사람이 말한다.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의사가 되어라.'


맞는 말이다. 그런데 환자의 고통에 '정말로' 공감을 하면 나는 그 사람을 치료하기 너무 어렵다. 


의사는 자신의 가족은 수술을 집도하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실수를 하기에, 그래서 의사도 실수를 하기에, 만에 하나 지금까지 실수가 전혀 없었던 의사라도 이번에 실수를 해서 가족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만들 가능성이 존재하기에.


의사가 너무나 많은 긴장을 하고 자신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기에 수술을 하지 않는다는 불문율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 나에게 특별한 의미가 없는 '환자'니까 자신의 기술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의미가 있는 특별한 사람은 오히려 결과가 안 좋다. 


내가 그 사람을 잘 모르고, 고통도 모르고, 마치 인형에게 하듯이 할수록 내 기술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어진다. 


'VIP 역설'이라는 말이 있다. 아는 의사에게 지인이라고 특별히 부탁하면 오히려 결과가 안 좋은 경우를 말한다. 


의료현장에서 상당히 자주 겪는 일이다. 


나는 그 원인이, VIP가 더 이상 의사에게 '평범한 환자'가 아니라 특별한 누군가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환자를 뺑글뺑글 돌리더라도 자세를 제대로 잡아야지 주사를 한 번만 찌를 수 있다. 


골절 환자가 비명을 질러도 제대로 잡아 늘려서 엑스레이를 찍어야지 한 번만 찍을 수 있다. 


환자에게 아무렇지 않게 자살하고 싶은 생각이 있냐고 물을 수 있어야 자살을 예방할 수 있다. 


내 '특별한' 사람에게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내 어머니가 비명을 지르는데 다리를 잡아당겨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내 아버지에게 죽고 싶은 생각이 있냐고 물을 수 있을까?


내가 약한 사람이어서인지, 나는 자신이 없다. 


내가 고통을 모르고 공감을 하지 않을 수 있어야지, 병원에서 퇴근하면 안 볼 사람이어야지 할 수 있다. 


아마 나도 모르게, 그리고 많은 의사들이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변하지 않았을까. 




물론 의학적인 부분이 강조될 때는 공감을 끊어서 프로페셔널하게 일하고, 설명을 해주거나 인간적으로 대할 때는 또 따뜻하게 하는 철인이 있을 것이다.


많은 의사가 철인이 되어야 하고 슈퍼맨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환자에게 공감하지 않을수록, 의사는 편해진다. 


환자의 고통을 모를수록, 의사의 기술은 향상된다. 


너무나 강한 유혹이다. 어차피 평가는 환자가 좋아졌느냐이다.


대학병원의 그 긴 대기시간과 비싼 비용, 불친절함을 감수하고라도 조금 더 나은 기술을 가진 의사에게 치료받고자 전국에서 사람이 모여든다. 


사람이 미어터져도 '명의'에 나온 의사를 찾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의사는 어째서 환자에게 공감해야 할까. 왜 고통을 이해해야 할까. 




정신과 의사인 나를 찾아오는 사람도, 내가 공감해주는 것보다 당장 증상을 없애주기를 원한다. 


술을 끊지 못하는 남편을 데려오는 부인은 나에게 환자 말 들을 시간에 마법 같은 기술을 부려서 술을 못 마시게 해달라고 한다. 


환청과 망상을 없애주기를 원하고, 불안이 없어지기를 바란다. 


공감 그 자체가 치료인 경우는 많지 않다. 성격장애나 만성 우울 정도일까. 


그럼 나는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 


둘 다 잘하면 좋을 텐데, 참 어렵다.




여기까지 의사의 변명이다. 나 혼자 생각나는 대로 쓴.


내가 더 멋진 놈이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일기장에나 쓸 이야기니까 여기까지.



아빠나무였습니다. 


Photo by Jonathan Borb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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