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텔라 - 로스 아르코스
또다시 아침이 밝고 여정이 시작된다.
전날 슈퍼에서 산 요거트와 계란을 먹고, 아침 일찍 문을 연 부지런한 가게에서 과자까지 사 길을 떠났다.
이 날은 여정 초반에 까미노를 걷는 사람들은 다 아는 유명한 랜드마크가 몇 있었다.
길 위에 있는 이런 이벤트들은 지루한 순례길 걷기에 활기를 더해준다.
출발한 지 한 시간이 채 되지 않아 등장한 Forjas Ayegui.
Ayegui라는 작은 마을에 있는 대장간이었다.
대장간이라니. 전래동화에만 있을 법한 그 이름이 실존하는 장소였다니.
하여튼 이곳에서는 쇠를 두드려 만든 조개 목걸이를 판매한다.
민무늬 조개는 5유로, 표식이 달린 조개는 7유로로 가격도 매우 저렴하다.
까미노에서 이런 기념품을 만나면 절대 지나쳐서는 안 된다. 비슷한 게 또 있겠지 하고 지나쳤다간 두고두고 후회하기 십상이다.
십자가가 새겨진 조개목걸이를 팔에 걸었다가 목에 걸었다가, 이 날 이후로 까미노 내내 분신처럼 지니고 다녔다.
목걸이를 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등장한 또 다른 랜드마크, Fuente del Vino de las Bodegas Irache, 번역하면 와인 분수. 이 수도꼭지에서는 무료 와인이 콸콸 나온다.
이 무슨 '찰리와 초콜릿 공장' 적 설정?
별생각 없이 걷다 보면 일반 급수대인 줄 알고 지나치기 쉽다.
넘어가기엔 아쉬운 곳이라 내 뒤로 그냥 지나가려는 전 세계 사람들을 불러 세우는 오지랖을 부렸다. 여러분 여기 와인 분수가 있어요! 그냥 가지 마세요!
나중에 안 이야기인데, 이 와인은 순례자들이 가방에 달고 다니는 조개로 먹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그런 감성에 죽고 못 사는 사람이라 미리 알고 갔다면 불편을 무릅쓰고 무조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몰라서 아침댓바람부터 와인 병나발을 불었다.
시작한 지 한 시간 만에 이렇게 특별한 공간들을 지나니 마법같이 그 후의 길이 지루해졌다.
아마 이 날 처음으로 걸으며 지루하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인간이 이렇게나 간사하다. 아무리 예쁜 길이어도 그 감흥이 채 일주일을 못 간다.
이 날은 중간에 쉬어갈 바도 평소보다 훨씬 적었다.
대학생 EJ & YH 님과 함께 길바닥에 앉아서 쉬려는데, 같은 과자를 다른 맛으로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강력 추천으로 처음 먹어 본 라임맛 비스킷. 키드오 같은 맛이었다.
나는 초코맛이 더 좋았는데 내 리액션을 기대하는 그들이 귀여워서 라임이 더 맛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아침엔 적당히 화창하고 선선한 날씨였는데 하늘이 점점 흐려졌다.
지루한 길에 날씨까지 엉망이니 몸이 점점 더 처졌다.
다 끝나고 돌아보니 연박할 시기가 다가온다는 신호였던 것이다. 연박을 원하는 몸의 아우성이었다.
조금 일찍 나왔더니 길 내내 거의 한국인밖에 보지 못했다.
전날 이야기를 하다 서로 마음이 잘 통한다는 걸 알게 된 커플 JH & SY. 이 날엔 그들과 함께 식사 약속을 잡았다. 목적지 코앞에서 그들과 만났고 폴대도 준비하지 않은, 순례자 자격 박탈인 나를 위해 JH님이 폴대도 하나 빌려주었다.
전날까지만 해도 어색함이 남아있었는데 이날부터는 오래 알고 지낸 친구처럼 편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압축하여 3-4시간 정도 이야기를 하다 보면 급속도로 친해지는 건 어쩌면 당연할지도?
그리고 Los Arcos, 로스 아르코스 도착!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에 펼쳐진 동물농장에 조금 당황했다.
까미노 일주일차, 가장 시골 같았던 마을에 입성했다.
규모가 있는 마을엔 큰 슈퍼가 있고, 이 경우엔 식비를 아끼기 위해 장을 봐 식사를 해결한다.
하지만 이곳은 대형슈퍼가 없는 마을이었다. 가장 큰 슈퍼도 구멍가게라고 불러도 무방한 사이즈였다.
다행히 마을엔 Mavi라는 이름의 유명한 레스토랑이 하나 있었다. 로스 아르코스에서 묵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이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다. 세명의 한국인도 이곳으로 향했다. 인기가 많은 식당이어서 프랑스에서 온 모자와 동석하게 됐다.
순례길 위, 대부분의 식당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Menu del dia(메누 델 디아), 번역하면 '오늘의 메뉴'라는 의미이다.
메누 델 디아는 애피타이저, 메인, 후식 3코스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 물이나 와인까지 함께 제공되니 15유로 정도의 가격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하고 싶을 때 이 옵션을 택하곤 한다.
여기에 아낌없이 쌓아주는 바게트는 덤!
스페인 사람들은 이 빵을 정말 많이 먹는다. 나는 원래 무(無) 맛의 빵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까미노에서 씹을수록 고소함이 느껴지는 무맛의 매력을 알아버렸다.
애피타이저로는 양송이버섯, 메인 메뉴는 돼지갈비찜(?), 후식은 커스터드를 주문했다.
명성만큼 모두 맛있었다. 산처럼 쌓아주는 바게트를 촉촉한 기름에 찍어 엄청나게 먹어치웠다.
모자 중 어머니는 영어를 거의 못 하시는 분이었다. 그분의 말씀을 아들이 영어로 번역해 주었다.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표현을 안 하시던 분이 별안간 러닝 로고가 박힌 SY님의 옷을 보시더니 엄청나게 반가워하셨다. 이 분은 바르셀로나, 아테나, 파리에 프랑스 다른 도시에서도 마라톤을 하신 분이었다.
까미노 위의 식당에서 만난 한국인이 입고 있던 러닝 티셔츠를 보고 본인의 러닝 크루에 사진을 보내고 싶다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제안하셨다. 까미노에선 이런 귀여운 일화들이 자주 생긴다.
마을에서 가장 큰 슈퍼는 (아마) 폐업 직전이었다.
분명히 Welcome이라고 맞이해 줬건만, 아무것도 살 게 없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수분이 다 빠져버린 쪼글쪼글한 키위는 처음 봤다.
아마 이때부터 스페인 대형 슈퍼 체인 디아(Dia) 맹신이 시작된 것 같다.
국적 불문 모든 순례자들의 최애 장소는 디아일 것이다. 까미노에서는 디아가 있느냐 없느냐가 좋은 마을의 기준이 된다.
빈약한 슈퍼 덕분에 간식거리도 못 사고 물만 간신히 사서 알베르게에 돌아왔다.
함께 식사를 한 JH & SY 커플과, 또 다른 한국인 HY님까지 넷이 저녁 내내 식탁에 앉아 떠들며 시간을 보냈다.
서로 알게 된 지 며칠밖에 되지 않았는데 너무 많은 것들을 공유해서 그런지 서로가 너무 편했다.
까미노 극초반엔 길과 풍경에서 즐거움을 느끼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즐거움이 더 커져버린다.
혼자 떠난 길이지만 함께 길을 걷는 사람들 덕분에 하루도 외롭지 않았다.