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인의 고민이 와 닿지 않는 이유
우리 이야기 좀 해
여자가 남자를 불러 세운다. 남자에게 할 말이 있다. 진지하다. 강렬한 감정이 나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쏟아낸다. 조금은 편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남자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하다. 내 고민이 시답잖다는 듯이 말한다. 기분이 나쁘다. 내가 걱정한 것, 내가 심각하게 생각한 것들이 이 남자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걸까. 여자는 화가 난다. 남자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남자에게 쏘아붙인다. 이야기 들어주는 것도 못하냐고.
남자는 여자가 불러 세우면 부담스럽다. 여자의 감정이 흘러넘쳐서 자기에게 넘어온다. 힘들다. 어서 이 상황을 피하고 싶다. 잠깐만 들어도 해결책이 보인다. 간단하게 풀어버리면 될 것 같다. 여자에게 이야기를 해 본다. 돌아오는 반응은 역시나. 혼이 난다. 여자가 고민을 이야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즐겁게 지내자고 연애하는 것 아니었던가? 그냥 즐거운 이야기만 하고 싶다.
사랑할수록, 고민 들어주기는 더 어렵다
남자가 여자의 고민을 들어주기 어려운 것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이과적 감성이 남자를 지배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자는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고 가볍게 말한다. 하지만, 그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사랑하면 할수록, 상대의 언행에 강렬한 감정 반응이 일어난다. 에티오피아에서 이름 모를 80세 할머니가 죽은 것과, 연인이 죽은 것은 전혀 다른 감정을 만든다. 연인의 행동, 말, 표정은 모두, 사랑하면 할수록, 내 마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연인이 나에게 테니스공만큼만 감정을 던져도, 나에게는 투포환이 던져지는 것 같다. 그런 연인이 무거운 감정을 쏟아낸다? 마음에 쓰나미가 밀려들어온다.
이 이야기는, 남녀를 바꾸어도 그대로다. 인간은 강렬한 감정이 몰아치면, 오히려 전혀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피한다고 불러도 좋고, 무시한다고 불러도 좋다. 여하튼 감정의 격류가 너무나도 힘들기에, 없애버리고 싶어 한다. 그러면 여자의 고민에서 감정은 사라지고, 문제만이 남는다. 문제는 해결하면 된다. 이십 년을 살아왔다. 해결책이 눈에 보인다. 모든 감정이 배제되었으니 해결책도 간단하다. 감정이 전혀 없는 로봇의 문제는 간단하다. 다 부수고 다시 만드는 것도 금방일 것 같다. 하지만 연인은 인간이고, 감정을 가졌고, 문제가 그렇게 해결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다. 연인도 해결책을 안다. 직장 그만두면 되겠지. 그 친구하고 인연 끊으면 되겠지. 그렇게 안되니까, 그래서 괴로우니까 고민인 것이다.
감정 다루기는 연습뿐이다
당신이 감정 변화가 없는 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다녔다면, 당신은 감정을 다룬 것이 아니라 배제하려고 노력한 것뿐이다. 연애를 몇 번 안 한 상황에서 감정적 격류가 찾아오면 대처하기 어렵다. 다시 그 감정을 배제하는 방법을 반복할 뿐이다. 결국, 도움이 필요한 상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연인은 감정 다루기를 위한 보조가 필요한데, 그 감정을 날려버렸으니 말이다. 반대로, 자기감정을 잘 느끼고 친구 고민 정도는 아주 잘 들어주던 사람도 연인의 고민은 못 들어주기도 한다. 감정의 격류가 그런 때보다 더 강하기 때문이다.
이제 하나씩 해봐야 한다. 연인에게 고민을 들었을 때, 마음에 퍼지는 불편함을 느껴보자. 그 불편함이 뭔지 살펴보자. 말로 표현해보자. 익숙하지 않아서 무섭고 당황스러울 것이다. 조금만 힘내자. 일단 감정을 느끼고, 설명하고, 이름 붙이면 훨씬 편해진다. 이제 연인이 토해내는 감정이 뭔지 느껴보자. 그 속에서 힘들었던 연인의 고통을 느껴보자. 그 고통이 너의 고통이 되었을 때, 그대는 연인에게 공감한 것이다. 진정한 사랑의 출발선에 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